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중채무자 700만의 시대. 이자에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부채원금보다 이자 갚느라 허덕이는 인생.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과중 채무로 인해 다년간 고통 받다가 도저히 빚 갚을 능력이 없어 ‘파산’을 선고받고 법원으로부터 ‘빚 갚을 필요가 없다’는 판정인 ‘면책’을 받은 사람들. 지난해 1만2천여건이었던 파산신청 건수는 올해 상반기에만 1만3천여건을 넘어섰다. 그만큼 과중된 채무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얘기다. 하지만 연간개인파산자가 170만명인 미국과 20만명인 일본에 견줘 우리나라의 파산신청자가 많은 편은 아니다.

정부의 홍보부족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일반인들이 이 제도에 ‘인생 종친다’ ‘자식에게도 빨간줄이 간다’는 등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렵게 파산·면책을 받은 이들도 면책 이후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다. 도덕적 해이자라는 ‘불성실의 낙인’은 각종 자격제한, 차별대우를 통해 실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생의 재출발’을 위해 달려가려는 이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우선 은행권에 남아있는 소위 ‘특수기록’이다. 


금융권, 7년간 특수기록 정보 보관

다음카페 ‘면책자클럽’에는 은행 등 채권기관의 불합리와 차별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높다. ‘겨울i’란 아이디를 쓰는 한 면책자는 ‘면책자들과 아예 상종안하겠다는 금융권들’이란 글에서 “지난해 면책을 받았는데 올해 신용조회를 해보니 ‘채무불이행’ 정보에 등재되어 있었다”고 했다. 부랴부랴 면책결정문과 확정문을 보내고, 전화통화를 통해 항의하면서 채무불이행 기록을 모두 삭제할 수 있었다는 것.

“면책기록은 신불 채무로 보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는데도 굳이 기록으로 남겨놓아 파산자나 신불로 취급하는 것이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납니다 면책기록이 삭제되려면 7년을 기다려야 한다는데, 7년을 이 같은 취급받으며 살아야 하는지.” 신용정보관리규약에 의해 법원으로부터 파산·면책결정을 받은 거래처(면책자)에 대한 정보는 등록사유발생일로부터 7년간 특수기록정보로 남게 된다. 이 기록은 은행연합회 등 신용정보기관에 보존되며, 체크카드(통장 잔고 범위에서 사용가능) 발급 등의 자격요건 심사시 면책자의 경우 카드발급의 제한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법원이 면책관련 서류를 은행 등 채권자에게 통지해야만 면책사실이 알려지기 때문이다. 지난해 개정된 통합도산법에는 “면책자에게 또다시 채권추심을 하면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조항이 있지만 이 법은 내년 4월부터 시행된다.

지난 8월 8일 민주노동당사에는 변호사나 법무사를 통하지 않고 ‘나홀로’ 파산·면책을 진행하고 있는 30여명이 모였다. 한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한 듯 그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한 칠순의 할머니와 30대 주부는 파산신청을 하고 면책을 기다리면서 홀가분해 했다. 칠순의 할머니는 생활보호대상자로 빚 갚을 능력은커녕 늙은 몸을 의탁할 곳도 없는 처지. “카드에 ‘카’자면 나와도 지겨워. 자살하는 사람 이해가 가고도 남아요. 얼마나 부대끼면 그러겠어요.” “파산 절차를 변호사에게 묻는데 ‘아무나 하는 것 아니라면서 겁을 주더라고.”

남편의 사업실패로 부부가 같이 파산을 신청한 30대의 주부는 파산, 그 자체로 마음이 편안한 모양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돌려막기’를 반복해야 하는 데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생각도 많이 했죠.” “창피하기도 하지만 끙끙 앓으며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죠. 파산은 인생의 끝이 아니니까요.” 당장 채권추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기쁨 때문이리라. 하지만 면책을 먼저 받은 이들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특히 여성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모자가정’의 경우 더욱 그렇다.


‘모자가정’ 이끄는 힘겨운 손발

“면책을 받았다고 별로 상쾌하다거나 기분이 좋지는 않아요.” 경기도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대학 3학년인 외동딸과 함께 살고 있는 조 아무개씨(45). 지난 2월 파산 신청 서류를 접수하고 6개월여 만인 8월초에 법원의 ‘면책’ 결정을 받았다. ‘채권추심의 공포’와 ‘빚’으로부터 해방되었으나 홀가분 하다기 보다는 위축된 마음이 더 크다. “은행대출이나 카드는 이제 꿈도 못 꿀 일이죠. 은행들은 파산면책 등을 ‘특수기록’으로 기록하고 있잖아요. ‘새로운 출발’인데 몸으로 때우는 일 외에는 할 게 없으니까요.”  

