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사내하청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홍영교씨(38)의 2005년 8월 현재 시급은 3,400원이다. 그가 이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는 6년. 중간에 해고와 재취업을 몇차례 겪었다.

반면, 이 공장에서 일하는 김모씨의 시급은 6,300원이다. 그는 현대차에 입사한 지 20년이 된 정규직 노동자다. 두 배 가까운 임금 격차. 그것은 근속연수의 차이 때문은 아니다. 영교씨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표 참조>

현대자동차 정규직2001년 4월1일 이후 입사자, 사내하청 28개월차(평균근속) 임금현황
구분금액(원)비중%
시급통상급임금총액시급통상급임금총액
2004년정규직3,909 1,060,2292,425,939100%100%100%
사내하청2,950 721,2021,610,11077.7%68.0%66.3%

같은 공장, 같은 일…임금은 절반

그렇다면 하는 일이 달라서일까. 영교씨는 엔진부에서 일을 한다. 컨베이어 앞에서 볼트를 조였다가 풀어주는 2~3개의 공정을 반복하는 작업이다. 이 컨베이어 앞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은 모두 같은 작업을 한다. 여기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별은 없다. 한때 영교씨가 다녔던 다른 사내하청업체에서 했던 일은 정규직이 월차로 빠진 자리에 가서 업무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같은 공장, 같은 일. 그러나 시급은 절반이다.

상식을 가진 이라면 이같은 현실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영교씨 역시 상식이 있다. 영교씨는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단결해 “비정규직이라서 받는 차별을 없애자”고 나섰다. 2003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사내하청지회를 만들고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차별을 없애자고 시작한 노조활동인데, 웬걸 여기에 또 돈이 들어갈 줄이야. 대부분의 가난한 노조, 특히 비정규직노조의 간부들은 이 돈을 개인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전임은 꿈도 꾸지 못하는 비정규직노조 간부들은 노조활동 ‘덕’에 동료 비정규직 노동자들보다도 월급이 적다. 특근이나 잔업을 많이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7월, 홍영교 지회장은 224시간 일을 했다. 한달 30일 내내 7시간 이상씩 일을 한 셈이다. 그런데 일을 많이 못했다고? 영교씨의 동료들은 대부분 한달에 400시간 이상, 심한 경우에는 500시간을 넘겨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실제 일한 시간은 그보다는 적다. 잔업이나 특근의 경우 ‘곱하기 1.5’를 하기 때문이다. 이 공장에서 하루 2시간의 작업은 기본이다. 영교씨는 지회장 활동을 하느라 하청업체에서 해고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일을 한 것이다.

224시간에 시급 3,400원을 곱하면 76만1,600원. 그렇지 않아도 정규직보다 임금이 절반 가량 적은데, 설상가상으로 동료들보다 또 절반 적은 셈이다.


차별 없애려 시작한 노조…그런데 웬 돈이 이렇게 많이 들어?

영교씨는 일주일에 이틀은 울산에서 지낸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비정규직노조와 공동투쟁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울산에 한 번 갈 때마다 돈이 ‘깨진다’. 움직이는 데, 먹는 데, 자는 데, 다 돈이 든다. 한달에 두 번은 서울이나 울산 등 현대차 공장이 있는 곳에서 현대자동차 원하청노조연대회의가 열린다.

지회에서 무궁화호를 기준으로 차비를 지급하고, 1끼 4천원 식대를 지급받는다. 숙박비는 없다. 시간에 쫓겨 KTX라도 타게 되면 차액을 개인적으로 부담해야 한다. 밥값이 나온다고 하지만 4천원짜리 영수증만 인정이 돼 혼자 밥 먹지 않는 이상 밥값 보조도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여관비를 아끼려 찜질방 신세를 지는데 이 돈 역시 개인 부담이다. 울산에서 이틀을 보내고 돌아오면 조합원들에게 보고도 할 겸, 이런저런 얘기도 할 겸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잡힌다. 물론 추렴이고, 지회장인 만큼 그의 몫은 더 크다.

이렇게 해서 영교씨는 노조활동으로 한달에 150만원 가량을 쓴다. 지회가 공식적으로 활동비로 인정해서 보조하는 돈이 약 80만원 정도. 영교씨의 월급은 고스란히 노조활동에 바쳐지고 있는 것이다.

영교씨 혼자서 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영교씨의 아내 전복희씨(36)는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사내하청 도장부업체에 다닌다. 97년도부터 일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사내커플’이라고 부러워하겠으나, 이 부부는 ‘비정규커플’이다.

복희씨는 컨베이어 옆에 서서 뒷걸음질을 치며 마스킹(차체문에 테이프를 부착하는) 일을 한다. 복희씨는 지난 7월, 417시간을 일했다. 시급은 3,200원이다. 생리(27,000), 월차(27,000), 근속(30,000), 만근(30,000) 수당까지 합쳐 1,334,400원이 7월 급여다. 여기에서 4대보험과 경조사비 등 7만원 정도를 제하고 120만원 가량이 통장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이 돈이 이 부부의 ‘생활비’다. 그러나….

