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생일이 두렵다. 인천지하철 미화원인 심순자씨는 11월18일이면 만65세가 된다. 정년이다.

‘할머니’ 순자씨는 인천지하철 계산역사에서 하루 9시간 동안 계단, 대합실, 승강장, 사무실, 화장실 등을 오르내리며 쓸고 닦는다. 화장실은 1시간에 한번씩이다. 젊은 사람도 반나절 일하다 걸레를 던지고 돌아가기 일쑤인 일. 그러나 순자씨는 일이 힘들다고 입도 벙긋 하지 않는다. 정년만 연장된다면, 누구나 진저리 치는 화장실 청소만 전담을 한다 해도 좋다.

만65세가 넘었다고 밥 안 먹고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순자씨에게는 억대에 가까운 빚이 있다.


경찰의 딸, 교사의 아내, 장한 엄마

1940년생인 순자씨는 강원도 원주가 고향이다. 6남매 중 맏이로, 아버지는 기마경찰대였다. 말을 탄 모습이 멋져 보여서 소녀 시절 순자씨는 경찰이나 군인이 되고 싶어 했다. 원주여상을 졸업하고 장래 희망과는 무관하게 집안일을 돕다 스물두살 ‘꽃띠’에 중매로 결혼했다.

심씨와 여덟살 차이가 나는 남편은 1932년생으로 경북 예천 출신이다. 남편 역시 6남매 중 맏이다. 남편은 안동사범학교와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했다. 원주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잠시 있다, 1961년부터 1997년 퇴직할 때까지 서울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61년 남편과 함께 서울로 온 심씨는 아들을 둘 낳았다. 65년생과 70년생으로 모두 4년제 대학교까지 마쳤고 둘 다 출가를 했다. 장남은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 작은 아들은 보험회사를 다니고 있다. 아들들은 각각 1남1녀씩을 두고 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의 살림. 자식 교육에 정성을 쏟아 자식들을 잘 키워낸 거의 완벽한 한국의 중산층 집안이다. 여기에다 순자씨는 아들을 대한민국 엄마들이 부러워하는 서울대에 보낸 ‘장한’ 엄마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게 척척 맞아 떨어졌던 것은 아니다. 남편은 산에 미쳤다. 월급은 봉투째 고스란히 갖다 주었지만 비싼 등산 장비들을 산다고 다시 돈을 들고 나갔다. 1976년 안나푸르나 등반을 하겠다며 사표까지 낸 남편이다. 3년 뒤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는 했다. 생업까지 팽개치고 죽을 줄 알면서 산에 오르는 사람에게 돈 얘기를 해 봤자 소용이 없다.

심씨는 빠듯한 살림을 어떻게 한번 펴 보기 위해 장사를 한다고 나섰다가 집만 한 채 날렸다. 1980년 사채를 내 돈암동에서 옷 가게를 열었지만, 가게는 잘 되지 않았다. 당시 이자는 무려 5부. 이자가 늘어가는 와중에 심씨는 가까이 지내던 동네 사람에게 빌려줬던 돈까지 떼이게 되었다. 이때 날린 돈이 2천만원.

당시 강남 반포의 32평형 아파트값이 2천만원이 채 안 될 때다. 프로야구 창단 원년 최고 몸값을 받았던 박철순의 연봉이 2,400만원이었으니 2천만원이면 아주 큰 돈이었다. 순자씨의 남편은 집까지 날려 먹은 간 큰 ‘여사님’과 더이상 살 수 없다며 이혼 얘기까지 꺼냈을 정도였다. 아이들 덕에 소동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한번 크게 망했지만 월급으로 생활하는 사람들 아닌가. 다시 허리띠를 졸라맸다. 장한 큰 아들은 장학금 받고 대학을 다녔고 크게 돈 쓸 일이 터지지 않아 점차 회복이 되어갔다. 1993년 인천 연수동에 34평 아파트를 장만하게 되었다. 1997년 남편은 퇴직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퇴직금과 연금, 아이들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 노후를 아름답게 보내는 일만 남았다.

'대형사고'…할머니 순자씨 노동조합원이 되다

순자씨의 남편이 ‘대형사고’를 일으켰다. ‘교사와 공무원의 퇴직금은 먼저 본 놈이 임자’라는 말이 있다. 2001년과 2002년, 두 해 동안 순자씨의 남편은 퇴직금과 목돈으로 받은 연금을 몽땅 날려 버렸다. 아파트까지 경매에 넘어가고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순자씨의 남편은 뭔가에 홀린 듯 은행에서 돈을 빼내 투자를 하고 집을 담보로 잡혀 빚을 내고, 아들들을 보증인으로 세워 또 빚을 얻었다. 모든 게 끝났을 때 남은 것은 7천만원의 빚이었다. 이 엄청난 일을 벌여놓고도 순자씨의 남편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누가 투자처를 소개를 했고 어떻게 투자를 했고 정확히 얼마를 손해를 봤는지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아들들이 물어도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순자씨는 남편을 꼬드긴 그 화상들을 찾아내 요정을 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남편이 요지부동인데 어떻게 할 수 있나. 닦달을 하려 했지만 지난날 자신이 저지른 일이 떠올랐다. 어쨌거나 이보다 더 급한 일은 다달이 갚아야 할 이자와 먹고 사는 일이었다.

