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파는 ‘골방’에 익숙하다. 끼리끼리 모여 결정하고, 결정의 이유도 밝히지 않으면서 정작 결정이 공개된 뒤에는 시치미를 떼는 버릇을 남에게 주지 못하고 있다. 이제 광화문 네거리에서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외치며 뛰어다녀도 기껏해야 도로교통법으로 구류나 사는 세상이 됐지만, 이런 ‘구습’은 여전히 이어져 왔다.

숨기는 것. 그것은 더이상 권력과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보안’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골방’은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한, 그럼으로써 내부 경쟁자(정파들)와 내부투쟁 과정에서 ‘덜 망가지기’ 위한 자위책으로 기능하게 됐다.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준)(전진)가 19일부터 20일까지 ‘정치대회’를 열었다. 300명이 넘는 규모의 대규모 활동가들이 공개적으로 모여 정치를 토론하는 ‘정치대회’. 전진의 이번 시도는 전에는 볼 수 없던, 실로 신선한 시도다.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활동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정당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소수자 부문운동의 의제를 놓고 토론을 벌여 함께 지켜야 할 ‘테제’를 만든다는 것,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새로운 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매일노동뉴스>가 전진의 정치대회를 다녀 왔다.


“대회 개념부터 만들어가야 한다”

220석의 대회장 좌석이 부족했다. 보조의자가 배치됐다. 얼굴이 ‘명함’인 활동가부터 두루 알려진 ‘선수’들이 드물지 않게 보인다. 이번 정치대회는 전진 스스로 말하듯 활동가 모임, 즉 ‘선수’들의 모임이다.

정치대회는 자신과 타자를 정확히 구분하는 것부터 시작됐다. 조직현황 보고에서 전진은 스스로는 좌파로, 경쟁세력을 우파(민족주의자와 자유주의자), 그리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외면으로 좌파의 협소함을 불러온 또다른 좌파 성향의 세력을 나누었다. ‘딱 부러진’ 경계의 확인. 그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기 위한 출발선일지도 모른다.

“정치대회는 처음”이고, “대회 개념부터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김기수 대회준비위원장의 말처럼 전진은 ‘전진’을 위한 실험을 하는 중이다.

“사실 욕심을 많이 냈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2~3년 중기 과제를 (추상적인 수준을 넘어서) 정하려면 3개월은 토론해야 하겠더라. 지역에서 충분한 토론을 해서 쟁점만 남기고 다 모여야 하는데, 첫 모임인 만큼 거기까지 가지 못했다. 이런 대회가 ‘실험’이라면 ‘실험’인데, 노력하면 앞으론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김기수 위원장은 ‘시작’이라는 사실, 그리고 ‘시작’에서 필요한 게 무엇이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했다.

첫 토론 주제는 ‘활동 강령’. 기본자세와 태도, ‘욕망 또는 유혹과의 전쟁’, ‘운동문화의 혁신’의 큰 주제로 나뉜 활동강령은 ‘전진이 활동가들의 조직’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좀 유치한 부분도 있다”는 임성규 전진 의장의 말처럼 강령은 시시콜콜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적시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접하는 성찰을 담은 문건이다.” “이 원칙대로라면 속세에서 살기 어렵겠다는 생각도 든다.” 활동가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하는 표정을 보인다. 그러나 ‘선수’들은 역시 ‘일반도덕론’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전진은?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준)(이하 전진)은 지난 2004년 12월18일 결성된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좌파 활동가들의 공개적 ‘정치조직’이다. 2003년부터 전국모임을 해 왔던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좌파활동가들이 공개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며 전진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강령정신(사회주의 이상과 원칙) 실현, 노동계급 중심성 강화, 사회운동 변혁성 강화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민주노총 중앙파, 당내 젊은 좌파 활동가 모임이었던 화요모임,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출신의 일부 활동가들, 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 출신 등이 주축이 되어 구성됐으며, 약 400여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국민파’와 민주노동당의 ‘자민통’ 그룹과는 경쟁관계에 있다. 또한 민주노동당을 통한 정치세력화를 목표로 삼고 있지 않은 좌파 활동가모임인 ‘노동자의 힘’ 등과도 구분된다.
“전진 활동가들만의 강령으로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더 깊은 토론이 필요하다.” “당위가 아닌 구체적인 실천수칙으로 지켜야 할 것들이 필요하다.” “강령과 수칙이 혼재 돼 있다.” 결국 대회는 활동강령보다는 ‘활동결의문’으로 삼자는 것으로 이 논의를 정리했다. 역시 ‘활동가답게’, 시계의 장침이 몇바퀴 돌아가고 있는데, 토론은 계속됐다.

