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아니 두려움이라 말하는 것이 더 옳겠다. 일간지 경제면은 두꺼워만 가는데 난 그것을 쫓아가려다 일찌감치 낙오하곤 했다. 혹 인터넷에서 용어를 검색하며 기사를 소화하려지만 나의 것은 되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또 저만치 달려간 경제기사를 못 본 체하며 신문을 사회면으로 넘겼다. 

경제에 대한 목마름 혹은 두려움

단위노조나 연맹에서 일하는 상근간부들과 술을 마실 때 종종 나오는 이야기가 ‘우리 공부하자’는 것이었다. 현장조합원을 만나도 새로이 들려줄 이야기가 없다, 이제 집행부를 비판하는 일도 마음에 내키지 않고 또 이렇게 남만 탓하다간 큰 일 나겠다는 걱정도 들었단다. 이때 대부분이 공감하는 주제가 경제였다. 이전에 자본론도 여러 번 읽었고 현대자본주의론 교과서도 방에 몇 권 꽂혀 있다. 신자유주의의 실체가 금융세계화라는 것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있다. 그런데 내가 사는 세상의 경제흐름을 잘 모르니 답답하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노동운동이 자본에 대항해 싸우는 운동이란 것을 잘 안다. 자본이란 놈이 엄청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 죄를 공소장에 쓰려니 내용을 채우기가 어렵다. 엉성하게 작성했다간 면죄부만 줄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전망도 망막하다. 노동운동은 비전을 가지고 미래로 향해야 한다. 그런데 미래를 그리려고 크레파스를 집어도 도화지에 넣을 내용이 마땅치 않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경제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요즘말로 ‘콘텐츠’의 빈곤인데 그 알맹이가 경제라는 이야기다.

작년 6월부터 민주노동당으로 옮겨 일하고 있다. 술자리를 같이했던 활동가에게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가서 열심히 공부해 오겠다고 약속했다. 현장활동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학습계획도 마련하기로 했다. 당으로 들어온 동료들과도 뜻을 모았다. 진보정당다운 경제개혁 로드맵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당 활동 책임이다. 자본을 제압하고 평등경제를 구축하는 프로그램을 체계화해야 한다고 말이다.

보좌관으로 일한 지 1년이 넘었다. 국정감사도 두 번 치렀다. 바빴던 기억만 남는다. 훈련소에 입소한 것 마냥 새로운 기술과 공간을 접했다. 아직 어느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경제학습계획안도 짜지 못했고, 경제개혁 로드맵은 어림도 없는 상태다. 

진보경제 연구자 저수지 고갈

최근 어느 노동조합이 의뢰한 공공부문 산업연구 프로젝트 발주과정에 부분적으로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는 참 어렵게 출발했다. 노동조합은 기존 연구용역에 비해 수배에 달하는 거액(?)을 연구비로 내놓았다. 그만큼 사측 공세에 대비한 연구가 절박했고 연구결과에 대한 기대도 컸다. 그런데 연구자를 찾기가 마땅치 않았다. 여러 대학을 뒤지고, 사회단체를 둘러보아도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연구자는 드물었다. 하도 답답해 대학원에 있는 후배를 질타했더니 그는 금세 ‘선배가 활동하던 때와 비교해 상황이 변했다’며 항변했다.

몇 년 동안 어느 산업노동관련 학회 운영에 참가하고 있다. 이 학회는 10여년 전에 산업노동 영역의 진보적 연구자를 조직하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경제학, 경영학, 사회학 학자들을 모았다. 여기서 무엇이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감이 넘쳤다. 지나간 시간만큼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노무현 정부로 지향을 옮겨가거나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폭을 이전에 비해 줄였다. 반면, 새로이 진입하는 신규 진보연구자는 대폭 줄었다. 다시 학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활력을 부여하려 애쓰는 몇몇 선생님들을 볼 때마다 송구스럽다.