영교씨가 조합 활동을 시작한 2003년부터 복희씨는 이 돈을 온전히 가족들을 위해서만 써 본 적이 없다. 6월 카드사용금액만 170만원이 넘었다. 거의가 홍 지회장의 기차표값, 식사비, 자동차기름값 등으로 사용됐다. 지회에서 보전받을 수 있는 70~80만원을 제한다 하더라도 100만원이 모자란다. 복희씨는 “이번 달이 좀 많이 나왔다”면서 한숨을 쉰다. “맨날 얻어먹고 다닐 수만은 없지 않겠냐.” 아예 포기한 얼굴로, 그래도 남편의 역성을 드는 복희씨.

2005년 7월, 수입과 지출
2,901,8362,261,600
1,784,836 (홍영교 6월 카드 사용)
540,000 (아이들 2명 학원비 5.6월 2달치 밀린 것 )
85,000 (심야전기)
38,000 (전화요금)
111,000 (휴대폰 요금)
33,000 (아이들 휴대폰 요금)
20,000 (가스요금)
100,000 (제사 비용)
200,000 (아이들 용돈, 책값, 옷, 아이들 반찬 등 생활비)
1,200.000 (전복희)
761,600 (홍영교)
300,000(휴가비 2인)

노조가입서 받아다주던 아내가 "이제 좀 그만해라"

문제는 또 있다. 지회가 보전해주는 돈이 제때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지회의 한 달 수입은 약 80여만원. 조합원은 350명 정도로 조합비 1만원이지만 최근 가입한 조합원들이 많아 이제까지 고정적으로 걷혔던 돈은 200만원 정도다. 이 돈을 금속노조로 보내고 금속노조에서는 200만원의 40%에 해당하는 80여만원을 내려보낸다.

지회는 이 80만원을 유인물 만드는 데 우선적으로 쓴다. 유인물 한 번 찍는데 8만5천원. 한 달에 4~8번 배포하면 남는 돈이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이러다보니 출장비를 제때 지급 할 수가 없다. 2~3달에 한 번씩 모아 지급하기 때문에 영교씨는 우선 제 카드를 긁는다. 모자라는 카드대금은 복희씨 월급에서 충당하는 수밖에 없다.

복희씨는 “만성 적자인데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이들 학원비(2명 27만원)가 아무래도 만만치 않아, 7월부터는 학원에 보내지 않고 인터넷 과외를 받도록 했다. 생활비야 공과금 내는 것 말고는 거의 들지 않는다. 쓸 돈도 없거니와 복희씨가 일하러 다니느라 어디 가서 돈 쓸 시간도 없다. 영교씨 어머니께서 텃밭에서 감자, 고구마 등 온갖 채소 종류는 다 키우기 때문에 고기 이외에 반찬값은 따로 들지 않는다.

그래도 모자라는 돈은 산 입에 거미줄 치라는 법은 없는지. 보너스 나오면 밀어넣고, 퇴직금 중간정산 되어 나오고, 애들 보험을 해약하기도 하고 하면서 어떻게 메꾼다.

이쯤 되면 복희씨가 남편인 영교씨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번 달 적자니 돈 좀 고만 쓰고 일 좀 해라”는 말뿐이다. 복희씨는 처음에 남편의 노조활동에 반대하지 않았다. 복희씨가 다니는 업체 사람들 몇명에게서 조합 가입서를 받아다 줄 정도였다. 조합활동 초기에 남편에게 가진 불만은 ‘남편이 바빠서 대화를 할 시간이 없다’는 약간은 애정어린 투정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합 일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뉴스'가 없던 남자…'뉴스'를 만들기 시작하다

영교씨는 스물세살에, 복희씨는 스물한살에 부부가 됐다. 영교씨는 지금 살고 있는 아산이 고향이고 복희씨는 예산이 고향이다. 영교씨는 부모님의 높은 교육열 덕분으로 초등학교부터 중퇴한 대학까지 서울에서 다녔다. 대학을 중퇴한 뒤 아산으로 돌아왔다. 이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천안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복희씨를 만나 1년 연애하고 결혼을 했다.

아버지께서 영교씨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남양홍씨 대종손인 영교씨는 결혼을 빨리 해야 했다. 스물다섯에 첫 아이를 얻었다. 첫째인 딸은 중학교 1학년, 둘째인 아들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영교씨는 고향인 아산과 지척에 있는 천안의 건설업체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20대의 ‘젊은 아빠’ 영교씨는 회사와 집을 오가며, 가끔씩 자신이 가장이라는 사실을 잊고 총각인 친구들과 어울리다 집에 들어와 복희씨에게 싹싹 비는 것 외에는 별다른 ‘뉴스’가 없었다. 싹싹 빈 그 주말에는 처가에 가서 아내를 기쁘게 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92년부터 다녔던 건설업체가 97년 외환위기 때 부도가 났다. 어머니가 갖고 계신 논을 부치겠다고 1년쯤 왔다갔다 했지만 포기했다. 서울에서 자란 것이나 다름없는 영교씨에게 농사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저 우리 동네에 공장이 서는가 했다. 아산공장에서는 영교씨가 살고 있던 동네 이장의 추천만 있으면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 있도록 했었는데.

