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0여년전 아테네의 시민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올 것’을 우려했습니다. 인간은 탐욕의 동물인지라, 사회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정치력을 갖게 될 경우 ‘혼란’이 초래된다는 이유에서였죠. 그러나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려와는 정반대로, 2,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어느 사회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주도적인 정치력을 가졌던 역사가 없습니다. 왜 일까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통해 한국사회에 ‘똘레랑스’라는 화두를 던졌던 홍세화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이 교사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명문대입시에 모든 것을 ‘올인’하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 현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게 그의 힌트.

왜 일까? 왜 가난한 사람은 정치력을 가질 수 없었을까? 또 이 질문에 대답이 우리나라 교육문제와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일까?


“한국 교육은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 키웠다”

28일 오후, 서울 동소문동에 위치한 인권실천시민연대 교육장. 여름방학을 맞아 교사들에 대한 인권강좌가 한창인 가운데, ‘학교의 군사문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주제로 강의가 열렸다. 오늘의 강연자는 홍세화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사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만 있어도, 가난한 서민들은 스스로의 계급적 정체성을 스스럼없이 배반해 왔습니다. 민주정치 구조 속에서 서민들은 다수가 갖는 정치력을 통해 소수 부자들의 경제력에 맞설 수 있었지만, ‘개천에서 용 나기’ 식의 허상에 갇혀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고, 스스로의 의식을 배반해 왔습니다.”

홍 위원의 대답은 이랬다. 학부모들이 자기 돈 들여가며 사교육에 목을 매고, 가난한 사람일수록 ‘서울대 폐지’를 반대하는 모순된 상황은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허황된 믿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는 마치 가난한 사람들이 지극히 희박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로또’를 사 모으며, ‘로또’가 없어지는 것을 반대하는 것과 유사한 현상”이라며 “서민들이 교육을 통해 신분을 상승하겠다는 허상을 갖게 되기까지 대중매체와 교육제도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대중매체와 교육제도가 만들어낸 ‘자발적 복종’

그렇다면, 홍 위원이 ‘로또’로 비유한 우리사회 교육에 대한 허상들은 어떠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형성돼 왔을까? 홍 위원은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다”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빌어 “대중매체로 대변되는 자본과, 교육제도로 대변되는 국가권력이 사회구성원들의 의식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16세기 프랑스의 에티엔느라보에시는 <자발적 복종>이라는 책에서 ‘왕정이 유지되는 것은 왕정이 갖고 있는 물리력보다는, 시민들의 자발적 복종 때문’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민중적·민주적 통제 기제가 없는 상태에 주입된 자본과 국가권력의 주의주장이 서민 일반에 ‘자발적 복종의식’을 갖게 했으며,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내가 나를 배반하는’, 즉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 팽배해지게 된 것입니다.”

홍 위원은 그렇기 때문에 사회구성원들의 의식화 기제로 작용하고 있는 언론과 교육제도에 대한 민중적·민주적 통제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학교의 군사주의와 ‘앞으로 나란히!’

홍 위원은 또, 이러한 ‘자발적 복종’은 근대식 학교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군국주의 일본에 의해 가속화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이 이 땅에 학교를 세운 이유는 식민지 출신 ‘마름’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였다”며 “그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너를 배반하라, 너의 민족적 관점을 배반하라’는 것을 강요받았으며, 자율성을 배제하고 군사문화를 장려한 일제의 교육제도가 해방 이후에 까지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앞으로 나란히’로 대표되는 사회구성원들에 대한 타율적 지배를 위한 구조가, 지시와 명령에 순응하고 자율성을 상실한 학생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며 “공교육 정상화는 올바른 인성교육 및 가치관 교육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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