아들이 은행 대출로 마련해 준 500만원으로 전세보증금을 걸고 월세 35만원을 내야 하는 가게 딸린 방을 구했다. 부부가 식당을 해서 월세와 이자를 낼 요량이었다. 식당은 개점휴업 상태가 계속 됐다. 엎친 데 덮치고 불행은 꼬리를 문다고, 순자씨의 아들들도 ‘사고’를 쳤다. 2000년 코스닥 붐을 타 주식 투자를 하다 크게 손해를 보았고, 그 전에 아버지가 터뜨린 사고 뒷처리와 연대보증까지 돼 있던 터라 더이상 도울 형편이 되지 않았다. 순자씨가 나서야 했다.

2003년 2월 순자씨는 집 근처 백화점에 가서 청소하는 분을 붙잡고 다짜고짜 물었다. “당신처럼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처음에는 멀뚱하게 쳐다보던 그분은 친절하게 자신이 속한 용역(파견)업체의 ‘상무님’을 만나 보라고 했다. 사무실로 찾아갔다.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자리가 없다는 답에 순자씨는 전화번호를 남겨놓았다. 자리가 나면 꼭 불러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두달 뒤 심씨에게 연락이 왔다. 그때 지하철 미화원의 임금은 여성인 경우 54만원 정도. 돈은 되지 않고 일은 힘드니 웬만큼 딱한 처지가 아니면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사람 구하기 급했던 업체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을 찾았고 순자씨에게 차례가 온 것이다.

사정을 모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돈이 급했던 순자씨는 일을 하게 돼 숨통이 틔였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자 서너달은 눈물로 지새야 했다. 우선 걸레질이 서툴렀다. 대걸레를 밀고 당겨서 바닥을 닦는 데 요령이 필요하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일을 제대로 못하는 심씨를 두고 동료들은 면박을 주기 일쑤였다. 순자씨 사정을 모르기도 했겠지만,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또한 없는 것이다.

평생 해 보지 않은 육체노동의 고됨에, 행여 누군가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하는 두려움에, 신세 한탄에, 비관까지 합쳐져 죽고 싶은 마음이 골백번도 더 들었다. “청소를 하는데 지하철이 오잖아. 진짜 뛰어들고 싶더라구. 아휴 그런데 죽는 것도 팔자야.” 순자씨는 죽는 것도 팔자, 일하는 것도 팔자라고 말하고 싶었을 터이지만, 세상만사 팔자소관에 맡기면 일은 못한다. 순자씨는 강한 여자였다.


난 안 변했는데 세상이 변했나…

순자씨 남편, 박 선생님(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은 아내가 일을 나간 뒤 반지하방에 앉아 있으면 억장이 무너질 뿐이다. 박 선생님은 경북 예천의 양반집 자손이다. 천석꾼 소리를 들을 만큼 재산도 넉넉했다. 아버지는 1949년 농지개혁 때 그 많던 논밭을 20마지기만 남기고 다 내놓았다.

예전만 못하게 된 집안 형편이라 박 선생님은 경북 안동사범학교 본과를 다녔다. 1950년 되던 해 학도병으로 나갔다가 포항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와 이듬해 학교를 졸업했다. 모교인 예천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53년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게 기적만 같았다. 남은 생을 하느님을 위해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박 선생님의 아버지는 집안에 남은 있는 논을 다 팔아야 했다. 하느님의 종이 되는 것도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어서, 1961년 학교를 마친 박 선생님은 강원도 원주에 있는 한 사립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런데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았다.

1961년 국가최고재건회의는 행정요원들을 모집했다. 여기에 응시하려 박 선생님은 서울로 왔다. 친구들은 ‘군인들이 있는 곳에 가지 말라’고 충고했다. 이러던 터에 서울시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모집했다. 이리하여 서울에서 교사 생활이 시작됐다.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야 박 선생님의 ‘주특기’. 박 선생님의 교육관은 ‘인격과 학문’이다.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했다. 학생들에게 예의와 명예를 가르쳤고, 다른 반 학생들보다 한 시간 빨리 등교하도록 해 영어와 한문을 익히게 했다. 맹세코 학부모들에게 양말과 손수건 이상 받은 적이 없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대학시절 우연히 접했던 암벽타기의 매력에 빠져들게 됐다. 인왕산을 오르내리면서 산에 미쳐갔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했던가. 1976년, 산친구들과 산악회를 만들어 희말라야 등반에 나섰다. 안나푸르나 1봉 정상 코스에 도전키로 했다. 등반대장으로 역할을 다하기 위해 학교까지 그만두었다. 해외등반은 6개월 정도의 준비가 필요했다. 산 말고는 보이는 게 없었다. 정상 정복은 하지 못했지만 아쉬움은 없었다.

