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부자’보다 ‘부자노동자’가 더 미움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 미움을 받는 ‘부자노동자’란 연봉 1억이 넘는 기자, 딜러, 컨설턴트, 이런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다. 그럼 대체 누가 ‘부자노동자’인가.

‘뜨거운 아이스크림’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부자노동자’도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왜 우리 사회는 있지도 않은 존재를 미워하는 것일까. 사촌이 땅이 사면 배가 아프고,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는 무지막지한 속담까지 있는 나라라서 그런가. 아무려나. 미움 받는다는 그 ‘부자노동자’가 어떻게 사나 한번 보도록 하자.


'금' 마시고 '은' 먹는 줄 아나?

현대자동차노동조합 조합원 손영모씨(36)는 아내 정영숙씨(34)와 아들 상희(6), 딸 채영(5)과 울산 북구 매곡동에 있는 24평 아파트에 살고 있다. 현대자동차에 입사한 지 7년째, 결혼한 지 6년째 되던 2002년, 5천3백만원을 들여 마련한 내 집이다. 거실에는 TV와 에어컨, 부엌에는 작은 식탁, 안방에는 현대적 감각의 장롱과 침대, 작은 방에는 컴퓨터 책상과 책꽂이를 들여 놓았다.

영모씨는 아파트 내부 페인트칠을 직접 했다. 전등도 좀더 밝고 예쁜 것으로 바꿔 달고, 아내가 편리하게 집안일을 할 수 있도록 오른손이 쉽게 닿는 곳으로 스위치 위치도 바꿔 달았다.

영모씨는 아이들과 하루에 한 시간씩은 놀아준다. 집 근처 놀이터에서 자전거를 태워 주거나 뒷산으로 데리고 가서 꽃이름도 알려주고, 개구리 잡는 방법도 가르쳐 준다. 영모씨 가족은 1주일에 한 번은 외식을 하고, 2주일에 한 번은 2001년식 트라제를 타고 경주로 나들이를 간다. 아이들 교육을 생각해 주로 박물관으로 향한다. 한 달에 두어번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고 농사를 거들어드린다.

사람이 태어나 이 정도는 살아야 된다. 고스톱을 치면 기본이 석 점이다. 어떤 이들은 노동자가 피박에 광박까지 써 궁상맞게 사는 게 세상의 이치라고 여길 테지만.

"얘야, 어른 말 들어라"

손영모씨의 고향은 경남 창녕이다. 아버지는 농사를 짓는 한편 농기계 수리점을 운영하셨다. 어머니도 농사를 짓고 살림을 하셨다. 살림은 쪼들리지는 않는 편이었다. 2남2녀 가운데 장남인 영모씨는 중학 3학년이 되자 부산으로 유학을 왔다. 부모님은 공부를 잘 하는 영모씨가 도회지 학교에 다니면 더 잘 하게 될 줄 알고 어린 영모씨를 부산의 작은 집으로 보냈다.

시골에서 공부를 잘한다고 칭찬을 들었던 영모씨는 부산으로 유학 와서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공고로 진학했다. 기가 꺾인 영모씨는 조용히 고등학교 생활을 마쳤다.

영모씨의 첫 직장은 기계식 주차장을 제작하고 설치하는 업체였다. 월급은 70만원에 보너스 400%였다. 영업을 했던 영모씨는 1년 다니다 사표를 냈다. 회사 규모가 작아 전망이 없어 보였다. 두번째 직장은 실린더를 제작해 판매하는 업체였다. 영모씨는 영업을 맡았고 월급 85만원에 보너스 400%를 받았다. 영업하고 납품하면서 현대자동차 사람들을 알게 됐지만, 자신이 거기 들어가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영모씨에게는 공장보다는 영업직이 더 매력적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현대자동차에서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시던 작은 아버지가 입사를 권유했다. 어르신들 요량으로는 중소기업 영업직보다는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가 낫다. 영모씨는 망설였지만, 문득, 사귀던 애인 생각이 났다. 사랑하는 그녀와 결혼하려면 미래의 장인 장모님을 안심시켜 드려야 한다.


인간사 '새옹지마'


입사원서와 이력서를 제출한 뒤 필기시험을 봤다. 영어, 국어, 상식, 기술의 4과목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시험은 아니었다. 부서장들이 나와 면접을 봤다. 지원동기를 묻는 면접관에게 영모씨는 “현대자동차에서 꿈을 펼쳐 보고 싶다”고 답했다. 경쟁률은 15대1 정도 됐을까. 요즘은 100대1이다.

