연말엔 으레 친한 사람들을 만나 술잔을 기울인다. 지난 연말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간만에 대학 시절 후배들을 만났다. 한 후배는 금융회사의 차장이고, 또다른 후배들은 모두 대기업 과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 삼합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던 가운데 한 후배가 대뜸 “형, 저 노조위원장이나 할까요?”라고 한마디 툭 던졌다.

나는 그 말에 순간 짜증을 냈다. “노조위원장이 무슨 감투냐? '노조위원장이나'가 뭐냐? 노조가 무슨 장난이냐?” 날카롭게 찢어지는 힐난의 목소리가 좀 높았나 보다. 후배는 얼른 수습을 시도했다. “위원장이나… 라고 한 건 잘못했어요. 하지만 우리 노조는 진짜 맛이 갔어요.”

제1금융권 노조이니 그렇기도 하겠다 싶어서 그냥 넘어가려는데 후배가 한마디 더 내뱉는다. “대대적인 인력감축을 하고서 다시 비정규직으로 계약해서 창구쪽으로 쭉 배치해놓은 것을 보면 울화통이 터져요. 노조는 그런 사정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 신경도 안 쓰고…. 우리 처제가 비정규직인데 90만원도 못 받아요.”

그때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 때문에 고용의 안정을 찾고, 임금의 안정을 이루는 정규직 노동자가 술안주거리가 되었다. 그런 사실을 훤히 알고서도 소속 조합원의 이해에만 신경을 쓰는 노조도 좋은 안주거리였다.

술이 얼큰하게 취하자 그놈이 기어코 내 심사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형, 비정규직 밟고 앉아서 차장 노릇이나 하고 있는 제가 밉죠? 사는 게 참 그렇네요….” 그순간 십수년 전 대학시절 보았던 목판화 한 장이 떠올랐다. 늙수그레한 주름진 아저씨 얼굴이 새겨진 한지의 한 귀퉁이에는 이런 글씨가 써 있었다. “사는 게 뭐지…”

자기 임금, 자기 고용과 노동자의 대자적 계급의식

연말이면 이곳저곳에서 불우이웃을 돕자고 한다. 연말이 아니어도 요즘은 자원봉사에 나서는 사람들의 행렬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나도 우연찮게 걸려온 전화 한 통화 때문에 장애인단체에 작은 성의를 보태야 했다. 반강제였지만 그래도 가슴은 따뜻했다. 어려울 때일수록 어깨를 걸고 손에 손을 맞잡는다면 세상의 한파를 좀더 빨리 녹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노동운동, 민주노조운동 안으로만 들어오면 ‘따뜻한 마음’ 따위를 거론하는 일은 금기시 된다. 낭만적이라는 고상한 비판은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이 더 일반적이다. 왼쪽의 노선을 가진 분들일수록 더욱 비판적이다.

사회공헌기금에 대한 비판은 대표적인 예이다. 기업의 지불능력에 따라 임금을 다르게 받고 있는 처지를 개혁하고 바꾸자고 요구하며 기업에게 사회공헌기금을 요구하고, 더 많이 받는 노동자들이 나서서 임금의 차이를 개선하자는 ‘지극히 당연한’ 주장에 대해, 대뜸 “그게 노동자로서 할 이야기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모 노동단체에서는 사회공헌기금 주장에 대해서 ‘천만 노동자 살해 프로젝트’라는 무시무시한 비난을 퍼부었다. 일부의 동지들은 ‘사회적 합의주의’를 부추기는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나보다 못한 노동자를 위해 내가 가져갈 몫을 약간 줄이고 함께 나누자고 하는 것이 과연 ‘반노동자’적인가? 네 것과 내 것이 없는 나눔의 세상은 오히려 노동자들이 꿈꾸는 세상 아닌가. 물론 일부에서 ‘노동자 내부의 나눔과 연대’에 대해 우려하는 이유를 모르진 않는다. 그것만으로 노동자가 해야 할 일을 제한하는 것이 초래할 위험을 걱정하기 때문이리라. 충분히 걱정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이유라면 비난은 ‘나누자’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할 것이 아니라 지독스럽게 ‘자기 임금과 자기 고용’에만 몰두하는 현실의 운동을 향해져야 한다. 단사별 임단투 때가 되어야 그나마 투쟁의 동력이 형성되는 민주노조운동의 내부 메카니즘을 바꾸자고 말해야 한다. 좀더 나아가 ‘노동자의 조직화’는 노동자의 현실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경제주의적이고 조합주의적이며 지독한 단계론적 인식에 머무르고 있는 그런 논리와 주장들을 비판해야 한다.

