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노조조직률 11.6%, 민주노총 조직률 4.3%, 2000년대에 들어 더 뚜렷해진 정규-비정규직간의 갈등과 시민사회에서의 주변화 속에서 한국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를 이루어낸 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중앙위원 겸 정책실장 은수미씨(41). 그가 지난 2월 <한국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유형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3월부터 한국노동연구원에서 부연구위원으로서 본격적인 연구자 생활을 시작했다.

80, 90년대 급진적 노동운동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은수미씨의 박사논문은 무엇이 ‘위기의 노동운동’으로 하여금 정치적 진입을 가능하게 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97년 감옥에서 나와 보게 된 노동운동 현실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은 박사는 연구를 시작하기 전 대기업 노동운동이나 정파갈등 등에서 ‘위기’를 실감하면서 문제의식을 발전시켰다.

은 박사는 지난 12일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서 주최한 노동포럼에 발제자로 참가해 석·박사과정 6년만에 출고한 이 논문 내용을 처음으로 노동계에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 박사의 지도교수도 “5번을 읽고나니 내용을 좀 알겠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1시간여 발제로 논문내용을 설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논문에서 사용된 핵심분석틀인 ‘연결망 분석’이 학계에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관계구조, 사회적 연대, 정치적 연대, 상징, 조직구조 등과 같은 개념은 일반인에게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자나 청중들 모두 노동계 토론에서 나오는 ‘주장’과 ‘정책과제’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으나, 은 박사의 논문엔 이같은 내용이 거의 없다. 박사논문에 ‘정책’을 담는게 ‘마이너스’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은 박사의 문제의식도 반영돼 있는 결과다.

은 박사는 다음날 노동연구원에서 기자를 만나 “연구자가 할 수 있는 최대지점은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연구자가 더 나갈 때 ‘감히 내가’라는 두려움이 들지만 한편으론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연구내용을 안 받아들이거나 추상적이라고 치부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은 박사가 한국노동연구원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주위 반응은 찬반 양론으로 나뉘었다. 이에 대해 은 박사는 “이론과 실천에서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브릿지’ 역할을 하고 싶었다"고 전제한 뒤, "그런 면에서 연구원이 적절한 곳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노동연구원은 "이론을 필요로 하면서 현실의 요구에 답해야 하는 곳이자 현장을 접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게 은 박사의 설명.

실제 은 박사는 12일 보건의료노조의 올해 첫 산별교섭 현장에 나가보기도 했다. 사노맹 사건으로 6년간의 수감생활과 6년간의 석·박사 학위과정으로 아주 오랜만에 '현장'을 접한 소감은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A를 이야기하면 A브랜드로 인식되는” 현재 노동판도 한국노동연구원을 택한 한 이유였다. 은 박사는 “난 오픈마인드로 이야기하고 있다"면서, "A를 이야기하면서도 B나 C나 D도 함께 생각하고 있는데 A를 이야기하면 A브랜드로 낙인찍히는 것 같다"고 답답해 했다. 특히 "사노맹 출신이라는 것으로 규정된 느낌”이라는 것.

연결망 분석이 1차 자료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보니 이번 논문은 자료수집에만 4년여가 걸렸다. 반면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부터 자정까지 집중적으로 써 집필기간은 6개월이 소요됐다.

은 박사는 1차 자료로 1983년부터 현재까지 활동한 조직 중 전국적 연합사건에 참여한 1,609개 조직의 결성선언문, 주요구성원, 강령, 조직체계 및 규약, 내부회의록, 보도자료, 정책보고서, 기관지 등을 활용했다. 자료수집 과정에 쏟아부은 돈만 2천만원 이상.

은 박사는 자료수집이 가장 어려웠다며 노동계가 역사가 될 수 있는 자료를 중요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는 노동계에서 ‘자료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여력이 없어 간직하지 못하는 탓이 크지만 자료를 스스로 폐기하게 만들었던 국가보안법 영향도 있다. 사노맹 같은 급진노동단체는 더 그러했다.

이와 관련 은 박사는 급진노동운동의 경험에 대한 성찰도 하고 있었다. “의회민주주의가 아닌 정치세력화 움직임은 대중적 동의를 못받고 이념이 대안적이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는 혁명적 건강성이 있었는데, 지금 흐름에 대해선 그 부분도 의문을 갖는다.”

은 박사는 모주간지와 인터뷰에서도 사노맹 활동의 오류를 인정한 바 있다. “점조직화된 지하활동이다보니 조직 내 인간적인 소통이 약했다. (…중략…) 소통이 없는 연대의 나약함을 고민하지 못한 것도 돌이켜 보면 잘못”이라고.

그러나 은 박사는 “급진적 노동운동은 노동운동 내에서 배제됐을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배제됐다. 급진적 노동운동이 과대평가되는 면도 있고 과소평가되는 면이 있는데 앞으로 이 부분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노동사회연구소 포럼에 토론자로 참여했던 김윤철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상징과 구조의 분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면서 "상징과 구조의 인과성이 뒷받침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김 실장의 문제제기는 “행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은 박사는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이후 빨리 논문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부분을 담지 못했으나 이 논문을 책으로 발간하자는 제안이 있어 책으로 낼 때 인과관계도 밝혀낼 예정”이라고 답했다. 은 박사의 이번 논문에는 '향후 과제'로 둔 문제들이 곳곳에 있었다.

김 실장은 “민주노동당이 원내진출 한 뒤 ‘상징정치’를 잘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며 인과성에 대한 연구를 재주문했다. “연구자가 제기한 명확한 현실을 보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연구자에게 문제제기를 다시 던지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은 박사에 말을 떠올리면, 바로 이런 ‘소통’이 비로소 은 박사의 역할에 의미를 부여할 듯 싶다.

은 박사는 앞으로 조만간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이 민주노총에 미친 영향’과 ‘사회적 교섭의 전제조건’ 등에 연구할 계획이라고 한다. 급진적 노동운동가에서 연구자로 돌아온 은 박사가 만들어갈 새로운 ‘역할모델’이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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