영모씨는 1996년 6월 현대자동차 사원이 되었고, 동시에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조합원이 되었다. 입사동기는 120여명. 그 가운데 20명이 보전부서로 배치됐다. 이때는 몰랐지만 몇년이 지난 뒤 영모씨는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못 가 공고로 진학했는데, 공고에서 딴 자격증이 이유가 돼 보전부서로 배치를 받았다. 컨베이어 조립라인에 배치된 동기들은 바로 현장에 투입됐지만, 영모씨처럼 보전부서로 배치된 동기들은 두 달 동안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구조조정이라는 태풍에서 비켜설 수 있었던 것이다.

영모씨는 입사한 뒤 지금까지 스타렉스와 트라제, 1톤 트럭을 생산하는 4공장 보전4부에서 일하고 있다. 4공장 전체 인원은 3,500여명. 보전4부는 130여명이다. 13~20여명이 한 반으로 모두 6개반이다. 한 반은 주간 야간으로 나뉘어져 A조와 B조가 된다. 보전4부 전자B조인 영모씨는 산업용 로봇 60대와 이 로봇들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기계를 관리한다.


비밀이 없는 부부

영모씨의 아내 정영숙씨. 영숙씨는 남편을 믿는다. 2차 구조조정이 있더라도 남편은 괜찮을 것이라고 믿는다. 책임감 강하고, 성실하고, 조직을 위해 자신을 죽일 줄도 아는 남편이다. 회사에서도 여러 면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남편이 필요 없다면 대체 누가 회사에 남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불안하다. 영숙씨는 남편이 회사 다니는 동안 요리학원이라도 다니기를 바란다. 그것은 영숙씨도 마찬가지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네일아트’를 배우려 마음먹은 지 오래다. 그러나 영모씨도 영숙씨도 아직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냥 가끔씩 걱정하는 정도다.

직장에 다니지 않는 영숙씨의 일과는 남편이 주간조일 때와 야간조일 때가 다르다. 야간조일 때는 남편이 아침에 돌아와 자고 일어나서 저녁에 출근할 때까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집에 같이 있다. 남편이 주간조일 때는 아이들을 유치원과 어린이집으로 보낸 뒤, 집안일을 후딱 해치우고는 근처 아파트에 사는 친구집으로 놀러간다.

"파업하는 달은 이중으로 손해를 봐요. 임금 깎여 손해, 남편이 집에 있으니 돈 쓸 일 많아 손해죠.” 이 부부는 비밀이 거의 없다. 현대자동차 다니는 노동자들은 아내를 통해 동료의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적지 않다.

편안하고 자상한 남자

영숙씨는 부산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화물트럭을 운전하셨다. 1남4녀 중 3녀로 집안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했던 딸이었다.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형제들이 2년 터울이라 대학교에 가지는 못했다. 선화여상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서 남편 손영모씨를 만났다.

영모씨는 편안하고 이것저것 보이지 않게 잘 챙겨주는 자상한 사람이었다. 나이 스물 첫 사회생활. 영숙씨는 영모씨에게 기댔고, 데이트 장소가 돼지갈비집이라는 것만 빼면 모든 게 미쁜 그런 시절이었다.

영모씨와 영숙씨는 3년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 결혼자금은 영숙씨가 모은 천오백만원에 아버지가 천만원을 보탰다. 어머니는 ‘비자금’으로 3백만원을 주셨다. 영모씨는 현대자동차를 1년 다녔다면서 모은 돈이 한푼도 없었다. 영숙씨는 ‘갑자기 주머니가 두꺼워지자 호기를 부린 게지’라며 미간을 모았지만, 결혼하고 나면 자신이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참아주기로 했다.

영모씨 집에서 주신 돈 3천만원으로 전세를 구했다. 결혼한 뒤 2년 동안 영숙씨는 운전을 배우고 메이크업과 피부마사지 학원을 다녔다. 돈이 모이면 작은 가게라도 낼 요량이었다. 2000년 큰 아이를 낳고, 곧이어 연년생 둘째 아이를 낳았다. 신혼은 끝났다.

울산에서 SK 임금이 가장 높다고 하지만 현대자동차도 괜찮은 편이다. 남편은 동네 아줌마들도 칭찬할 만큼 가정적이다. 큰 아이가 약한 게 걱정이지만 크면서 좋아지고 있다.

물량이 넘쳐 쩔쩔매는데 구조조정?

