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병철을 낳고, 병철은 건희를 낳고, 건희는 재용을 낳고, 재용은 △△을 낳고…”
조선왕조 족보를 꿰지 못하면 문맹취급을 받듯이 삼성왕국 이씨왕조의 족보를 꿰지 않으면 밥먹고 살기 어려운, 그런 시절이 올지도 모른다.

회장직을 승계한 지 6년째 되던 1993년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을 표방하며 피고용자들과 협력업체들에게 “자식과 마누라를 빼고 모두 바꿔라” “자식까지 걸어라”고 변화를 역설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 속에서 시장이 개방되고 기술취득이 더욱 어려워지는 가운데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은 기업들은 없었다.

재벌그룹 총수가 그룹 기술체계에서부터 경영방식은 물론 조직문화에 이르기까지 일대 혁신을 부르짖는 것, 너무도 당연했다. 초일류기업이 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기업의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도 시장의 무한경쟁 속으로 던져지는 기업들이 취할 수 있는 생존전략, 성공전략은 자기혁신 이외의 다른 대안은 없었다. 

전근대적 신분제 사회 ‘삼성 이씨왕조’

하지만 재벌그룹 삼성에서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다. 무노조 전략뿐만이 아니다. 왕위의 족벌세습도 그러하다. 그룹의 피고용자들에게는 변화와 혁신을 요구했지만 정작 재벌그룹 삼성의 왕실은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손기정이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이유만으로, 손기정이 죽으면 손기정의 아들이 마라톤 국가대표선수가 되고, 그 아들이 죽으면 그 손자가 대표선수가 되는 사회. 거기에는 황영조도, 이봉주도, 김이용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대통령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선거 없이 대통령이 되고, 대법관의 자식이기 때문에 사법시험과 연수과정 없이 대법관이 되고, 교수의 자식이기 때문에 박사학위와 교육경력 없이 교수가 되고, 의사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인턴-레지던트 과정 없이 의사가 되는 사회. 직업과 지위가 대물림되는 신분제 사회, 상상만 해도 끔찍스럽고 몸서리처지지 않는가?

어느 누구도 우리사회를 봉건 유습을 보전한 신분제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독 세계화시대 첨단기술과 무한경쟁의 한복판에 있는 재벌그룹들만은 역사발전을 비웃듯이 봉건 성곽처럼 전근대적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 최첨단의 선진적이고 혁신적인 지배구조가 요구되고 있는 곳에서 가장 전근대적인 봉건시대의 괴물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을 다그치기 위해 입만 열면 떠들어대는 소위 ‘글로벌 경쟁시대’, 그 급변하는 경쟁 환경 속에서 기업의 경영책임자들은 무엇보다도 창의력과 기술개발 관리 능력, 위기대처 능력이 요구되고 있다. 기업내외의 환경에 대한 적응을 넘어 환경 자체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창업주들이 지녔던 그러한 창의성, 혁신역량, 끈질긴 승부근성, 기업가 정신을 창업주 후손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재벌 후손들은 비바람 몰아치는 거친 시장에서 환경의 도전에 맞서 환경을 바꾸며 자신을 만들어온 것이 아니라 태생적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뿐이다. 혁신적 기업가 정신은 온실 속에서 족집게 과외로 학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재벌 후손들이야말로 재벌그룹 경영책임자로 가장 부적격한 자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삼성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사들이여

재벌그룹 삼성은 온갖 불법-탈법절차들을 동원하여 선대의 부와 그룹기업들의 지배권을 대물림하고 있다. 37세의 이재용은 외국유학 가서 학교 다니고, 돌아와서 e삼성과 e삼성인터내셔널 등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여 실패한 것 외에는 별다른 경력이 없지만 1조원 대의 재산을 보유하고 이제 재벌그룹 삼성의 총수자리를 물려받을 태세다.

1조원 재산을 도박과 마약에 탕진하더라도 실정법을 어기지 않는다면 누가 뭐라하겠는가? 하지만 총자산이 200조가 넘는 삼성그룹을 망가뜨리면 그 부담은 국가와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안겨진다. 이제 국민들은 검증되지 않은 재벌총수 유전인자의 도박게임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면 감옥으로 가거나 자신의 자식과 수족들을 감옥으로 보내야 했지만, 재벌그룹 삼성은 총수도 총수의 자식도 가지 않는다. 대통령 임기는 5년이고 대통령의 권력도 임기와 함께 끝나지만, 재벌총수의 임기는 종신이고 그것도 부족하여 세습된다. 그렇게 재벌왕조의 권력은 재벌그룹과 함께 영생한다.

그룹계열사의 자산을 멋대로 주무르며 차떼기로 대통령을 세우고, 장차관을 멋대로 만들고, 국회와 검찰을 떡값으로 ‘이름 모르는 애들’까지 관리하고 있다. 게다가 재벌기업들의 불법-부정행위를 감시·감독하는 법원, 검찰청, 재경부, 금감원, 언론사들로부터 수백명의 핵심인사들을 채용하여 시종으로 부리고 있다. 정부도, 국회도, 법원도, 언론도 삼성의 로비에 따라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전직 대통령보다 재벌그룹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더 무서운 것이다.

현직 대통령도 다르지 않다. 재벌그룹 삼성이 대통령후보-국회의원-검찰 등 국가권력의 핵심을 불법자금으로 관리하며 국정을 농단한 내용을 담은 X파일의 진실을 규명토록 하기는커녕, 안기부의 불법도청을 사건의 핵심으로 규정하고 “97년 대선자금 수사를 덮자”고 나섰다.

도대체 재벌그룹 삼성으로부터 불법 선거자금을 차떼기-트럭떼기로 받아서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당선된 대통령이 대선자금 수사에 대해서건, 재벌그룹 삼성을 중심으로 한 정경언 유착에 대해서건 평가하고 발언하고 지시할 자격이 있는가? 언제는 60년 전, 100년 전 과거사를 들추며 ‘역사 바로잡기’를 외치다가, 이제는 8년 전, 3년 전의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도 덮어두자고 한다. 언제는 검찰의 자율성과 독립을 강조하더니 이제는 검찰더러 수사하라 마라 간섭한다. 

집사노릇은 이제 그만, 민심을 믿어라

거의 모든 국민들이 불신하는 데도 대연정-소연정을 내세우며 정경유착과 불법정치자금 문제를 덮고 지역주의 정치 게임에 ‘올인’하게 만드는 대통령은 애처롭게까지 느껴진다. 투우장에 쓰러진 투우사를 살리기 위해 붉은 까뽀떼를 휘두르며 투우에게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뻬네오, 누가 그 진정성을 의심하겠는가? 하지만 대통령의 눈물겨운 충정도 성난 민심 앞에 쓰러진 삼성왕국의 황제를 살릴 수는 없다.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무슨 무슨 회사의 상임 고문 혹은 고문 변호사를 맡는 미국 대통령들들이 그렇게 부러웠을까? 대통령의 대선자금 조사 반대 발언에 항의하는 집회에 등장한 전국언론노동조합의 피켓, “대통령은 삼성의 집사노릇 때려치워라”.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심정은 참담하다.

어쩌면 만화 같은 얘기가 진실일지도 모른다. 정말 대통령이 삼성왕국의 집사를 자처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완성하기 위한 사명감을 갖고 매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민들이 무식해서 대붕의 뜻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국민들을 한없이 원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나서도 역사는 바로잡아지지 않았다. 이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대통령의 침묵이다. 대통령이 나서지 않으면 역사는 바로잡아진다. 한 번쯤 백성들을, 민심을 믿어볼 줄도 알아야 대통령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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