이 궁리 저 궁리, 먹고살 방도를 찾던 영교씨는 결국 99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사내하청업체에 취업했다. 시급 2,400원에 기본급 576,000원이었다. 보너스는 600%. 잔업과 특근을 꼬박하면 100만원 가량이 됐다.

공장생활을 처음 한 영교씨. 이게 공장인가 감옥인가. 당시만 해도 월차도 마음대로 사용 못하고 조퇴도 허용이 되지 않았고 잔업과 특근도 거의 강제로 해야 했다. 공장 안에 놓여 있던 민주노총 선전물을 보면서 노조를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업체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 몇명과 온양에 있는 치킨집에서 노조 관련해 얘기를 나눈 게 업체 사람들 귀에 들어갔다. 노조활동 경험이 없었던 영교씨. “내가 문제였다. 다른 사람은 놔둬라.” 혼자 뒤집어쓰고, 혼자 해고가 됐다.

또 이 궁리 저 궁리. 영교씨는 “조용히 회사 다니면서 애들 커가는 것이나 보자”고 마음먹고 2001년 사내하청업체에 다시 들어갔다. 일만 하려 했다. 그러나 입은 막을 수 있어도 눈과 귀까지 막을 수는 없다. 정 불합리한 점들이 눈에 띌 때는 업체 관리자에게 항의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99년 노조를 만들기 위해 모였던 후배 가운데 한 명이 영교씨에게 아산공장 사내하청업체에서 일하고 있던 비정규 활동가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발동이 걸렸다. 후배들을 스승으로 삼고 노조활동의 기본을 익혀갔다. 2003년,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식칼 테러’(월차를 쓰겠다는 사내하청업체 노동자를 관리자가 폭행하고 병원에 누워 있는 노동자를 다시 찾아가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그으려 한 사건)가 도화선이 돼 3월 금속노조 현대차 아산공장 사내하청지회를 설립하고 지회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비정규 노동자보다 더 힘든 비정규노조 활동가

영교씨는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맞은편, 5분 거리에 있는 동네에 살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시던 구옥을 97년에 2층으로 개축해서 어머니와 영교씨 식구 다섯이 살고 있다. 대지 100평에 건물이 30평쯤 된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집이라도 있어 적자를 내어가면서도 활동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집’이 있다는 것이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이 집이 영교씨의 조합활동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2001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사내하청지회를 결성했을 때 회사측이 홍 지회장에 대해 퍼뜨린 악성 루머 가운데에는 ‘집 봐라, 보통 부자가 아니다’는 내용도 있었다. 사내하청지회에서는 ‘좋은 집에 사는 부자가 아내를 사내하청업체에 다니게 하냐?’고 맞받아쳤고, 그 이야기는 그래서 가라앉았다.

사내하청지회를 지회를 설립했던 2003년 그해, 영교씨는 노조인정 집회와 투쟁 등으로 해고가 됐다. 현대자동차와는 교섭도 한 번 못해 보고, 노조 인정하라는 시위를 하다 스무명이 넘는 조합원들과 해고가 된 것이다. 노조활동이 이유가 아니라 노조를 인정하라는 외침만으로 해고가 됐고, 복직을 하기 위해서 단식투쟁까지 벌여야 했다. 2004년 9월 복직이 되었고, 2005년 1월 사내하청지회장으로 다시 활동하고 있다.

해고가 되어 있던 때도 별 다를 바 없었지만 다시 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에 있는 날은 나흘 정도다. 사흘을 바깥에서 조합활동으로 동분서주하다 집에 들어오면 몸은 파김치가 돼 쓰러져 자기 바쁘다.

아내와 아이들과 대화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중학교 1학년으로 사춘기에 접어 든 딸과는 이런저런 딸 크는 얘기도 듣고 싶고, 아들 녀석과는 공도 차고 싶건만 몸이 따라 주지를 않는다. 아내와는 돈 걱정 말고는 할 얘기가 없다. 어머니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기 일쑤다. 그래도 3년 동안 참아준 아내와 말없이 지켜봐 주시는 어머니가 고마울 따름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가난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나섰다. 아내가 공장에서 고생해가며 번 돈까지 까먹으면서. 그러나 가족들을 외롭게 하고 있는 게 지금 영교씨의 현실이다. 지금 이 순간, 비정규직 노동운동은 비정규직 노동자 개인의 시간과 돈, 그리고 능력과 노력으로 움직이고 있다. 집이라도 있는, 텃밭에서 푸성귀라도 딸 수 있는 홍 지회장 경우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힘들다. 그리고 비정규직노조 활동가는 더 힘들다. 그들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대통령은 기념식이 열리는 빨간날만 되면 잊지 않고 ‘정규직이 비정규직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영교씨가 힘든 게 정규직 때문인가? 빼앗는 국가보다 야비한 국가가 더 나쁘다. 영교씨는 웃는다. 앞에 선 자가 먼저 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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