영모씨는 고장난 장비를 2~3시간 땀 뻘뻘 흘리며 고치고 나면 보람을 느낀다. 부서 특성상 라인 작업이 없는 주말에 나와 일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영모씨는 즐겁다. 내 일은 나 말고는 못한다. 새로운 장비나 기계가 들어오면 교육을 받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다. 야간대학에 진학해 자동차 관련 공부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도 하지만 대학이 현장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영모씨는 철판으로 자동차를 만들기까지 모든 공정을 가르쳐준다는 일본의 도요다자동차학교가 현대자동차에도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영모씨는 ‘이렇게 공장에서 늙어가는구나’ 싶기도 하지만, 1998년 구조조정 때를 떠올리면 이런 생각도 사치가 아닌가 한다.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한다고 했지만 영모씨가 속해 있던 4공장 노동자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IMF 이후 늘어난 자영업자들로 트럭의 수요가 높아져 공장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공장이 돌아가는데 무슨 구조조정.

그건 노동자들만의 생각이었다. 구조조정은 물량과 상관없었다. 영모씨 반에서도 2명이 나가야 했다. 기준은 입사 역순이라고 했지만 반장 재량도 포함됐다. 영모씨네 반장은 그냥 입사 역순으로 명단을 올렸다. 영모씨보다 한두달 늦게 입사한 동료 2명이 나갔다. 3명이 나가야 했다면 영모씨도 무급휴직이든 희망퇴직이든 정리해고가 됐을 것이다. 영모씨 입사동기는 절반만 남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모씨에게 조·반장 형님들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형님들은 방패막이였고, 해결사였다. 그러던 형님들이 아우들을 가려내 구조조정 명단을 짰다. 더이상 형님들을 믿을 수 없게 됐다.

무슨 조직이 11개나 되나

과거에는 조·반장들이 해결사였다면, 지금은 대의원과 소의원들이 해결사다. 부서의 현안 문제가 있으면 부서장과 대의원이 독대해 해결한다. 어떤 경우는 부서장과 과장, 대의원과 소의원이 함께 회의를 해 문제를 푼다. 조·반장에게 몇번을 얘기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대의원에게 얘기하면 된다. 영모씨도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대의원에게 얘기한다. 대의원이 노조활동 외 시간에 작업을 하지 않더라도 동의가 된다.

그렇다면 대의원이 형님이 된 것인가. 영모씨는 노동조합을 100% 믿지 않는다. 1998년 구조조정 때만 해도 그렇다. “구조조정을 반대하다 결국 수용했다. 처음부터 수용해서 대책 마련을 하고 대상인원을 최소화하고 재발 방지에 힘을 기울여야 했다. 그때 투쟁은 '보여주기'식이었다.” 영모씨는 “내가 회사측 생각을 그대로 얘기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이라고 덧붙였다.

영모씨는 노조가 조합원들의 고용을 보장해주려면 내부적으로 힘을 모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11개에 달하는 현장활동가조직이 단결해야 된다고 강조한다. 그들이 내거는 바는 ‘고용 보장’으로 똑같다는 게 영모씨 생각이다. 그런데 하나 둘도 아니고 11개로 갈라져 있다. 영모씨는 활동가조직이 갈라져 있는 이유는 자신의 조직이 집권하기 위한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활동가조직 정리 좀 하라." 노동조합 교육시간이면 영모씨는 이렇게 말한다. "공감한다." 간부의 답이다. 이게 끝이다. “나를 중심으로 통합하자가 아니라 상대를 중심으로 통합하자가 되어야 하는데 늘 나를 중심으로 통합하려고 하니…." 영모씨는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같이 먹어야 오래 살 수 있다

영모씨 부서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약 200명. 이 가운데 130여명이 정규직이고, 60여명이 비정규직이다. 기계를 유지·보수하는 보전부서의 특성상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하는 일은 똑같지는 않지만 거의 비슷하다. 비슷한 일을 하는데 왜 임금이 차이가 나나. 영모씨는 분명히 문제라고 생각한다. 필요하다면 파업도 할 수 있고, 임금을 손해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같이 먹어야 오래 살 수 있으니까.

그러나 영모씨는 '무조건' 정규직화는 반대다. 제2의 구조조정이 올 수도 있다. 나가는 순서는 입사 역순이라는 기준이 있지만, 이것이 지금도 지켜질까. 회사는 나이 많은 정규직 노동자보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 갓 된 젊은 노동자를 선호할 게 틀림없다는 이야기다. 영모씨는 노조가 이에 대한 확실한 대안만 내놓는다면 언제든지 정규직 전환을 환영한다. 그런데 영모씨 생각에 노조는 조합원들이 반대한다는 핑계를 대며 제대로 된 방법을 제시한 적도 없다.