조씨는 최근 한 정수기회사 판매원(플래너) 일을 보고 있다. “다른 직장도 알아 봤지만 일단 나이가 걸리고, 전문직이 아니면 일자리 구하기가 어렵죠.” 허리가 좋지 않은 그가 식당, 주방일 등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하려고 해도 약값이 더 들 뿐이다. 정수기회사 입사하는데 애로사항은 없었는지 물었다. “‘도둑질’한 것도 아닌 이상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기로 했죠. 지점장한테 집에 가압류 걸린 거며, 파산중이라는 것도요.” 조씨는 다행히 언니의 신원보증과 지점장의 이해 덕분에 일을 할 수 있었다.

5개월여 접어든 그의 수입은 100여만원 안팎. 정수기 판매와 대여, 필터 정기점검 등을 통해 수수료를 챙긴다. 그러나 개인사업자 신분이라 차량 유지와 통신료 등은 온전히 개인부담이다. 4대 보험도 되지 않아 실제 수입은 높지 않다. 하지만 조씨는 다년간 고객을 상대했던 경험을 살려 바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일을 잘하고 있는 편이다.

조씨의 남편은 아이가 태어난 지 6개월여 만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졸지에 딸과 함께 남게 된 조씨는 이를 악물고 살아야 했다. 다행히 커피숍 등을 운영하며 딸을 훌륭히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빚을 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종합상가에서 ‘옷장사’를 시작하면서 불행은 찾아왔다. 물건을 들이고, 시설투자를 하기 위해 몇 백씩 현금서비스를 받아 구매했던 것이 어느새 2천6백만원이란 거금으로 불어났다. 장사는 갈수록 되지 않았고 투자한 금액은 이 카드 저 카드로 ‘돌려막기’를 하며 간신히 버텼지만 2년도 안돼 원금이자와 연체이자는 4천3백여만원으로 불어났다. 조씨는 사업 시작 당시 동사무소에서 ‘모자가정’에 주어지는 서민대출을 받으려 했다. 1,200여만원을 연 5% 이자에 5년 거치 상환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동사무소에서 2명의 보증인을 세우라는 무리한 조건만 아니었더라도. 카드 빚을 지지는 않았을 텐데…” 후회와 원망은 두고두고 밀려온다.   

조씨는 딸이 대학을 마칠 때까지 뒷바라지에 전념할 계획이다. 그런데 고등학교까지는 그나마 교육비 지원이라도 나왔지만 대학이후 ‘모자가정’에 대한 등록금 지원이 안돼 조씨의 허리는 휠 지경이다. 어디 그 뿐인가? “아이가 스무살이 넘었으니 임대료도 260만원 정도를 더 내라는 거예요.” 세상살이 힘들 게 하는 요소는 한둘이 아니다. “여름인데도 가스비가 10만원이 나와서 턱없이 많이 나왔다고 항의해도 먹히질 않아요.” 조씨가 살고 있는 서민 임대아파트의 임대료는 6만원 가량. 관리비는 17여만원이다. 여기에 가스, 전기, 수도, 통신요금 등이 포함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없는 사람이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숨은 턱까지 차오른다.


무너져 내리는 나를 추슬러 보지만…

서울의 또 다른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김 아무개씨(46). 도벽이 있던 남편과 이혼한 그는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을 홀로 키우고 있다. 조씨보다 앞선 지난해 11월 ‘면책’을 받았던 김씨는 IMF 시절 6천여만원의 사기를 당해 매달 2백여만원씩 빚을 갚느라 허덕였다. 호프집 운영, 옷 제작 등을 통해 버는 족족 빚을 갚아 나갔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이었다.

채무독촉에 시달리다 신경쇠약, 우울증에 빠졌고, 정신과 치료를 받을 정도였다. “너무 빚 독촉에 시달리다 보니까 깜짝깜짝 놀래고, 불면증에 시달려요. 지하철 타러 갔다가도 사람들이 몰려 있으면 무서워서 가질 못해요. 숨도 못 쉬겠더라구요.” 그의 후유증은 ‘면책’ 판정 이후에도 지속돼 1년이 다 되도록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영세민 신청을 해서 받는 60여만으로 세 식구가 먹고사는 빠듯한 삶. 아파트 임대료, 관리비만 30여만원. “임대료, 관리비 1년 미납했다고 집을 비우래요. 결국 보증금에서 300만원을 제했죠. 하루는 딸이 목욕탕 물을 가득 받아 놨길래 물어보니 관리실에서 돈 안냈다고 전기, 수도를 끊어 버린다고 해서 그렇게 했더래요. 휴~.”

허리를 졸라매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그이지만 몸과 마음은 갈수록 무거워져 간다. 동네 친구들한테 몇 백만원씩 또 손을 벌리는 자신이 자꾸만 미워질 뿐이다. “아이들 키우려면 아프면 안 되는데 자꾸 이러네요. 어떻게든 꾸려 나가야 하는데….” 인터뷰를 마치고 뒤돌아가는 그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워 보였다.  
여성 홀로 아이들을 키우기란 세상은 녹록치 않았고, 면책 이후의 삶에 대해 사회는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만 볼 뿐이다.
 