산에서 내려와 사립학교 교사 자리를 알아보던 중 1979년 초등교사 모집시험이 있었다. 경력교사도 해당이 됐다. 시험이라면. 다시 학교로 돌아갔고, ‘어린이들을 위해 이 한 몸 바치리’ 다짐을 하고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공부 체질인 박 선생님은 박사 공부까지 할 욕심이 생겨 석사 논문에 학우들보다 더많이 공을 들였다. 이때 큰아들은 서울대 대학원에 재학 중. 부자는 부자 박사 부자 교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80년대말, 박 선생님은 세상이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느꼈다. 대학생들은 연일 시위를 하고, 전교조가 등장했다.

“첫째 전교조는 반미의식에서 출발을 해요. 이거 문제 있습니다. 미국은 동란 때 우리를 위해 희생했지 않습니까. 물론 미국이 강대국이라고 해서 우리를 무시하는 것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은혜는 은혜대로 알고 주권은 주권대로 지켜야 합니다. 둘째 전교조는 학교의 인화를 해칩니다. 교장과 교감은 상사이자 어른인데 전교조는 권위를 무시합니다. 학교에서 교장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점은 대학 총장처럼 보직제를 통해 해결해야 된다고 봅니다. 전교조는 깊이가 없어요.”

그런데 교장보직제는 전교조의 주장이다. 박 선생님도 전교조의 주장이 다 틀렸다는 건 아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박 선생님은 학교에서 교장과 전교조 교사들 간 중재 역할도 많이 했다. 어쨌든 박 선생님은 80년대 민주화 흐름의 물결을 타지 않고 자신의 전통적인 교육관으로 학생들을 더 열심히 가르쳐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세상은 빨리 변한다. 진보와 보수를 논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세상은 무형의 가치를 제쳐놓고 돈만 좇게 되었다. 박 선생님은 한탄하기도 했지만 내심 두려웠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야 할 아들들에게 물려줄 게 없었다. 아들들과 손자 손녀들에게 뭔가 줄 수 있다면…. 돈에 생각이 미친 순간, 그 순간이 사기에 엮이게 된 순간이었다. 박 선생님은 아직 그 누구에게도 얘기를 하지 못했다. 누구에게 어떻게 전 재산을 다 뺏기게 되었는지를. 돈도 돈이지만 무너진 자존심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으랴.

 가계부
지출수입
115,000 (2,400만원 은행대출금 이자)
98,000 (1,000만원 카드대출금 이자)
92,000 (700만원 카드대출금 이자)
200,000 (1,000만원 사채 이자)
27,700 (원호청 1,500만원 대출금 7년거치 상환금)
29,990 (전기요금)
16,000 (정수기)
103,078 (유선, 휴대폰 전화 요금)
9,620 (도시가스요금)
계=940,688
831,310 (심순자씨 월급)
60,000 (원호대상자 7급 연금)
12,000 (박 선생님 경노우대 교통비)
계=903,310
*적자다. 안 먹고 안 쓴다. 보너스가 있는 달 생기는 돈으로 공과금과 생활비를 한다. 부부가 진 빚은 전세보증금을 걸기 위해 빌린 돈 1,500만원까지 합쳐 8,500만원이다. 일부 대출금 이자는 큰 아들 내외가 갚아 나가고 있다.

'보석'과 '이빨 빠진 호랑이'

경찰의 딸, 교사의 아내였던 순자씨가 노동자가 됐다. 그것도 환갑이 넘어 비정규직으로. 순자씨는 일이 고되고 월급이 적다고 탓할 처지가 아니었다. 문제는 일을 계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일에 익숙해진 순자씨는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사정을 배워갔다. 인천지하철 역사 청소를 하는 노동자는 모두 120여명. 인천지하철은 구간을 나눠 3~5개 업체를 선정해 9개월 단위로 계약을 하고 있었다. 9개월로 계약을 하고 3개월 연장을 해서 1년 단위로 업체가 바뀔 수 있었다. 업체가 바뀌게 되어도 고용이 승계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생긴다.