노동자는 ‘자기 이해’로부터 출발해야만 관심을 기울이는 경제적 동물인가? 자신에게 이로운 일에만 관심을 쏟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공통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이기적 존재인가? 그렇다면 즉자적 계급의식을 넘어 대자적 계급의식을 형성하는 일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공장에서, 사업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그 자체로부터 만들어지는 ‘존재의 의식’이 대자적 계급의식은 아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주류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한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투쟁과 자기고용 안정투쟁을 반복한다면 대자적 계급의식으로 무장하리라는 기대는 결코 할 수 없다.

나보다 특별히 잘난 것 없는데 정규직?

2006년 대한민국 노동자들의 대자적 계급성은 비정규직 문제에서 주요하게 드러난다. 비정규직 문제는 결코 민주노조운동 내부만의 화두가 아니다. 주변을 조금만 돌아다보면 비정규직이 차고 넘친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가족의 이야기고 잘 아는 사람들이 겪는 직접적인 이야기다. 그래서 누구든지 비정규직 문제로 드러나는 현실 한국사회의 문제는 누구나 공감하는 절박한 문제이다. 그런 문제에 눈감고서는 사회의 모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고 말할 수 없다.

안타깝지만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노동조합의 노력은 국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고 비정규직 법안 개악을 저지하며 비정규 권리입법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데도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다. 왜 그럴까?

개인적으로 보기에 그 이유는 이중적이다. 첫째는 비정규직 관련 투쟁을 좀더 제대로 확실하게 하지 않아서 그렇다. 솔직하게 말해서 비정규직 투쟁을 한다고 할 때, 제 일처럼 나서는 정규직노조를 찾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투쟁에 사활을 걸고 나서는 실제적인 동력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규직 노동자와 노조들에게 비정규직 투쟁은 당위적이긴 하지만 당장 시급한 절박한 자기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정규직 현장 노동자를 설득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 일선 조합 간부들의 하소연이다.

또다른 측면에서 볼 때, 정규직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자 질시의 대상이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신자유주의처럼 골치아픈 이야기를 들으며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생각하는 일을 누구에게나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장 똑같은 일을 하면서 월급은 훨씬 많이 받아가는 노동자가 내 옆에 있다. 나보다 특별히 잘난 것도 없고, 뛰어난 것 같지도 않은 그런 노동자가 나보다 더 많은 돈을 받고 더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이 부럽고 또 화도 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 다수는 ‘경쟁’의 이데올로기, 생산성과 성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소망하는 정규직이라는 자리에 있으려면 비정규직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데 현실의 정규직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정규직 노동자를 ‘기득권 집단’으로 보는 시각은 이로부터 형성된다. 안타깝지만 이런 시각은 지금 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있다.

대공장노조, 중소기업노조의 희망이었던 적 있다

80년대 말, 대공장 노조들은 자신의 임금인상을 쟁취하는 투쟁을 하면서 동시에 정부의 파쇼적인 임금정책에 맞서 투쟁했다. 자신의 임금을 올리기 위해서는 총액임금제와 임금 가이드라인에 맞설 수밖에 없었고, 무노동 무임금에 저항해야 했다. 그런 투쟁은 대공장보다 더 엄혹한 조건 아래 있던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투쟁이었다. 하지만 이제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기 임금, 자기 고용을 챙기는 일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희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노동자 분할과 분리의 구조이다.

노동자들에게 실리를 안겨주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하려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제 정규직의 것을 챙겨서 비정규직의 것을 보상하려는 구태의연한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 것부터 챙기고서는 노동자의 ‘계급적 연대’는 실현 불가능하다. 비타협적 투쟁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제적이고 조합적인 요구로는 불가능하다. ‘우리’라는 울타리를 만들며 ‘우리’의 요구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를 만드는 그 과정에 내 것을 덜어 나보다 어려운 동지, 힘겨운 또다른 노동자를 도우는 일은 금할 일이 아니라 무조건 권장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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