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수 의원 대법원 판결이 있던 날 국회 당 사무실에는 출입기자들이 하나같이 당원만큼 걱정과 분노의 표정을 담고 달려 왔다. 기자들로서는 대법원 판결에 대한 이런저런 예측이 있었을 터이고 법원 판결의 관행을 알고 있는 바 의원직 상실형을 한편으로는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나 막상 결과를 접했을 때의 참담함이 당직자인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조승수 의원의 평소 활동의 일거수일투족을 읽고 있던 기자들 사이에서 안타까움은 더욱 큰 것이었을 것이다. 다른 때와 달리 회의장 밖을 서성이며 김혜경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 한 사람 한 사람의 비장한 표정을 사진에 담는 기자들의 표정에서도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었다. 거의 모든 언론이 조 의원과 당의 심정을 잘 드러내는 기사를 썼던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내 경선 와중 터진 비리사건

중앙당 긴급기자회견과 다음날 울산 기자회견에 이어 숨 돌릴 틈도 없이 재선거 당내 경선과정을 거쳐 선거에 돌입했다.

재선거 돌입 직전 민주노총 강승규 부위원장 배임수재 구속 사건이 터졌다. 늘 보아 왔던 민주노총 간부의 일이기도 했고 당으로서는 설상가상 재선거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기에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긴급 최고위원회를 개최했고 민주노총이 파악하고 있는 상황보고를 받고 이견 없이 당 입장을 발표하기로 했다.

입장 발표 전 민주노총 대변인과 전화통화로 최종 상황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구속이 확인된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훼손한 일체의 행위에 대해 엄정 대응할 것’을 촉구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 과정이 1박2일 중앙위원회 개최 양일 간이었다. 중앙위 직후 최고위원회에서 다시 그에 대한 당원으로서 징계 방침을 결정하고 언론 브리핑을 하기까지 대변인으로서는 가장 곤혹스러운 과정으로 기억될 것이다.

기아차와 현대차 노조간부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민원실과 대변인실이 항의전화를 집중적으로 받게 되는 상황이야 어쩔 수 없는 문제라 치더라도 원칙을 견지하되 불필요한 오해가 없도록 입장을 발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 최고위원들 중에도 같은 입장이되 조건과 상황에 따라 이 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결이 달랐지만 제 살을 도려내는 아픔과 당에 미칠 파장에 대한 진통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때론 같고 때론 다르고

기아차 노조간부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는 충분한 상황파악과 논의 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의 입장 발표가 늦어져 여론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었다. 이후 현대차노조 취업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 즉시 입장을 내자 그 자체가 언론의 관심이 되었던 것은 그만큼 당과 민주노총, 노동계와의 관계와 사안에 대한 당의 대응에 관심의 초점이 모아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조 의원 재판 직후 여론조사에서 울산 북구에서 한나라당을 두 배 이상 앞섰던 여론조사 결과가 이후 주춤한 상태에서 현재 박빙의 접전이 되고 있는 것은 당과 이런 정황이 무관하지 않은 결과를 반증하는 것이다.

덤프연대 파업 집회가 있던 날 취재 나왔다가 당에 들른 한 기자로부터 한 덤프 노동자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파업에 처음 참가한 듯한 노동자의 이야기였다. 아직 민주노동당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이 가져온 변화를 뚜렷이 느꼈으며 노동자의 정치적 선택이 민주노동당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민주노총 간부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 민주노동당과 동일시되는 한계를 느꼈다는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다시 한번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과 민주노총, 당과의 관계에 있어서 복잡한 역학관계를 느낄 수 있었다.


전노협 이후 15년, 이제는 8만 당원

89년,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 속에 구사대와 용역깡패를 동원한 노동조합 파괴 공작과 경영자 단체의 무노동 무임금 공세에 맞서 노동자들의 전국적 조직이 준비되었고 다음해 90년 1월 수배 중이던 단병호 위원장을 초대 위원장으로 ‘전노협’이 결성되었다. 내 나이 스물네살 때였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나는 전노협 결성 이듬해 구로공단에 마지막 위장취업자가 되어 공장노동자가 되었고, 두번의 해고를 겪고 가리봉 5거리와 구로공단을 오가며 단체활동을 했다. 구로에서 활동하던 중 인근 단체와 서울지역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김문수씨와 민중당 대표였던 이우재씨가 한나라당에 가버린 소식을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아픈 추억도 있다.

