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민주노동당에서 벌어졌던 ‘비정규직 포스터’ 논쟁을 다시 끄집어내면 대다수 당활동가들은 당혹한 표정을 짓는다. 이미 ‘끝난 문제’라는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함께 만든 비정규직 철폐투쟁 홍보포스터는 ‘가족주의’와 ‘남성 이성애자 관점’이라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포스터는 한 남성이 여성의 어깨를 감싸고 벤치에 앉아 있는 뒷모습 사진 위로 "우리 정규직 되면 결혼하자. 비정규법 통과되면 큰일인데…"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사진>

진보매체에 근무하는 여성기자의 고백 하나

이 논쟁을 되짚어 보려는 이유는, 우선, 진보매체에 종사한다는 내 자신조차 이 포스터에 대한 문제제기에 동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스터를 만든 쪽을 비판하는 한 남성으로부터 “성인지적 태도가 부족해서 문제제기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말해 억울하기까지 했다.

지난달 26일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공개적으로 문제제기가 나오고 ‘포스터 문제’가 알려진 뒤, 네티즌들이 보인 반응 역시 기자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네티즌들은 "정규직 되면 결혼하자는 말은 현실을 잘 반영한 것"이라며, "포스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은 비정규 노동자의 심정을 잘 모른다"고 반박했던 것이다. '성'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비정규직'의 문제가 더 중요한데, 현실을 도외시한 '비대중적' 문제제기라는 소리였다.

게다가, 선전전술의 측면에서 볼 때 이 포스터는 구태의연한 투쟁구호가 아니라 약자(젊은 비정규직)가 일상에서 당하는 고통을 그렸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점수를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본격적인 취재가 시작되면서 기자의 생각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서 이 기사는 기자 개인의 반성문일 수도 있겠다.

또 하나 당혹스러웠던 대목은 이 문제제기에 대한 당과 민주노총 안팎의 반응이었다. 민주노동당 비정규운동본부와 민주노총 상임집행위원회가 이 포스터를 폐기하기로 결정한 뒤, 노동계 안팎의 활동가들에게 폐기와 논쟁 종결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을라치면 "과도한 것 아니었냐"며 고개부터 설레설레 흔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반성을 공유한다기보다는 '덮자'는 이야기다. 실제로 당과 민주노총은 너무나 빨리 그리고 너무나 쉽게 이 문제를 종결지었다. 포스터를 폐기해서 포스터 문제는 해결됐지만, 포스터로 드러난 진보세력의 성에 대한 편견과 무지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너무나 쉽게, 너무나 빨리 종결되다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와 성소수자위원회는 지난달 29일과 30일 각각 논평을 발표해 이 포스터의 문제를 짚었다.

논평은 이 포스터가 결혼과 성별 분업을 둘러싼 잘못된 관행과 고정관념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결혼의 주체를 남성과 여성으로 표현함으로써 결혼의사가 없는 비혼자(非婚者), 성소수자 등 다양한 가족형태의 구성원을 타자화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에서 비정규직 양산의 타깃은 기혼여성이고 비정규 노동자의 70%가 여성임에도, 포스터는 여성을 결혼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모습으로 묘사해 남성이 생계부양자이며 여성이 피부양자라는 성별분업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노출시켰다는 것이다.

이 지적에 따라 민주노동당 비정규운동본부는 지난달 29일 포스터 배포 중지와 폐기를 선언했다. 민주노총도 민주노동당 결정의 영향을 받아 지난 6일 상집회의에서 폐기를 결정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몇가지 문제점이 지적된다.

먼저, 당은 이 포스터를 민주노총과 함께 만들었음에도 폐기는 혼자 결정했다. 민주노총은 며칠 뒤에 잡혀 있던 여성위원회 회의에 앞서 상집회의에서 논란을 종결지었다.

포스터 제작을 담당한 황혜원 민주노총 선전국장은 이 과정에 대해 “문제제기가 되고 곧 폐기가 결정되면서 담당자조차도 고민할 기회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결정을 빨리한 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앗 뜨거워라'는 식으로 문제를 덮는 것은 바람직한 문화가 아니다. 포스터 배포를 중단하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당과 조합의 활동가들이 참여시켰는가 하는 문제다. 정리는 했지만 토론은 없었다.

