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곤씨(40)는 창원 시내에 있는 작은 기계가공업체에서 트럭 운전을 한다. 그는 아침8시 출근해서 1개에 30kg 나가는 부품들을 3.5톤 트럭에 가득 싣고 납품업체로 배달을 간다. 부품을 지게차로 트럭에 옮기고 그 트럭을 운전해서 납품업체로 가서 부품을 내려놓기, 하루 4~5회. 저녁8시면 회사 소유인 10년 넘은 프라이드를 타고 퇴근한다.

직장에 다니지 않는 박정미씨(39)는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삼겹살을 한 근 사올 걸 그랬나?’ 혼잣말을 하던 정미씨는 칼질을 하다 고개를 돌려 아이가 잘 놀고 있는지 살펴본다. “경재야~ 아빠 왔다.” 장난감을 들고 뛰어나온 경재(6)가 현관 앞에서 “아빠~” 하며 팔을 벌린다. 건곤씨는 아이를 안으며 아내 정미씨의 얼굴을 일별한 뒤 “배고프다”고 한 마디 한다. ‘배고프다’는 별일 없다는 뜻이다.

밥, 김치, 멸치볶음, 된장찌개, 감자볶음으로 저녁식사를 한 뒤 건곤씨는 9시뉴스를 보며 틈틈이 아이와 놀아준다. 정미씨는 설거지를 하고 걸레로 마루를 훔친다. 이러는 동안 부부 사이에 짧은 대화가 오갔다. 뉴스를 보다 “뭐 저런 놈들이 다 있냐”고 혀를 차는 건곤씨. 옆에서 고개를 끄덕여주며 “어머니가 편찮으시다고 전화를 하셨던데 내일 병원에 모시고 가야겠다”고 남편에게 확인하는 정미씨.

반복되는 일상이다. 옆집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밤 11시, 집안의 불이 꺼졌다. 하루가 끝이 났다. 잠이 안 올 때, 부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


“오늘은 일찍 퇴근해라”

건곤씨의 고향은 창원시 북면이다. 지금은 창원시지만, 건곤씨 어린 시절 그곳은 농촌이었다. 건곤씨의 부모님은 논 30마지기로 쌀농사를 지었다. 건곤씨가 중학교 다니던 무렵 아버지가 경운기에 머리를 다치셨다. 서울의 큰 병원을 다니며 뇌수술을 3번 받는 동안 논은 조금씩 없어졌다. 4녀2남 중 장남이었던 건곤씨는 마산의 창신공업고등학교 기계과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건곤씨는 주간으로 다니던 학교를 야간으로 옮기고 낮에는 일을 했다. 직원이 10여명 되는 작은 공장에서 프레스를 찍었다. 여름방학 때 일을 하다 프레스에 오른쪽 엄지손가락이 눌렸다. 뭉개지고 피가 뚝뚝 흐르는 손가락을 휴지로 감고 회사 근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손톱의 2/3가 사라지고 손가락 끝이 문드러졌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라”는 사장의 말에 따라 버스 타고 집으로 가던 건곤씨. 버스는 보충수업을 마친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고, 라디오의 아나운서는 이렇게 말했다. “고3 수험생 여러분, 더운 날씨에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가투의 마왕’

건곤씨는 병역을 마치고 88년 창원에 있는 대림자동차에 입사했다. 오토바이 부품에 필요한 금형 만드는 일을 했다. 열심히 일해 돈벌 생각하고 있던 건곤씨에게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건설된 민주노조였다. 건곤씨는 수습딱지를 떼기도 전에 창원에서 벌어졌던 집회를 구경나갔고, 이윽고 가투가 벌어지면 본격적으로 가담하게 됐다.

“이상하게 끌렸다.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구호도 좋았고, 고등학교 때 일하다 다친 손가락 때문에 억울해서 그랬는지….” 건곤씨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있었던 노조 집행부선거에서 민주노조쪽이 이겼고, 집행부는 지역집회에서 신나게 화염병과 짱돌을 던지던 신참노동자 건곤씨를 쟁의부원으로 ‘스카우트’ 했다. 전노협의 중심이었던 마창노련, 통일중공업노조와 쌍벽을 이루던 대림자동차노조에서 쟁의차장으로 ‘승진’하면서 건곤씨는 ‘가투의 마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집회에서 극성(?)을 부리던 만큼, 아니 그 이상 잔업과 철야도 악착같이 했다. 주 40시간을 과외로 일했고, 한 달에 23만원을 받았다. 보너스는 연 600%. 번 돈은 어머니에게 전부 갖다 드렸다.

