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16일부터 매일 여성칼럼인 <여성과노동>을 게재합니다. <여성과노동>은 우리사회에서 여성이 참여하는 노동, 정치, 부문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줄 것입니다. 또한 비틀리고 소외된 우리사회의 모습에 ‘조용히’ 일갈하는 목소리부터 제도개선 등 정책분야까지 폭넓은 목소리도 담아낼 것입니다.

‘노동현장’은 노동참여의 현장을 여성의 시각으로 담담히 담아낼 예정입니다. 김지예 민주노총 부위원장, 이혜순 전국여성노조 사무처장, 부명숙 전 산재의료관리원노조 위원장, 이윤경 보육교사노조 사무처장, 그리고 한국노총에서 글을 보내주시기로 했습니다.<편집자주>
 

 

이번 주부터 <여성과노동>이 확대되고 여성 필진이 이 면을 채워 나가고 있다. 아마도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여성들의 수다만큼 경쾌하고 거침없고 생명력 있는 글을 기대하는 눈치다. 그런데 그런 기대 때문에 은근히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가볍게 쓰자니 간부답지 않고, 무게 있는 시론을 쓰자니 재미가 없을 테고, 노동이슈와 관련한 건 너무 무거울 것 같고. 고민 끝에 ‘어느 미술교사의 알몸사진에 대한 대법원 판결’과 ‘알몸 생방송’을 다뤄보고자 한다. 

한 미술교사의 ‘알몸사진’의 진실함

충청도 시골중학교에 한 미술교사가 있었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그는 그 시대 다른 교사들처럼 군사독재에 저항하고 민주화를 위해 실천하며 투쟁했다. 전교조 해직 5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학교로 돌아간 그는 학생들에게 세상을 올바로 이해시켜 주기 위해 온힘을 쏟는다. 미술교사로서 그의 교육실천 중 한 가지는 자본주의의 상징이면서 가장 큰 폐해를 낳고 있는, 그리고 결코 없어지지 않을 ‘성의 상품화’에 대해 다루는 것이었다.

미술교과서 속에 실린 작품을 보아가며 허구성을 파헤치고 CF 속 여성의 몸을 분석하였다. 과연 여성의 몸은 아름답기만 한가? 벗은 몸은 음란한가? 실제 여성의 몸은 어떠하며 왜 그림과 영화와 CF 속에선 그 두 가지 의미 밖에 없는가?

그는 여성의 몸에 대한 끊임없는 왜곡과 그것의 배후에 자리한 자본과 남성들의 음모를 파헤치고 싶었다. 거짓된 여성의 몸을 연작으로 보여주고 그 시리즈의 마지막에 그들 부부의 알몸사진을 실었다. 아이를 잉태하고 키우며 노동하는 여성의 몸을 보여줌으로서 어떤 몸이 가장 진실한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임신 8개월의 아내를 설득하여 나란히 벗고 서서 자신의 카메라로 셔터를 눌렀다. 가냘픈 몸에다 오그라든 남성의 성기, 그리고 잔뜩 배가 불러 둔하고 피곤한 듯 보이는 나이든 임산부의 그 무표정과 삭막함이라니.

지금도 그 사진을 떠올리면 괜스레 눈물이 난다. 우리 삶의 고단함과 말해주는 중년부부의 두 알몸. 음란하기는커녕 서글픔을 주고 아름답기는커녕 눈길을 피하고 싶으리만큼 추하다.

그런데 법원은 음란물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학생들은 연작 사진의 의미를 잘 이해한다고 했고, 작가는 음란물로 이용되는 여성의 몸을 제자리로 돌려놓고자 하는 것이라 설명했음에도, 귀를 막은 대법원은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음란물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가장 일반적이지 않은 이들이 우리의 심판관임을 자임하면서. 

생방송 알몸노출 사건 ‘해프닝’ 아닌가?

생방송 중 알몸을 드러낸 사건 또한 우리 사회 보수성과 호들갑을 그대로 보여준다. 생방 현장에서 황당해했을 청소년을 생각하면 철없는 연예인의 미숙함에 씁쓸하기는 하지만, 그냥 해프닝으로 끝낼 일이었다. 구속수사를 한다, 마약테스트를 한다, 국민에 대한 성추행이라느니 떠드는 건 일회성 해프닝에 대한 대응치고는 좀 심했다.

금기를 깨고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 안간힘을 쓴 인디밴드의 처절함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봐 줘도 괜찮을 일이었다. 백남준 같은 예술가는 백악관에서 바지가 흘러내려 아랫도리가 다 드러났는데, 클린턴은 그냥 웃고 말았다지 않는가. 우리 같으면 국가원수 모독죄로 당장 감옥에 갔을 일임에도.

아랫도리 역시 그냥 우리 몸의 일부분일 뿐이다. 성(聖)스럽지도 성(?)스럽지도 않은 그냥 신체의 일부분이다. 벗은 몸 또한 뭐가 그리 대단한가. 내 대장 속에 있는 똥은 괜찮고 내보내면 더러운가? 옷 한 겹 벗으면 그 몸이 바로 그 몸이다. 알몸여부가 음란의 기준이 되어서도 도덕의 기준이어서도 안 된다. 자기파트너가 아닌 사람의 벗은 몸을 보고 성적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어디 제정신인가. 더구나 두 가지 사건의 경우 모두 발기된 성기도 아니지 않았는가.

컴퓨터만 켜면 실제 성행위가 무제한 널려있는 세상을 살면서 마치 딴 세상에서 온 듯 시치미를 떼는 것 같다. 때를 만난 듯 보수언론이 개혁방송사를 때려잡으려 한 듯도 싶고. 이런 사건을 겪을 때마다 우리사회가 얼마나 천천히 나아가고 있는지 새삼 조바심이 난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