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늘(13일) 55년만에 남북정상이 만난다.
서울 중심가에 길게 나붙은 역사적 남북정상회담 축하 플래카드를 뒤로하고 명동성당은 여전히 '농성 중'이었다.

따가운 퇴약볕이 내리쬐는 명동성당 앞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유인물을 읽으며 손을 추켜 들고 '투쟁가'를 부르는 사람들. 이들에겐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겨져 있는 듯했다.

많은 사람들이 저기 커다란 빌딩 속에서 에어컨 바람을 쐐며 자신의 생업에 전념하고 있는 시간, 이들은 서로의 땀 냄새를 맡으며 저마다 내건 목표를 구호로 외치고 있었다.

국가보안법 철폐와 정치수배전면해제, 양민학살진상규명, 올바른 협동조합 개혁, 노동시간 단축 등. 11일까지 13개 단체가 이 곳에 있었지만 12일 '철도노조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한총련이적규정 철회를 위한 농성단','청년연석회의 명동성당 농성단'은 이곳에서 철수했다.

"남북정상회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명동성당에서 천막 농성을 하고 있는 이들은 과연 남북 정상회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남북 정상회담이 하루 전인 12일 명동성당에서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명동성당에서 제일 먼저 만난 이동진(25, 99년 한총련 조국통일위원장)씨는 5월 27일 '국가보안법 철폐 결의대회' 때 삭발을 했다며 모자를 눌러 쓰고 있었다.
2년째 수배생활을 하고 있는 이씨는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어쨌든 남북 두 정상이 만난다는 것은 축하할 일 아니냐"고 입을 열었다.

"명동성당에서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냐"는 질문에 그는 밖에서 도망다닐 때 보다 훨씬 낫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어려움이 있다면 성당에서 나가라고 소리 하는 거였는데 많은 팀들이 한꺼번에 들어와서 이제는 그런 소리도 덜 듣게 된 것 같네요."

여러팀들이 함께 농성을 하는 것이 은연 중에 힘이 된다는 이씨는 표정도 말씨도 여유있어 보였다.

이동진씨가 묶고 있는 천막 옆에 아직 천막을 치지 못하고 있는 '미군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남측본부' 농성단의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남측본부' 농성단에 참여하고 있는 전국연합 자주통일부장 김현우(32)씨는 "한총련이 철수한 자리에 내일 천막을 치고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상회담회담을 통해 통일로 가는 물꼬를 텄다고 생각해요. 정상회담을 통해 자연스럽게 국가보안법 문제가 해결되길 기대합니다."
김씨는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여전히 발목을 잡는 한나라당이나 조선일보의 태도에는 "역겹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비전향 장기수 문제만은 꼭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김현우씨 옆에 앉은 진재영(29)씨. 94년 전남대 김주석 조문 파동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맡았던 그는 7년전 그 사건으로 여전히 수배생활을 하고 있다.

기대했던 김대중 대통령에게 수배해제라는 동지들의 외침이 '답 없는 메아리'가 되고 있다며 그는 허탈해 했다. 그도 어서 빨리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밥상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함께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김대통령이 북한에 발을 딛는 순간 국가보안법은 사문화 되는 것 아닙니까. 남북 정상회담이 국가보안법 철폐로 연결되고 구속된 양심수를 억압의 굴레서 풀어주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남북 양국 정상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역사적인 순간에 한 청년이 김일성 주석의 조문 파동으로 여전히 수배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대통령이 북에 발을 딛는 순간 진재영씨의 오랫 수배생활도 함께 종지부를 찍을 수 있길... 그가 바라는 데로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어서 빨리 오길...

명동성단 농성단 중에는 민주노총 파업관련 두 단체가 포함돼 있다. 축협노조와 보건의료노조 농성단이 그 주인공들이다.

농성 중인 6명 모두가 수배자 신세인 이들의 숙소에는 한총련 농성단이 써 놓고 간 '축협 노동자, 형님들 ! 꼭 승리 하십시오 !'라고 적힌 대자보 용지가 붙어 있었다.

한달 보름 동안 수배생활을 하고 있는 축협노조 김의열(40) 위원장은 "올바른 협동조합 개혁문제는 농민단체의 자주성을 지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며 "농축협 통합은 농구협외와 축구협회가 통합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라고 꼬집었다.

그는 오래된 수배 생활 때문인지 무좀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무좀 고친다고 식초에 발을 담그는 치료법을 쓰고 있는데 생각처럼 치료가 쉽지 않다고 했다.

"농축협 통합문제 반대싸움은 오래 갈 싸움입니다. 긴 호흡이 필요한 일이죠" 오랜 수배생활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그에게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물었다.

"남북정상회담이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해요. 일원화된 창구가 아니라 민간차원의 교류가 확대됐으면 좋겠네요"

축협노조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보건의료노조 간부들은 조합원들이 사온 수박을 먹고 있었다. 그들에게 남북정상회담은 어쩌면 관심 밖에 일인지도 모르겠다. 검찰의 체포영장 발부로 농성장에 꼬박 갇혀 있는 그들에게 무엇보도 필요한 건 '검찰의 체포영장 발부 철회'일 테니까.

"앞으로 민간통일운동도 인정해야 합니다"


농성단에 합류한 이종린(79)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직무대행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남북정상회담의 문제점에 대해 꼼꼼하게 지적했다.

"우선 DJ는 국가보안법 폐지의 의지를 밝혀야 합니다. DJ가 국가보안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이는 분명한 직무유기입니다. 50년만의 벼르고 벼른 만남입니다. 그러나 남쪽은 여전히 주권행사를 하지 못하고 있어요. 미군이 우선적으로 철수해야 합니다"

이종린씨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반드시 군축이 논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남쪽 정부에서는 민간통일운동에 대해서도 순수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어느 단체는 친북단체로 규정하고, 어느 단체는 친남 단체로 규정하고... 이건 말이 되지 않는 구분입니다"

여든이 다된 노인은 마지막 통일의 방식은 '연방제'가 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꼭' 그렇게 돼야 한다고 신념에 차서 말했다. 청년시기를 독립운동으로 감옥에서 보냈고, 48년 이후 미국의 범죄를 똑똑히 지켜봤다는 그는 91년부터 범민련 준비위원으로 참여해 지금까지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찾은 농성장 '양민학살 진상규명,SOFA 전면개정 매향리사격장폐쇄 명동성당 농성투쟁단'에서 만난 '일사랑 노동청년회' 소속 강유겸(29)씨와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의 백요순(33)씨는 매향리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했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과 북이 단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민족의 이름으로 대단결 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매향리 문제도 적극적으로 풀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민족 모순의 축소판인 매향리를 향해 강유겸씨와 백요순씨는 "폭격이 재개 될 때 온몸으로 막아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지친 몸을 누이고 낮잠을 청하는 사람들,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는 사람들,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한편에서는 라면을 끓이고 있는 사람들.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명동농성단의 하루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7년째 수배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전 전남대 총학생회장 진재영(왼쪽)씨와 전국연합 자주통일부장 김현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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