김건곤(40)
1985년  18만원(주야 맞교대 12시간)
               고등학교 3학년 한국철강 연수생
1988년  23만원(주 40시간 시간외 근무)
               보너스 600% 대림자동차 사원
2003년  1백1십만원(주 30시간 시간외 근무)
               보너스 600%   A 하청업체 사원
2005년  1백5십만원(주 20시간 시간외 근무)
               보너스 600%  B하청업체 사원
박정미(39)
1986년  10~12만원(주40시간 시간외 근무)
               보너스 600% 대성공업 사원
1992년 50~60만원(시간외 근무 없음)
              보너스 600% 소니 사원
2004년 100만원(시간외 근무 없음)
              보너스 700% 소니 사원
2005년  0원 전업 주부

1988년 23만원…2005년 150만원


건곤씨는 92년 퇴사했다. ‘사노맹’ 활동을 하던 동료의 편을 들다 노조와 약간의 갈등도 생겼다. 건곤씨는 스스로 사표를 썼다. 회사에서 노조활동을 문제삼지도 않았고, 노조에서도 붙잡았다. 퇴직금 350만원의 절반은 회원으로 있던 마창노동자문학회 ‘참글’ 사무실을 구하는 데 보탰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같은 시를 쓰는 노동자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게 그의 평소 바램이었다.

빈손이 됐다. 자동차정비를 배우고 싶어 자동차정비공장에서 2년 일을 하다 그만뒀다. 자동차정비는 “뭔가 될 것 같기는 했지만 (사장이 되기 전에는) 정말 돈이 안 됐다.” 작은 공장들, 레미콘 운전을 거쳐, 98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공장으로 돌아가 운전을 했다. 4년째 접어들 무렵 회사가 부도가 났다. 그 뒤 2~3번 공장을 더 옮겨야 했고, 지난달부터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통장에 들어오는 돈은 한 달에 1백5십여만원, 보너스는 600%다.

‘쫑고’

박정미씨는 창녕군 영산면에서 태어났다. 온천으로 유명한 ‘부곡’ 근처다. 농촌에 살았지만 아버지가 우체국에서 근무해 농사를 짓지는 않았다. 정미씨가 아홉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큰 병원’에 가신 아버지는 “너무 늦었다”는 진단을 받고 집에서 1년 정도 투병 생활을 하셨다. 어렴풋한 기억이다.

아버지 퇴직금으로 산 논 1마지기 반과 산비탈에 있는 밭 한 뙈기, 아들 둘, 딸 둘이 정미씨 어머니에게 남겨진 전재산이었다. 이때 어머니는 서른일곱. 내집 농사만으로는 아이들을 건사하기 어려워 품삯을 받으며 남의 집에 일하러 다니셨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 딸들에게 농사일을 시키지는 않으셨다. “공부나 더 해라.”

정미씨는 영산여자종합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도시아이들이 ‘쫑고’라 놀렸지만, 영산에서 나고 자란 정미씨가 영산여종고에 입학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을에서 한 두 명은 마산이나 진주로 유학을 갔지만, 그것은 남의 이야기였다.

8시 출근 8시 퇴근…1주일에 3~4번 철야

대학을 포기했다. 정미씨보다 훨씬 성적이 좋았던 언니도 대학에 가지 않고 취직을 했는데, 그보다 못한 점수로 대학 얘기를 꺼낼 엄두가 안 났다. 주산, 부기, 타자를 배웠으니 경리직으로 취업이 되기를 원했지만, 그런 자리는 도회지에서 상업계 고등학교를 나온 또래들의 몫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86년, 동네 오빠의 소개로 마산수출자유지역 내에 있는 대성공업에 취직이 됐다. 신발공장이었다. 정미씨는 운동화의 접착과 박음질 상태를 검사하는 일을 했다. 아침 8시 출근해서 3시간 잔업까지 하고는 저녁 8시에 퇴근했다. 1주일에 3~4번은 철야를 했다. 잠 못 자고 번 돈은 한 달에 10만원, 많을 때는 12만원.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시골에서 맑은 공기 쐬며 마음만은 편안하게 생활했던 정미씨는 철야를 밥 먹듯 하는 공장생활이 힘들어 1년만에 낙향했다. 엄마 품에서 따뜻한 밥 먹고 원기충전한 정미씨는 88년 공장으로 돌아갔다. 수출자유지역 내 동양통신. 오디오부품 만드는 공장으로 신발공장보다는 훨씬 나았다. 작업장도 깨끗했고 임금도 셌다.