정규직노조를 못 믿는 영모씨는 비정규직노조도 미덥지 않다. 자살한 고 류기혁씨 경우에도 노조가 정규직 전환보다는 복직투쟁을 더 열심히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정규직노조가 정규직화 요구보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더 처지가 딱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정규직 중에서도 비정규직(1개월, 3개월, 6개월 등 임시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이 있다. 노조는 조합원들을 보호하는 게 최우선이고, 그 다음이 더 힘없는 노동자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게 영모씨의 생각이다.

지들이 뭘 해준 게 있어야지

영모씨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개인보다는 조직이 우선이다. 책임지고 있는 기계들이 잘 돌아가서 라인이 서는 일 없이 자동차 한 대라도 더 만들어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다. 회사가 어려우면 고통분담도 할 수 있다. 임금삭감도 괜찮다. 순환휴직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회사는 어렵다고 동료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영모씨는 회사가 나가라면 나갈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래서 현대자동차가 아닌 다른 곳에 가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모씨는 공고를 졸업하고 2급기능사 자격증을 갖고 있으며, 세계 굴지의 자동차회사에서 10년 이상 기름밥을 먹은 경력자다. 이런 자신을 왜 써먹지 않으려 할까. 아니 못할까. 영모씨가 제일 답답할 때는 이럴 때다. 이 나라는 다음 일을 생각하기는 하는 것일까?

영모씨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도 찬성한다. 2000년, 2004년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를 찍었다. 영숙씨에게도 민주노동당 후보를 찍도록 권유했다. 조합에서 캠페인을 하면 기꺼이 동참했다. 영모씨는 노동조합 소의원으로 선출된 적도 있다.

별 욕심 없이 열심히 사는 영모씨가 대공장노조 이기주의에 빠진 노동자로 정부와 언론으로부터 '왕따', 심지어 진보세력으로부터도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영모씨는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잘못한 게 없고, 지들이 뭘 해준 게 있어야지.

 가계부
8월 지출8월 수입
250.000(자동차 할부금)
483.861(기름값 생활비 등 카드결제금)
268.230(보험료)
412.900(큰 아이 유치원비, 2학기 재료비 포함)
135.000(작은 아이 어린이 집 원비)
55.000(유치원 방과후 프로그램 미술, 바이올린)
50.000(큰 아이 학습지)
103.540(휴대폰 요금)
90.449(관리비, 전기요금 수도요금 케이블 포함)
44.600(인터넷 통신)
15.170(도시가스)
25.046(마이너스통장 대출이자)
90.000(곗돈- 친정, 시집, 친구 등)
150.000(여름 휴가비)
200.000(빌린 돈 갚음)
250.000(영모씨 아버님 생신 비용)
150.000(아이들 병원비, 옷, 부식비 등 기타)

2.933.795
1.869.258


'부자노동자'의 재산은 7천만원

영모씨와 영숙씨의 재산은 24평 아파트와 자동차(트라제)다. 전세보증금 3천만원에 통장에 들어 있던 5백만원을 보태고, 2002년 임금협상이 끝나고 받은 목돈 7백만원을 합치니 내집에 도전할 만했다. 은행에서 1천7백만원을 빌렸다. 영모씨가 주식하느라 날린 3백만원과 차 사느라 들어간 돈이 아니었다면 대출금은 더 적었을 것이다. 지난달로 자동차 할부금이 끝났고, 퇴직금 중간정산 해 받은 돈 1천7백만원으로 은행 대출금도 갚았다. 영모씨와 영숙씨네 빚은 7백만원이다. 이래서 이 부부의 재산은 7천만원쯤 된다.

지난 8월 영모씨의 월급은 1,869,258원이다. 이 달에는 보너스가 없었다. 자동차 할부금으로 25만원, 보험료로 26만원, 아이들 유치원비와 어린이집 원비, 기타 교육비로 40만원 가량 나간다. 자동차 기름값과 마트 쇼핑비가 카드로 결재돼 50만원이 청구된다. 이밖에 아이들 병원비와 옷, 경조사비, 공과금 등으로 40만원 가량이 나간다. 영모씨가 장남이고 아버지가 창녕에 홀로 계시기 때문에 자주 찾아뵙고, 집안일 챙기는 데 돈이 들어간다. 이외는 특별히 쓰는 곳도 없는 것 같은데 보너스가 없는 달에는 마이너스통장을 쓰게 된다.

영모씨와 영숙씨는 9월달부터는 적금을 넣을 예정이다. 마침 임금협상 잠정합의 결과 기본급이 9만원 정도 오르고 추석 상여금으로 80만원이 나와 마음이 가볍다. 이 모든 것은 영모씨가 현대자동차에 다니는 동안 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게 뭐 잘못됐나? 영모씨는 '부자노동자'가 아니라 현대자동차에 다니는 노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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