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시 소홀읍 송우리로 가기 위해 길을 물었다.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지만, 그의 한국말은 어색했다. 중국교포였다.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산다는 가구단지로 가는 버스 안. 할아버지에게 길을 물었다. 답이 없다. 무심함을 넘어, 낯선 이들의 질문이 귀찮다는 듯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포천시의 인구는 15만명. 이 가운데 이주노동자는 이른바 ‘불법체류자’까지 포함해 1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노동력이 없는 나이든 주인들이 위협을 느낄 법도 하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알람 물라씨(30)와 서울이 고향인 권귀순씨(30)는 지난해 결혼, 송우리의 한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이건 젊은 한국 남자들도 긴장할 만한 일이다.


한국에서 잃은 돈…한국에서 벌어야지

알람씨는 한국말을 잘 한다. 웬만한 한글은 읽고 쓴다. 한국에 온 지는 올해로 9년째 접어든다. 알람씨는 방글라데시 수도인 다까에서 태어났다. 3남3녀 가운데 장남이다. 아버지는 봉제회사를 운영하시고 어머니는 집에서 살림을 하신다. “옛날에는 진짜 잘 살았는데 사업이 잘 되지 않아 지금은 그렇게 잘 사는 편은 아니다”면서, “집이 2채, 가게가 3개니까 그래도 괜찮은 편”이라며 어깨를 으쓱하는 알람씨.

어린 시절,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하고 싶은 것 다 했다”는 알람씨의 어머니가 강조하신 것은 '공부'. 어머니들은 어디서나 다 똑같으신가보다. 학교 마치면 학원 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려 축구를 했다. 방글라데시는 '5(초)-5(중·고)-2(전문대)-4(대학교)학제'로 알람씨는 중·고등학교는 명문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재수를 했다. 이때까지 장래 희망은 군인. 그러나 고급(?)장교가 되는 문턱은 높았다.

알람씨는 다까에 있는 ㅇㅇ과학전문대학에 입학했다. 알람씨 말에 따르자면, 다까대학만큼 명문은 아니지만 괜찮은 학교였다. “공부도 하기 싫고 졸업을 해도 취직이 되기 않기” 때문에 1학년을 다니다 그만두었다. 이것도 어쩌면 한국과 그리 똑같은지.

알람씨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봉제회사와 옷가게에서 일을 도왔다. 그러다 1996년 한국에서 옷을 사다 방글라데시에서 팔면 돈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사업자금 3만달러를 들고 한국에 왔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분께서 투자를 해주셨다. 그러나 사업은 실패였다. 한국 옷은 그리 잘 먹히지 않았고, 결국 원금의 절반 가량 손해를 봤다. 알람씨의 아버지는 더이상 도와줄 수 없다고 하셨다. 일거리는 없고, 먹고 놀 수도 없고. 알람씨는 한국에서 날린 돈, 한국에서 벌어보자는 요량으로 한국에 다시 왔다.

불법체류가 시작됐다. 먼저 구로공단 근처에서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던 아는 형님을 찾았다. 형님 가게에서 일을 도우며, 1년 가량 살았다. 이 가게를 근거지로 삼고, 구로공단이나 인천에 있는 작은 공장에서 한두달씩 일을 하기도 했다. 알람씨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거야. 한국말 몰라도 저 사람이 나한테 욕하는지 다 알아. 자꾸 인상 쓰면서 XXX 하는데 XXX이 욕이라는 거 알게 돼. 그래서 나도 XXX 했어.” 한 성질 할 것 같은 알람씨는 임금을 못 받은 적이 없다. 한달 일했는데 임금을 주지 않자 더이상 일을 하지 않고 계속 찾아가서 큰 소리로 돈을 달라고 소리쳤다. 알람씨의 표현에 따르자면, “사장을 개망신시켰다.” 10만원씩, 20만원씩, 받아내 결국 100만원을 다 받았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좋지 않은 한국말부터 먼저 익숙해지게 된 알람씨는 1998년 포천 송우리로 왔다. 가죽공장에서 한달 반, 섬유공장에서 반년, 그리고는 지금까지 쭉 가구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합판 위에 플라스틱을 붙이는 작업을 한다.