정미씨는 돈버는 재미에 노동자들이 투쟁을 해도 “하나 보다”, 직장 동료들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도 “그런가 보다”고 흘렸다. 화장도 안 하고 옷도 안 사 입었다. 번 돈은 어머니께 다 드렸다. ‘내돈인데’라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돈 벌면 어머니 드리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알았고, 어머니는 그 돈으로 남동생 대학공부를 시켰다.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사는 게 원래 그런 것”이라고 답하는 정미씨.

노민추도 여행동아리도 좋았지만…

92년 동양통신이 수출자유지역 내 한 회사와 합병돼 일본소니의 한국공장이 됐다. 정미씨가 하던 일은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월급은 한 달에 60만원. 보너스 600%. 여전히 다른 사업장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그런데 정미씨에게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노조민주화추진위 활동을 하던 후배가 같은 라인에 앉게 된 것.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노민추 활동을 하게 됐다. 노민추가 만든 여행동아리 ‘답사반’도 마음에 쏙 들었다.

2000년 결혼을 하고 퇴사했다. 한 달 1백만원의 수입을 생각하면 다녀야 했지만 적지 않은 나이에 아이를 낳아야 하는 데다, 회사의 작업환경을 생각하고는 포기했다. 납땜질에 서서 일을 해야 했다. 하루 8시간 내내. 임신을 한 동료들은 웬만하면 그만두었다. 유산을 하는 동료들도 더러 있었다. 정말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동료들도 있었지만 정미씨는 그 정도로 독하지는 못했다. 노민추 활동을 하는 후배들에게도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18평의 ‘왕국’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하며 돈 벌어 어머니께 다 드렸던 건곤씨와 정미씨가 결혼을 하게 됐다. 건곤씨 어머니가 전세보증금 하라며 3천만원을 냈다. 정미씨는 퇴직금 1천6백만원으로 살림살이를 장만했다.

문제가 생겼다. 전세 들어 살고 있던 주인집이 부도를 냈다. 전세확정일자를 받아 놓았지만 다른 세입자들보다 전세보증금이 많았던 탓에 우선순위에서 밀려 8백만원만 들고 나와야 했다. 은행에서 전세자금 1천5백만원을 대출받고 나머지는 정미씨가 언니에게 돈을 빌려와 2천8백만원으로 집을 다시 구했다. 지금 살고 있는 창원 도계동 다가구주택 2층. 방 두 칸, 거실 겸 부엌, 욕실을 포함해 18평이다.

지난 7월 수입은 141만7,000원. 보너스가 없는 달이었다. 꼭 나가야 될 돈이 1백만원 가량 된다. <표 참조> 나머지 4십만원으로 남편 용돈하고 살림을 살아야 된다. “쌀은 시댁에서 갖다 먹고 반찬이야 나물인데 얼마 드나? 남편이 고기를 좋아하는데 자주 못해줘 그게 안됐기는 한데…. 화장품이나 옷은 언니한테 얻고….” 무심하게 말하는 정미씨가 올해 돈 주고 산 화장품은 3천원짜리 썬크림이 전부다.

2005년 7월, 수입과 지출
1,362,200(지출)1417,000(수입)
유치원(21만5천원)
유치원 우유값((8천원)
전세자금 대출금 이자(7만원)
주택청약저축(10만원)
보험료-생명보험(19만5천원)

핸드폰요금-할부값 포함 (5만원-건곤)(3만5천원-정미)

집전화(1만7천원)
인터넷(2만9천2백원)
유선요금(7천원)
수도요금(1만2천원)
전기요금(2만8천원)

남편용돈(18만원)
지역금속조합비(3만원)
민주노동당 당비(1만원-건곤) (5천원-정미)
민주노동당 분회모임 회비와비용 (3만원-건곤, 정미)
계모임 회비(2만원-건곤)
계모임 회비(1만원-정미)
동화 읽는 어른 모임의 회비(1만3천원-정미)
여행동호회 '답사반' 회비(5천원-정미)

경재 우유값(2만3천원)
부식비(6만원)
생활용품, 기름값 등 카드로 지출되는 돈(20만원)
 

보너스가 있는 달이라고 쓸 돈이 있는 건 아니다. 저축을 해야 전세자금 대출금을 갚아나갈 것 아닌가. 없는 셈 치고 5십만원 가량을 은행에 넣어 두지만 돈이 쌓이지 않는다. 정미씨는 1년에 한번씩은 병원 신세를 진다. 소니를 다닌 동료들도 그렇다. 혹시 작업 환경 때문일까? 심증은 가나 물증은 없다. 어쨌거나 입원비에 수술비 기타 경비를 합치면 돈 백만원이 순식간에 없어져 버리고 퇴원을 하고 나서도 약값이 솔솔치 않다.