나이가 많은 순자씨는 특히 불안했다. 2002년 겨울, 고용 문제로 술렁이고 있을 무렵 노조가 나타났다. 민주노총 여성연맹과 평등연대가 인천지하철 청소용역노동자들을 조직화하기 위해 나섰던 것. 순자씨가 속해 있던 업체에는 평등연대가 먼저 들어왔다. 동료들은 가입했고 심씨도 난생 처음 조합원이 되었다. “노동자에게 노조라는 울타리가 필요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얼마 있지 않아 2003년 1월 민주노총 여성연맹에서 찾아와 조합 가입을 권유했다. 동료들은 다수가 여성연맹을 선택했다. 일부는 평등노조에 남았다. 순자씨는 노조가 갈리는 게 걱정이기는 했지만 다수 조합원이 선택한 여성연맹 조합원이 됐다.

순자씨는 이전까지만 해도 노조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무엇에 대해 비판하는 게 싫었다. TV에서 노조의 파업 장면이 나오면 ‘뭘 저리 비판하고 요구하나’ 싶었다. 또 교사였던 심씨의 남편은 전교조만큼 다른 노조들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기업하는 사람들 나쁜 사람 많겠지만, 우선 회사가 돌아가야 될 것 아닙니까?”

이렇게 노조 비판적인 분위기 속에서 평생을 산 순자씨는 육십이 넘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면서 자신의 선택으로 노조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노조는 업체가 바뀔 때 고용 승계가 되도록 단결하자고 했다. 조합원이 되어 손해 본 것도 없다. 조합비 다달이 5천원씩 내고 1년에 한번씩 최저임금투쟁 해서 임금도 3년 동안 20만원 정도 올랐다. 탈의실 겸 휴식공간에 전기 마루도 깔렸다. 노조가 요구했기 때문이다.

순자씨는 본격적으로 노조 간부로 활동할 생각도 갖고 있다. 이 방 저 방 둘러보아도 서방뿐이라더니 아무리 둘러보아도 기댈 데는 노조뿐인 것이다. 바로 정년 문제 때문이다. “자기가 힘이 부쳐 일을 못하면 스스로 관두는 것이지 일할 수 있는데도 정년 때문에 그만두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순자씨는 절박하다. 이 문제를 들고 지역구 국회의원인 이윤성 의원을 찾아갈까도 생각해 봤다. 남편은 “웃기지 좀 말라”고 했다.

순자씨가 노조에 의논을 했더니 딱한 사정을 듣고는 “활동을 열심히 하시니까 노조에서 꼭 필요한 분이라고 회사에 얘기를 해 보면 어떻게 방도가 생기지 않겠냐고 너무 걱정 마시라”고 역성을 들어줬다. 그래서 순자씨는 노조 감투까지 쓸 예정이다.

노조간부는 회의와 집회에 꼬박꼬박 참석해야 되고 앞장서야 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어느 정도는 각오도 되어 있다. 정년 연장을 위해 못할 일이 없다. 이렇게 되면 순자씨의 남편, 박 선생님과는 의견 충돌이 일게 된다. 순자씨가 올해 최저임금투쟁 때문에 국회 앞에서 밤을 새고 온다고 하자 박 선생님은 “이 여자가 미쳤냐”고 고개를 흔들었다고.

그렇지만 박 선생님은 아내의 활동에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처지가 못 된다. 박 선생님은 일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칠십이 넘은 데다 황반변성이라는 병으로 시력까지 약해지고 있다. 2002년부터는 아내가 벌어온 돈으로 생활비를 하고 은행 이자를 갚고 있다.
박 선생님은 고백했다. “내가 젊어서는 저 사람이 귀한 보석인 줄 모르고…” 젊음은 알지 못하고 늙음은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박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순자씨가 호호 웃으며 한마디 한다. “노조 반대하면 뭐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노조냐 국가냐

순자씨의 히든카드가 노조라면 박 선생님의 히든카드는 국가유공자다. 6·25 '참전용사'였다는 박 선생님은 생활이 어려워지자 2000년 원호대상자로 신청을 했다. 한달에 6만원씩 나오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전세보증금 중 1,500만원도 원호청에서 대출을 받았다. 아내의 정년 문제도 국가유공자 가족으로서 혜택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

노동조합이냐? 국가냐? 이들 부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곳이 어디일지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다. 오는 11월18일 순자씨의 만65세 생일이 지나면 밝혀질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순자씨는 이번에도 스스로 나섰다. 선거 때면 활용되는 일종의 '구전' 홍보전에 열심이다. 지하철 역사 안에서 말을 붙일 만한 사람만 보이면, 나이 많은 사람만 보이면, 나이 든 사람들이 지하철 청소는 더 잘한다고 열심히 말을 건넨다. <매일노동뉴스> 취재에도 그래서 응했다. 그야말로 씩씩한 왕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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