알람씨는 이 일을 하다 손을 다쳤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손이 로울러에 말렸다. 오른쪽 엄지손가락이 죽은 살처럼 까맣게 되고, 손톱이 없어졌다. 11개월 동안 기본급이 나왔고, 보상금으로 400만원을 받았다. 손까지 다쳐가며 몇년 한 일이라 일 못한다고 욕을 듣는 경우는 없다. 하루 일당 4만8천원을 받는다. 토요일도 쉬는 경우가 있어 한달 일하면 110만원 가량 된다. 4대 보험은 되지 않고, 보너스도 없다.

남자라면 지긋지긋…그런데 낯설지 않아

권귀순씨의 고향은 경북 안동으로 3남1녀 가운데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귀순씨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셨다. 논밭이 있었지만 아버지가 술과 노름을 좋아하셔서 다 없어졌다. 큰 오빠가 서울에서 직장을 구한 뒤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왔고, 이때 귀순씨는 중학 3학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 갈 형편이 되지 않았고 굳이 가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락실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다 봉제공장에 취직해 5년 일했다. 귀순씨는 옷 만드는 일이 좋았다. 봉제공장에 다니면서 양재학원에 다니고 한복 만드는 법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벌고 또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재미를 붙이면서 이제 한시름 덜었나 하던 즈음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귀순씨는 스물셋이었다. 언제까지 품에 기댈 수 있을 줄 알았던 엄마였다.

1999년 의정부에 있는 무역회사의 샘플실로 옮겨왔다. 여기에서 견본품이 될 옷을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었다. 양재학원에 다닌 덕분이었다. 일당으로 5만원을 받았고, 한달 월급은 130만원이었다. 여기에서 귀순씨는 이주노동자라는 존재를 알게 됐다. 회사 동료들은 방글라데시에서 온 노동자에게 욕을 하고 무시했다. 장난이 아니었다. 귀순씨는 그러면 안 된다는 심정에 이주노동자들의 편을 들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귀순씨는 회사 동료였던 이주노동자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임금이 체불돼 곤란을 겪고 있던 귀순씨의 처지를 어떻게 알고 선뜻 돈을 빌려주는 것 아닌가. 감동 받은 귀순씨. 방글라데시 관련한 인터넷카페에 가입을 하고, 송우리문화센터에서 방글라데시말도 배웠다. 여기에서 알람씨와 첫 대면을 하게 됐다.

일이 되려고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송우리가 좁았던 것일까. 길거리에서 알람씨와 부딪히는 일이 잦아졌다. 그 '많은' 남자들 가운데 알람씨가 귀순씨의 눈에 자꾸 들어 왔다. 낯설지가 않은 게 마치 전생에 잘 알았던 사람 같았다나. 귀순씨는 “운명 같았다”고 했다.

어느날은 반갑게 인사한 뒤 몇마디 얘기도 나누고, 어느날은 바빠서 아는 척만 하고 지나치고. 어느날은 이 사람이 왜 안 보이지 하고 주위를 둘러보기도 하고. 청춘남녀들이었다. 한번 눈에 밟히기 시작하면 더 알고 싶어진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했다. 좋아하는 노래가 같고 보고 싶은 영화가 같았다. 놀러가고 싶은 곳도 같았다. 잘 맞고 잘 통했다.

무뚝뚝한 한국 남자보다 알람씨는 한국말로 이런저런 얘기를 더 잘해줬다. 술과 노름을 좋아했던 아버지…. 귀순씨는 남자와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그리는 것을 잊고 있었다. ‘다른 나라 남자라면 아버지와 다를지도 몰라.’

한국남자 된 알람씨…'속도위반' 하다

사랑은 '공식적'이고 싶어한다. 굳이 경제적인 이유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랑은 배타적이다. 그러나 귀순씨는 그이를 오빠들에게 소개시킬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차라리 결혼을 포기하려 했다. 솔직히 말해 이런 것이다. 선진국 남자도 아니고 후진국 남자 아닌가.