첫날 밤, 이 밤에는 ‘금주령’이 내려졌다. 다음날 빡빡히 잡혀 있는 토론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운동권 MT문화로는 별일이지만, 전진의 활동결의를 떠올리면 당연한 일이다.

“대립할 건 대립하되, 문제는 내용”

다음날 새벽부터 ‘노동의제’와 ‘정치의제’에 대한 발제와 토론이 시작됐다. 첫 발제에서 노동운동의 위기 진단과 “지역운동에 기반한 대산별 이외에는 돌파구가 없다”는 제안이 있었다. 기업별 산별, 무늬만 산별로 전환하는 산별운동은 안 된다는 지적이다.

이어 민주노총 조직혁신안에 대한 비판이 발제됐다. “산별노조 건설운동의 대한 평가 없이 당위적인 산별노조 건설만을 강조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위기의 양상과 결과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사실상 현 민주노총 집행부의 조직혁신안을 거부하고, 지역중심 대산별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어진 정치의제 토론. 이념운동 없는 진보정당, 대중참여 없는 대중정당, 문화적 감수성 없는 ‘후진’정당 등 거친 비판이 이어졌다. ‘개혁 대 보수’ 전선을 넘어서, 사회주의적 의제를 중심으로 한 ‘진보 대 보수’ 전선 형성에 앞장서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2006년 1월로 예상되는 당직선거와 관련해서는, ‘1기 최고위원회에 대한 전당적 평가운동을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발제를 담당한 회원은 “정치적 견해를 떠나 당황스럽게 무능한 지도부”였다며 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를 비판했다. ‘이념정당’ ‘계급정당’ ‘평당원 중심 정당’으로 바꿔야 한다는 3대 혁신과제에 대한 제안이 이어졌다.

위기의 진단과 현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선 날이 서 있지만, 그 다음 과제들은 원칙론에서 멀리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무렵, 정치·노동 의제에 대한 발제와 토론이 끝났다.

“민주노총 현 지도부의 조직혁신안에 반대하고, 민주노동당 현 최고위원회의 무능을 폭로하자는 말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회원은 이렇게 답했다. “전진과 현 (민주노동당 및 민주노총) 주류 지도부는 차이가 있다. 대립하되 왜 대립하며, 어떤 내용으로 대립하냐가 중요하다.”

"새롭게 제기된 관점은 아니지 않느냐”고 질문을 또 던지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람과 이해관계가 아니라 노선과 관점에서 정확히 각이 서는 곳이 어디인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게 이 회원의 고민. 이는 전진이 자신의 노선과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앞으로 어떻게 내용을 채울 것이냐는 고민과 연결돼 있다.

점심시간을 전후로 소수자 부문운동 교육이 진행됐다. “솔직히 성소수자, 장애인, 여성 문제에 대해 전진의 고민은 깊지 않다. 그래서 교육부터 진행했다. 별거 아닌 거 같지만 ‘50대 현장 활동가가 문화적 충격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을 강사들에게 주문했다.” 김기수 위원장의 말이다.


시도는 신선했다

오후 들어 이번 정치대회의 핵심 과제인 ‘2005 실천테제’에 대한 발제와 토론이 진행됐다. “전진의 3년간의 과제”에 대한 합의를 이루는 게 이 토론의 목표다. 3시간에 걸친 분반토론까지 진행하며 토론은 무게감 있게 진행됐다.

△신자유주의 지배연합과 구별되는 진보정당 독자정치 기반을 확고히 △노동조합운동을 대산별 중심으로 재편하고 비정규·미조직 노동자의 대규모 조직화를 실현 △한반도 정세에 대한 진보적 대안을 마련하고 개입능력을 확보 △비정규·여성·이주노동자·장애인·성소수자 등이 노동자 민중운동의 주역으로 부상할 다양한 방안을 모색 등이 실천 테제 발제문에서 뽑은 핵심과제다.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대산별 운동으로 막고, 민주노동당의 위기는 당 3대 중심(당 강령정신 중심, 노동계급 중심, 평당원 중심)을 세워 막아야 한다는 게 이날 토론의 핵심. 하지만 자구 수정 문제와 각 과제별 실행경로, 테제의 의미까지가 혼재된 상태에서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실천 테제는 내용에서 문구까지 수많은 문제제기가 있었고 결국 이후 수정 보완하는 것을 전제로 채택됐다.