변호사 없이 ‘나홀로’ 파산·면책을 향해
다음, 네이버 등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파산면책 관련 단체들을 검색하면 무수한 카페들이 나온다. 이 가운데 면책자클럽(http://cafe.daum.net/pasanja)과 파산면책을준비하는사람들모임(http://cafe.daum.net/newpasamo, 이하 파사모)은 수천명의 회원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들 카페들은 변호사나 법무사의 지원이 아닌 ‘나홀로’ 파산, 면책을 진행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면책자클럽’은 “파산·면책이 이뤄져도 은행권에는 이 사실이 ‘특수기록’으로 남게 돼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점과 면책 뒤에도 채권추심이 이뤄져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 되고 있다”며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대법원이 면책관련 서류를 채권자에게 통보만 하더라도 면책사실이 알려져 불필요한 불이익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파사모’는 지난해 4월 모임을 결성해 현재 2천여명이 넘는 회원이 활동중이다. 한 파산전문 변호사의 카페 소모임에서 활동하다가 ‘영업에 방해된다’며 강퇴당한 회원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 모임의 출발이다. 수입이 없는 이들에게 150만원~300만원에 이르는 변호사 비용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면책을 받고, 현재 자영업을 하고 있는 ‘굿뉴스’란 아이디의 카페개설자는 “회원중에 2, 3백명의 면책받은 분들이 있는데 파산면책을 받더라도 독촉을 덜 받는다는 것뿐이지 수입이 생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자활공동체나 사회연대은행과의 조인트 등 자활방법을 논의중”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부터 가계부채 SOS 운동을 펼치고 있는 민주노동당은 2001년 이자제한법 부활운동을 시작으로 길거리상담, 나홀로 빚 탈출강좌를 통해 파산·면책 등 빚 탈출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8월 8일 30여명의 파산·면책자들이 당사에 모여 ‘나홀로 빚 탈출 자원봉사자 모임’을 결성했다. 이들은 향후 과중채무자들의 나홀로 빚 탈출 도우미 활동과 면책자 불이익 폐지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할 계획이다. 매달 8일 저녁 민주노동당사에서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개인파산제 활성화해야
임동현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 국장


8월 3일 관계 부처와 대법원 등에 따르면 개인파산 신청 건수는 올해 상반기에만 1만3,931건으로 지난해 전체의 1만2,317건을 넘어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특히 서울의 경우 면책률이 99%에 달하는 등 법원이 과중채무자의 경제적 재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보였다.


하지만 채무상환 능력이 없는 연체자(신용불량자) 343만명, 한계채무자(신용불량 상태에 있지만 카드 돌려막기 등으로 연체를 면하고 있는 계층) 400만 명 등 750만명에 달하는 과중채무자 문제를 해결하기에 1만3,931건의 파산신청 건수는 여전히 부족한 수치다. 연간 개인파산자가 미국의 경우 170만명, 일본의 경우 20만명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특히 민주노동당이 지난 2001년 ‘이자제한법 부활운동’으로 시작한 ‘가계부채 SOS운동’을 통해 총 1만5천여명의 과중채무자를 상담한 결과, 그 중 절반에 달하는 7,749명이 파산상태에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개인파산제나 개인회생제 등 법원 중심의 채무조정 프로그램이 더욱 활성화될 필요성을 증명한다.


또 과중채무자가 파산제도를 이용할 경우 받는 불이익에 대해서도 개선할 여지가 많다. 현행 파산법이나 내년 3월말부터 시행되는 통합도산법상 △파산선고를 받은 채무자는 면책(빚 탕감)까지 공무원, 변호사, 의사, 간호사 등의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점 △면책결정 시 보증인에 대한 재량 면책 같은 보호 장치가 없는 점 △개인파산제·개인회생제에 대한 홍보와 실무지원 기구가 없는 점 △지방법원마다 파산신청 비용, 면책률, 심사기간이 천차만별인 점 등 때문에 사실상 파산상태에 있는 채무자가 제도를 이용하기를 꺼린다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면책결정전까지 채권추심이 계속되기 때문에 추심에 밀려 일부 채권자에게 변제하면서 채무가 더 늘어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면책신청이 있거나 파산폐지결정의 확정이 있는 때, 면책신청에 관한 재판이 확정될 때까지 채무자 재산에 대한 채권추심은 금지시켜야 한다.


한편 민주노동당은 파산선고로 자격이 제한되는 직업군에 대해 이 같은 규정을 철폐하는 내용의 관련 개정법 80개를 이달 중에 발의할 예정이다. 또한 법원 중심의 채무조정제도 활성화 및 채무자 피해 구제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방침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