최근 민주노동당은 조세, 금융 분야 정책연구원을 채용하기 위하여 공고를 내었다. 이 연구원들은 재정경제위원회 활동을 같이할 동료이기에 내가 속한 의원실도 후보자를 여러 경로로 물색했다. 그러나 지원자는 한 명도 없었다. 민주노동당이 연구자들에게 박봉을 강요하면서도 충분한 신뢰와 비전을 주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진보연구자 저수지의 고갈이 위험수위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진보운동이 경제전문가 양성해야

언제부턴가 난 내가 행한 약속을 조금씩 파기하고 있다. 노조간부를 만나도 우리 같이 경제를 공부하자고 선뜻 말하지 못한다. 당활동가들에게 진보경제 프로그램을 우리가 체계화해야 한다는 호기를 부리지 못한다. 포기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점검해야 할 과제가 많다는 이야기다.

진보운동의 경제 콘텐츠는 정보산업의 그것보다 훨씬 인내를 필요로 하는 역사물이다. 이 는 공동실천, 공동토론의 결과물이며, 그래서 함께 논의하고 검증할 동료를 필요로 한다. 사람이 없으면 함께 하는 공부도 가능치 않고, 진보경제 로드맵도 만들어지기 어렵다. 대학캠퍼스의 한계를 돌파하지 못하는 신진연구자들을 탓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들의 직면한 장벽을 진보운동이 풀어가야 한다.

이제 진보운동이 스스로 진보적 연구자의 재생산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보수화가 몰아치는 경제관련 영역은 특히 그렇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등 인프라가 미약하나마 만들어지고 있으나 여전히 인력난을 겪고 있다. 두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진보운동이 제도권 대학원 과정에 개입해야 한다. 핵심방법은 ‘진보장학제도’이다. 막 전문연구자로 성장하는 석·박사과정 학생들에게 논문주제 선택은 그의 장래 연구방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지금 연구보조금(혹은 조교임금)제도를 통해 사실상 이들의 주제를 결정하는, 제도권 교수단, 학술진흥재단, 국책연구소, 재벌연구소 등의 역할을 침식해가자는 것이다. 이들이 생계를 크게 걱정하지 않으면서 진보경제의제를 연구하고, 그것을 자료로 학위논문을 쓰고, 이후 진보진영에서 일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진보운동에 도움이 되는 연구결과를 내는 것이므로 재원은 아깝지 않다. 진보진영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기업 노동조합, 산별연맹이 규모 있는 프로젝트를 발주하고, 전국조직은 정책 활동비 일부를 장학금으로 조성할 수 있다. 

진보운동 경제프로그램을 꿈꾸며

노동운동의 기존 자원도 더욱 활용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무금융연맹이나 금융노조의 역할이 확장되어야 한다. 자체 연구소를 설립하고 금융공공성을 공론화하는 등 힘겹게 노력하고는 있으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시대인 만큼 이들이 진보운동에서 맡아야 할 역할이 크다. 자체 연구소의 설립 및 확장, 경제금융 전문가의 상급단체 및 진보정당 파견, 경제금융 교육프로그램 개발 및 교육위원 양성 등 과제가 많다.

난 아직까지 동료들과 행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제 그 약속을 파기하며 책임을 진보운동 전체에 돌리고 있다. 그래도 심하게 탓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역시 1년 전과 똑같이 우리 모두 진보운동의 경제 콘텐츠를 희구하고 곳곳에서 찾아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의지와 노력이 있는 만큼 성과는 있기 마련이다. 언젠가 진보정당의 연수원과 총연맹의 노동대학엔 경제과목이 여러 개 개설되고, 활동가들이 진보적 경제에 대해 밤늦게까지 토론할 것이다. 삼성공화국에서 이건희 일가만 떼어낼 것인지, 이번 기회에 재벌순환출자를 해체할 것인지 논쟁이 뜨겁다. 외국자본에 세금만 매기면 문제는 없는 것인지, 일본 우정민영화법안이 통과되었다는데 우리에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등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한나라당의 세금감면안을 규탄하다 10년 전에 민주노총이 똑같이 소득세 인하를 주장했었다는 폭로(?)에 모두 웃음을 터트린다. 그렇게 우리는 진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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