주저하던 귀순씨의 손을 알람씨가 이끌었다. 귀순씨 오빠를 만나러 갔다. “저는 한국말을 잘 하고 글도 쓸 줄 압니다. 한국 사람이나 똑 같습니다. 결혼하고 싶습니다.” 오빠는 알람씨가 이국인이라는 것보다, 혹시 ‘얼마 살다 헤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를 더 걱정했다. 그런데 귀순씨 뱃속에는 아기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는 알람씨는 한국 남자와 정말 똑같다. 아니 한국에서 배웠다고 해야 되나. 방글라데시에서는 연애결혼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니 속도위반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 고개를 넘자 다른 고개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알람씨 집에서 반대를 했다. 방글라데시 여자가 아니라 다른 나라 여자라는 거였다. 혼인신고를 하려면 서류가 필요한데 집에서 보내주지 않았다. 알람씨는 연일 국제전화를 해, "그 여자가 없으면 안 된다”고 사정했다. 알람씨 누나들이 어머니 아버지를 설득해 방글라데시에서 서류가 왔다. 2004년 12월23일 혼인신고를 했다. 한국 여자와 결혼한 알람씨는 1년 동거 비자를 받게 됐다. 1년 뒤 동거 비자를 한 번 더 발급받으면 한국국적을 취득할 수 있게 된다.

알람씨는 결혼으로 합법적인 신분을 취득한 점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불법체류였지만 한번도 단속에 걸린 적이 없었던 데다, 돈을 버는데 불법인지 합법인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장님들이 합법체류자라고 해서 돈 많이 안 줘. 똑 같아, 똑 같아!” 불법체류라는 약점 때문에 임금을 못 받는 경우가 많다던데. “나는 한번도 일하고 돈 못 받은 적 없어.” 생활력도 한국남자다.

마침 일요일이라 놀러 와 있던 알람씨의 친구 꼬빨씨(30)가 인터뷰를 지켜보다 “부럽다”며 싱긋이 웃는다. 꼬빨씨는 한국에 온 지 6년째다. 근처 원단공장에서 일한다. 저녁7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30분까지 일하고 한 달 145만원을 받는다. '사장님'이 얻어놓은 방에서 방글라데시 사람 3명과 함께 산다. 방글라데시로 한달 100만원을 보낸다. 그동안 5천만원을 보낸 셈이다. 단속 때문에 되도록 외출을 하지 않는데 알람씨의 동생이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해서 고향소식도 들을 겸 놀러왔다.

알람씨의 동생 샤알람씨(26)는 시댁 식구들을 대표해서 신접살림을 차린 형님집을 방문했다. 열흘 정도 묵었다 돌아갈 예정이다.

9월 가계부
8월 지출8월 수입
340,000(아기 파티. 방글라데시에서도 우리나라 백일이나 돌처럼 아기가 태어나면 친구와 친척을 초청해 잔치를 연다.)
200,000 (귀순씨 오빠네에게 빌린 돈 5백만원을 갚기 위해 매달 2십만원씩)
78,000 (외식. 알람씨 동생이 방문해 외식을 두번 했다.)
112,800 (시장. 닭, 고등어, 라면 등 주로 먹을 것)
6,500 (롯데리아)
18,500 (오빠네 집들이 선물)
5,000 (자동차 타이어 펑크)
25,000 (알람씨 동생 용돈)
28,000 (알람씨 동생과 동대문시장에서 벨트 2개, 아기옷과 양말을 샀다.)
10,000 (동대문까지 차비)
10,000 (알람씨 용돈)
10,000 (남동생 용돈)
12,000 (비오비타)
18,000 (마트에서 생필품)
10,000 (목욕비)
31,600 (관리비)
26,000 (건강보험)
10,310 (가스요금)
65,440 (전화요금)
53,000 (휴대폰 요금)
14,450 (전기요금)
60,000 (기름값 )

계=1,144,600
1,400,000

'운명적' 부부도 가끔씩은 돈 때문에 싸운다?