아프지 말자, 건강하자

정미씨는 “건강하기만 해도 그냥 살아 갈 텐데”라며 안타까워했다. 내 집 마련을 빨리 해야 된다는 욕심도 없고, 크게 돈 쓰고 싶은 생각도 없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넉넉해지기를 바랄 뿐.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미씨가 아프지 않아야 하고 건곤씨가 건강해야 된다. 사실 이번달에는 신용카드로 건곤씨 보약을 지었다. 25만원이었다. 동네 할머니들의 “남편이 어디 아프냐”며 살이 빠지는 것 같다는 ‘퉁’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올 여름 건곤씨는 실제로 살이 빠졌다. 나이가 들면 체력은 떨어지기 마련. 지난해 다르고 올해 다르다.

가난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사랑은 창문을 열고 나간다던가. 그러나 건곤씨와 정미씨는 돈 때문에 싸운 적은 없다. 전세보증금 날렸을 때도 정미씨는 건곤씨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 안 했고, 없는 살림에 병원비로 적금을 깨도 건곤씨는 보약을 더 많이 못 지어줘 미안하다고 했을 뿐이다. 얼마 전 정미씨 집에서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돈을 내놓아야 했을 때 건곤씨가 한 말은 “알아서 해라” 이 한 마디였다. 돈과 관련, 건곤씨가 유일하게 간섭할 때는 “수도꼭지에 물 떨어진다, 전깃불 끄라”다. 건곤씨는 한때 체제전복을 꿈꾸던 ‘가투의 마왕’이었다.

대화가 없다고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건곤씨의 한달 용돈은 18만원이다. 하루에 담배 한 갑, 7만5천원이다. 회사 동료들과 가끔씩 술을 마시면 2~3만원이 나간다. 건곤씨는 얼마 되지 않는 용돈 중 일부를 조금씩 남겨 십만원을 마련해 정미씨 생일에 봉투에 돈을 넣어 선물했다. “옷이나 하나 사 입어라.” 정미씨는 아무 말 없이 그 돈으로 온 가족이 1년 내내 먹을 수 있는 토종벌꿀을 샀다.

정미씨는 건곤씨를 보면 애처롭다. 하루에도 몇번씩 직장에 다녀볼까 고민을 하는 정미씨. 그러나 자신이 없다. 공장의 고된 노동은 끔찍하고 다른 일은? 자신감이 없다. 정미씨가 미안한 마음에 ‘자신이 없다’고 털어 놓았더니 건곤씨가 하는 말. “그럴 것 같더라.” 이게 전부였다.

부부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다. 말을 많이 하는 데도 능력과 여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미씨와 건곤씨의 침묵에는 그들만의 배려와 신뢰가 깔려 있는 것이다.

초심은 바로 옆에

건곤씨는 “노동운동이 초심이 잃지 말아야 한다”며 “하청업체 다녀서 대기업에 납품 다녀 보면 정규직 노조 조합원들에게 실망을 많이 하게 된다” 고 말했다. 정미씨는 “여전히 노민추 활동을 하는 후배들 보면 답답하다”면서, “남들은 노조 민주화시켜 이제는 정규직노조 이기주의라는 얘기까지 듣는데 우리는 여전히 노민추”라고 안타까워했다.

꿈이 없었다는 정미씨. 만약 정미씨에게 멋진 페미스니스트 언니가 곁에서 ‘너는 아주 예쁘고 소중한 사람이니 네 자신을 사랑하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마음껏 살아라’고 속삭여주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여행이 유일한 취미라는 정미씨는 남동생 대학 공부 시키지 않고 배낭여행을 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할 말이 아주 많은 여자가 되었을 수도.

만일 건곤씨가 사표를 쓰고 대림자동차를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다른 조합간부들처럼 해고-구속의 ‘정규코스’를 밟아 존경받는 노동운동가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대기업 노동자로 지금보다는 안정된 생활을 누릴 것이다. 이도저도 아니면 그가 퇴직금을 쾌척한 문학회에서 시를 쓰고 있을까.

경재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다 눈이 맞은 부부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어렸다. “승리냐 패배냐가 아니라 존중이다.”(백무산 시 <겨울 조정환>) 이 부부는 한달에 당비 1만5천원을 내는 민주노동당의 당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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