이는 ‘성’과 관련한 논쟁에서 남성 활동가들이 ‘침묵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관행도 한몫 했다. 실제 민주노총 상집위원 중 “폐기할 만큼의 문제는 아니다”고 주장했던 사람도 ‘폐기’ 결정과정에서 반박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물론 “처음에 볼 때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지만 문제제기 이후 포스터에 대한 비판에 공감했다”는 것도 조속한 처리의 배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시민들에게 ‘포스터 논란’이 공개된 마당에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성인지적 태도’에 대한 대중적 인식 확산보다 ‘포스터 처리’에 더 관심이 가 있었다면 곤란하지 않을까.

‘성인지적 관점’이란?

포스터가 제작·공개된 직후 가장 먼저 문제제기를 했던 김원정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은 “시민용 포스터였기 때문에 폐기를 강하게 요구했다”며 “우리의 '한계'를 보여주는 선전물이었고 실제 배포됐을 경우 여성단체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연구원은 “민주노동당이 소수자의 감성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라면 다양한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을 일상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성주의 문화웹진 언니네(http://www.unninet.co.kr/), 인권운동사랑방은 각각 지난 8일 이 ‘포스터’가 담고 있는 ‘이성애 가족주의’를 비판했다.

가족주의는 집단으로서의 가족을 개개의 가족성원보다 중시하고, 가족적 인간관계를 가족 이외의 사회관계에까지 확대적용하려는 주의로, 여성계는 가족주의가 가부장적 사고를 확산시키고 다양한 가족관계에 대한 배타성을 갖는다며 가족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대중성' 내세워 '소수자'에 대한 일상 배려 소홀하면 안 돼

이와 관련, 김미정 민주노총 여성국장은 “성인지적 태도는 성정체성 문제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며 "우리 사회에서 ‘진보’를 말하기 위해선 아직 많은 문제에 대해 예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양성을 인정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성인지적 태도도 ‘노동자’라는 말이 익숙치 않았던 시기에 노동운동가들이 ‘근로자’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과 같은 이유라고 보면 된다. 과도기가 지나면 자연스러워지겠지만 많은 문제들에서 더욱 긴장하고 예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번 사건이 보여줬다.” 김 국장의 설명이다.

‘대중성’을 내세워 ‘소수자’에 대한 일상의 배려를 소홀히 한다면 차별은 당연시된다는 이들의 설명을 들으며 그제서야 ‘폐기’를 주장했던 그들의 문제의식이 기자에게도 흡수되는 것을 느꼈다. 포스터에서 "정규직 되면 결혼하자"는 말을 남성이 하지 않고 여성이 했다고 생각하면 별 문제 없지 않냐고 생각했던 기자의 '짧음'은 바로 이같은 ‘성인지적 관점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기자의 ‘깨달음’만으로는 아직 부족한 듯하다. 기자 주변엔 여전히 “문제의식은 한번 생각해볼 만했지만 폐기까지 결정한 것은 너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다.

민주노동당의 한 남성 중앙위원은 “여성문제는 그 어떤 평등문제보다도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여성문제만 중심으로 놓고 보면 문제가 심화될 수 있으니 지금은 단계론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포스터 제작·배포과정에 '차별관행' 배제하는 장치 마련해야

성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를 ‘차별’로 보기보다 ‘여성’ 문제로 축소시켜 보는 것이다. 이는 여성들이 포스터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번 논쟁에선 시간이 부족했던 이유가 큰 탓이다.

김원정 연구원은 “홍보든 정책이든 활동가들이 성인지적 관점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며 “성평등 교육에서도 성인지적 관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논쟁이 다시 한번 일깨워준 진보진영의 숙제인 셈이다.

한편 황혜원 선전국장은 “앞으로 선전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을 검토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검토해봐야 한다”고 말해 다른 차원의 조치도 이뤄질지 주목된다. 왜냐하면 민주노총이 제작한 포스터가 성인지적 관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비판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99년 노동절 포스터도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여성, 성소수자 뿐만 아니라 장애인, 농민, 빈민 등 사회적 약자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포스터의 핵심 수요자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포스터 배포에 앞서 ‘차별 메시지’를 배제하는 게 중요한 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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