2005년 8월12일, 아기가 태어났다. 남자아이다. 이름은 아에스 물라. 한국 이름은 권태우다. 귀순씨의 오빠가 한국이름을 지어 주었다. 부부는 이 점을 강조했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알람씨와 귀순씨는 소꿉장난을 정리해야 했다. 10평도 안 되는 원룸에서 아기를 키울 수는 없었다. 근처에 살 만한 전세아파트가 나왔다. 전세보증금 1,700만원. 알람씨가 갖고 있던 돈 500만원과 귀순씨가 갖고 있던 500만에, 귀순씨의 오빠에게 500만원을 빌렸다. 아기 때문에 이사를 해야 되겠다고 하자 오빠는 선뜻 빌려주었다. 나머지는 알람씨가 방글라데시에서 온 친구들에게 빌렸다. 아파트는 20평으로 큰방에는 침대, 거실에는 텔레비전, 부엌에는 큰 냉장고. 두 사람이 전에 하나둘씩 마련 해놓은 것을 가져왔다.

아침이면 알람씨는 출근을 하고, 귀순씨는 아기와 함께 집에 있다. 낮시간 동안 귀순씨는 집안청소만 간단히 해 놓으면 된다. 시장을 보는 일은 퇴근한 알람씨가 한다. 방글라데시는 남자들이 밖에서 하는 집안일을 다 한다. 시장을 보거나 은행을 가거나. 남편이 돈을 관리하기 때문이란다.

귀순씨 오빠들에게 한국사람과 똑같다고 주장한 알람씨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돈을 귀순씨에게 맡겼다. 귀순씨가 아기 보느라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자신이 관리하고 있다. 가계부도 알람이 적는다. 알람씨는 “하루 벌어 하루 쓰고 나면 없다”고 난리다. 아기 우유도 사야 되고 기저귀도 사야 되고…. 아기한테 한달에 30만원 이상이 들어간단다. 실제 그런가? 아기 때문에 이사를 하느라 귀순씨의 오빠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매달 보내는 20만원도 아기한테 들어가는 돈으로 계산하는가 보다.

식사준비는 대체로 집에 있는 귀순씨가 한다. 밥상은 이중국적이다. 방글라데시 음식인 치킨카레, 녹두스프, 샐러드, 한국음식인 된장찌개, 미역국, 김치. 알람씨도 된장찌개와 김치를 먹고, 귀순씨도 치킨 카레와 녹두스프를 먹는다. 귀순씨는 처음에는 방글라데시 향신료가 입에 맞지 않았는데 먹다 보니 맛있다고. 주말, 회사에 가지 않을 때는 알람씨가 요리를 한다. 방글라데시 남자들은 요리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란다.

귀순씨가 아기 보는 것을 힘들어 하면 알람씨가 아기를 안고 한국말로 “태우야~까꿍” 하며 얼러 준다. 알람씨는 얘기를 하다 말고 시계를 보며 아기가 우유 먹을 시간이 됐다며 우유병을 챙긴다. 방글라데시 남자들은 원래 저리 곰살맞은가. 아니면 한국에 와서 '사랑받는 남편' 되는 법을 배운 것인가. 귀순씨는 “알람도 여자가 어디?” 하는 심보는 있는 것 같다며, 눈을 살짝 흘겼다.

인터뷰를 하다 알람씨와 귀순씨가 약간 언성을 높이게 됐다. 모아둔 돈은 없냐는 질문에 귀순씨가 “투자를 했다가 일이 잘못됐다”고 했다. 어디에 투자를 했냐고 하자 알람씨가 “다단계”라고 답했고, 귀순씨가 "다단계는 아니다"고 얼른 받자, 알람씨가 다시 "맞다"고 주장한다. 요는 자판기에 투자를 한 것인데, 그게 잘못된 것이었다. "내가 하지 말랬는데…"라며 입맛을 다시면서, 그만하자는 알람씨. 방글라데시로 돈을 보내냐고 물으니 알람씨는 “안 보낸다” 하고, 귀순씨는 “몇번 보냈다”고 한다. 운명으로 만나 국제결혼까지 한 이 부부도 가끔씩은 다툴 때가 있다.