“‘부흥회’를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 미리 토론을 하고, 모이기 전에 준비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리 실력의 문제다.”(임성규 의장)

기자에게도 처음인 ‘정치대회’ 취재를 오면서,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좌파 활동가들은 개혁세력과의 공조와 관련해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을까. 비정규직 조직화 방안에 대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열린 토론의 장에서 그들끼리 모였을 때는 어떤 고민들이 토로될까.

솔직히 말하면, 현장에서 그 답은 얻지 못했다. 시도는 신선했지만, 내용은 새로운 게 많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토론은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점차 커지며 늘어지는 분위기였다. ‘반대’는 비교적 그림이 잡혔지만, ‘지향’은 한눈에 안 들어 왔다. 서로 기대고 살아온 것 또한 정파운동의 역사다. 전진의 정치대회. 실험은 시작됐다.

정치대회에 선거 이야기는 없었다
모든 정파는 권력에 민감하다. 전진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정치대회에서는 민주노동당의 권력관계, 즉 당직제도 제도개선 문제에 대해서는 토론을 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천테제 토론 막바지에 당의 부문할당 문제가 토론 주제로 나왔다.


“당원이 선출하지 않고 대중조직에 의해 지명되는 부문할당은 당규위반이다.” “부문할당이 평당원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현장에서 당 정치활동의 기여한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정치를 협소하게 봐서는 안 된다.”


약간 지루했던 토론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5명 정도가 발언을 했고, 발언을 원하는 사람은 더 있었다. 하지만 제도개선 문제에 대한 토론은 진행자의 제지로 여기서 멈췄다.


전진 조직현황 보고에 따르면 회원 397명 가운데 당 활동가는 108명, 노조 활동가는 176명이다. 부문할당 토론의 과정에서 이 두 집단의 인식 차이가 확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해 본 적이 없고, 인식차를 줄이는 것은 우리의 과제다. 사실 당과 노조 활동가들이 화학적 결합을 하기 위해선 2~3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 회원의 말이다.


당직공직 겸직금지의 문제, 최고위원 정수의 문제, 담당최고위원제의 문제 등등. 민감한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전진은 토론을 미루고 있다. 또 1월 선거에서 전진이 어떤 행보를 취할지에 대해 궁금하기 이를 때 없지만 이번 ‘정치대회’는 그 문제에 관한 한 입을 다물었다.

<취재후기> 그래도 손가락은 뻑뻑했다
“내일 전진 정치대회 취재 때문에 출장가요.”


“나도 거기 가는데.”


“어, 국장도 전진 회원이에요?”


“….”


늦은 오후 지하매점에서 한 당직자와 라면을 먹던 중이었다.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사실 민주노동당에서도, 민주노총에서도 자신의 정파를 내놓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다. 그래서 이번 취재는 여러 가지로 흥미로웠다. 300명 가까운 ‘정파조직원’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대 토론회 형식의 ‘정치대회’를 벌인다는 것은 그 형식만으로도 뉴스였다.


전진더러 정파의 구습을 따르는, 과거 정파구도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났다고 비난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전진은 ‘내용’보다는 ‘사람’ 중심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대회가 예전에는 좀처럼 볼 수 없던 확실히 진보한 운동의 형식이라는 사실까지 부정할 사람들은 없는 듯하다.


몇명이 모여 뭔가를 정하고, 아래로 지침을 내리는 방식은 군부독재에서는 불가피했거나 용기있는 방식인지 몰라도, 서점 매대에 자본론이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오늘에는 활동가의 편리함 외에는 취할 게 없는 방식이다. 방침과 노선을 정하기 위해 지루한 토론을 감내할 각오는 오히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에서 보기 쉽지 않다.


이번 대회 참가자 중에는 민주노동당 소속 공직자도 있었다. 대중조직의 대표자도 있다. 부부 회원도 있었다. 처음 취재후기를 구상할 때는, ‘어 이 사람도 여기 왔네’ ‘저 양반도 전진 소속이었네’라고 쓸 예정이었다. 하지만 손가락에 뻑뻑한 느낌이 들어 그만두기로 했다. 인용도 대부분을 익명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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