그 15년 동안 무수히 많은 386세대들의 대대적인 정치진출이 있었고 노동자 서민과는 상관없는 그들만의 정치로 그들 중 상당수는 여야의 중견 정치인이 되었다. 수많은 노동열사와 함께 민주노총이 결성되었고 합법화되기까지 한국 노동운동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자주적 민주적 활동으로 평가받아 왔다.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당직자가 되고 지구당 활동을 하고 선거운동원이 되고 총선후보가 되고 지금 대변인으로서 노동조합 간부의 비리에 대한 당의 입장을 대변하기까지 15년이 흘렀다. 빈민운동을 했던 김혜경 대표와 70년대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을 했던 최순영 의원이 전국 각지를 돌며 당원들에게 생생한 진보운동의 역사를 들려주고 이야기 꽃을 피웠던 아름다운 시간이 흘렀다. 최소한의 활동비도 없이 중앙당과 지역에서 수많은 자발적 당직자들이 당 조직을 만들어왔고 당내 민주주의를 확립해 오는 과정에서 이제 당원이 8만이다.

이제는 비정규직 차별철폐로

권영길 대표의 속 시원한 TV 토론을 보며 눈물 흘리며 당원들 특별당비를 걷고 직접 유세차도 몰고 연설도 하고 시장도 돌고 골목을 돌며 대선을 치렀다. 노회찬 사무총장의 선대본일기와 촌철살인의 TV 토론을 보며 힘든 줄도 모르고 신명나게 총선을 치렀다.

수배 중에 전노협을 이끌었던 단병호 위원장이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의원이 되어 ‘노동자를 대변하는 국회의원 1명만 있었으면’ 했던 한 노동자의 바람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며 노동자 서민 정당의 국회활동이 시작되었다.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 이후 최초로 발의한 법이 비정규직 차별철페 법안이었다. 정부는 비정규직 양산법을 강행처리하려 했고 10명의 의원들은 몸으로 막았다. 그때마다 국회 담장 안팎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규가 함께 있었다. 국감시기마다,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 여론화 시키고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임을 알려왔다. 쌀쌀한 가을이 된 지금 우리는 다시 비정규직법 처리를 앞두고 노동자의 기본권리를 위해 또 한번의 역사적인 싸움을 앞두고 있다.

16일 전국비정규직연대회의가 공식 출범했다. 820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3권을 위해 연대회의는 싸울 것이다. 15년 전 노동자의 구심인 전노협을 결성했을 때의 그 다짐이 또다시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투쟁으로 다시 태어났다. “노동자 해방의 그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을 눈물로 불렀던 90년에 이어 우리는 오늘 또다시 한 파견노동자의 노래를 눈물로 부른다. ‘나는야 두해살이 풀’ ‘비정규 노동자들 피를 토한다. 우리는 일하고 싶다.”(KBS 비정규직 노동자 주봉희)

당원은 어떤 비리와 야합도 허락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의 과소대표된 10석이 부당한 대법원 판결로 9석이 되었지만 이제 다시 그 이상의 목표를 가지고 울산북구와 대구에서 부천에서 광주에서 또 당원들이 뛰고 있다. 다른 곳도 아닌 울산 북구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개발독재의 경제성장을 이야기하며 울산시민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노동자 서민의 정치세력화의 산물인 민주노동당이 다른 당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8만당원의 큰 그릇이 있다는 점이다. 그 안에는 노동운동의 역사와 사회운동의 역사가 담겨 있다. 힘겨운 여성과 비정규직과 자영업자의 한숨과 염원이 담겨있다. 당원의 소중한 땀이 배어 있는 당비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비리나, 야합, 거래도 당원들과 지지자들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동자 평균임금으로 공직활동을 하며 사회운동과 원내 정치를 결합한 세상을 바꾸겠다는 근본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의 역사적 의미와 가능성은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10월26일 민주노동당은 다르다는 점을 다시 한번 떨림으로 이야기할 것을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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