그나저나 이들 부부는 싸움을 하면 어떻게 할까? 보통 때는 알람씨가 한국말로 의사소통을 하지만 화가 나면 방글라데시 말이 나올 텐데. 한국에서는 부부싸움을 하면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기도 한다. 그러면 남자는 처가집에 가서 빌고 아내를 데리고 온다. 알람씨에게는 어림도 없다. 이미 한국을 알고 있던 알람씨는 “가면 영원히 가는 거야”라고 벌써 못 박아 놓았단다.

우리 아기는 '세계인'

한국생활이 5년이 넘으면서 알람씨는 한국과 방글라데시를 비교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어딜 가나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다. 방글라데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착하고 좋은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이슬람교도인 알람씨는 한국에서 교회도 몇번 가봤다. “이슬람교나 기독교나 남한테 나쁘게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라. 이거잖아?”

이런 알람씨이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게 한국사람들의 ‘욕심’이다. “인생이 엉망인 사람이 많아. 어떤 사장님은 일하는 사람들을 너무 못살게 굴고, 나이가 많은데 젊은 여자랑 살아.” 방글라데시에는 인생이 엉망인 사람인 없을까.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나라가 방글라데시라는데 정말 그럴까.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친구들 집에 왔다갔다 하고 친척처럼 아주 친하게 지내. 한국사람들이 보면 놀랄 거야. 한국사람들은 일밖에 모르고 즐거운 시간이 없어.” 행복한 나라에서 살고 있던 알람씨도 돈을 벌러 한국에 왔다. 알람씨는 토요일에 일을 하지 않아서 월급이 적어졌다며, 하소연이다. 아내가 돈을 벌면 그 돈은 저금을 해서 사업자금을 하겠다는 계산이다.

알람씨는 귀화를 할지 방글라데시로 돌아갈지 아직 결정을 하지 못했다. 마음은 반반이다. 한국에서는 먹고 살기가 너무 빠듯해 희망을 가질 수가 없다. 방글라데시에는 알람씨 소유의 집이 한 채 있다. 한국에서 보낸 돈을 모아 아버지가 집을 한 채 사놓으셨다. 문제는 취직을 하기가 어렵다는 거다. 귀순씨는 한국에 살아도 괜찮을 것 같고, 방글라데시에 가서 살아도 좋을 것 같다. 사람들이 착하고 여유있을 것 같다. 어쨌든 조만간 돈이 좀 모이면 방글라데시에서 가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알람씨와 귀순씨는 아에스(태우)를 '세계인'으로 키우고 싶다. 그래서 집에서는 한국어, 방글라데시어, 영어를 '섞어서' 사용하기로 했다. 가난한 나라의 아버지, 가난은 벗어났다고들 하지만 천박한 나라의 어머니를 둔 아에스가 오대양육대주 어느곳에서든 제대로 대우받는 세계시민이 되기를. 젊은 부부는 과거 몇천킬로미터를 격하고 그들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를 보며 희망을 키워가고 있다.

귀순씨는 <매일노동뉴스>라는 신문을 누가 보냐고 물었다. 양대노총, 노동부라고 하려다 알람씨에게 제대로 '접수'가 안 될 것 같아 이주노동자를 위하는 사람들이 본다고 답했다. 그러자 귀순씨가 나선다. “대기업은 노동자들에게 일 시킬 때도 정해진 규칙에 따르잖아요? 여긴 무법천지예요. 뭔가 규칙이 필요해요.” 알람씨도 거든다. “사장님 마음대로야. 사장님 기분 좋으면 주고, 안 좋으면 나가라고 하고.”

그래서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 거 아니냐고 했더니, 알람씨 대답이 재미있다. “명동성당에 가서 후원금도 냈어. 그런데 시간이 없어 못 가.” 고용허가제 문제로 이주노동자들이 명동성당에서 장기간 투쟁하고 있을 때 지지방문을 갔던 모양이다. 부탁하고 요구할 만큼 할 도리는 다 하는 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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