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출(학생출신 노동운동가)들이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자기들 존재의 이익을 위해 대중조직 지도자를 타격한 것이다.” “지금 현장조직들은 자기들이 열심히 하니까 ‘조합원들은 당연히 나를 찍어야 한다’는 교만함까지 보인다.” “지금 현장조직을 종파주의라 서로 비판하지만 심하게 얘기하면 조폭보다도 못하다. 의리도 예의도 없기 때문이다.”

11일 성공회대 민주사회교육원 주최의 ‘노동대학’ 강의에 참석한 오종쇄 전 금속산업연맹 부위원장은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과의 대담에서 민주노조운동 진영에 가차 없는 ‘메스’를 들이댔다.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이원보 이사장의 간략한 발제에 이어 진행된 대담에서 오종쇄 전 부위원장은 7, 8월 투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현대엔진노조(현 현대중공업노조) 결성 과정과 이후 울산지역 투쟁을 중심으로 뒷 얘기들을 소개했다.

오종쇄(46) 전 부위원장은 소위 ‘노동운동 1세대’로 불린다. 60년 울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 후 중소기업에서 기능선반공으로 일하다 현대엔진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던 평범한 인물 오종쇄. 그는 장청(장로교 청년회) 교육을 통해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현대엔진 노조결성과 이후 신화적인 골리앗 투쟁 등을 이끌며 노동운동의 중심에 섰던 인물. ‘권·오·사’는 87년 당시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핵심인 권용목, 오종쇄, 사용훈 세 사람의 성을 딴 말. 현재 오 부위원장은 2000년 현대중공업에 복귀해 현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복귀하자마자 산재(손가락 절단)를 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지난해 금속산업연맹에서 제명된 현중노조 사람으로서 자격지심도 클 터. 그는 대담에 앞서 “나와 현대중공업을 닮지 말고, 실패하지 말았으면 해서 (강의에) 왔다”고 심정을 털어놨다. 


“운동권이 노동운동을 망쳤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서막은 울산에서 터져 올랐다. 당시 학생운동 세력이 대거 노동운동 현장에 결합하면서 충분히(?) 준비했던 지역인 서울, 인천이 아닌 울산에서 폭발적인 투쟁이 벌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원보 이사장의 질문에 오 전 부위원장은 “경인지역은 야학 등 지식인들의 현장 활동이 많았다. 하지만 울산은 당시 현장간부들 중심으로 기획을 잡고 투쟁을 이어나갔다. 학생, 지식인들의 활동은 미약했고, 투쟁의 흐름을 주도하지는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원보 이사장은 “울산은 87년 노동자투쟁을 주도했고, 이후 골리앗 투쟁 등 폭발적인 투쟁에는 강한 현장조직이 배경이다. 이후 현중노조는 쇠락했지만 현중노조의 사례를 보면 현장조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사점을 던져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질문했다.

“87년 이전 현장의 인간관계라는 것은 동문, 학연, 혈연, 지연으로 얽혀 있었고, 현장조직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하지만 90년 골리앗 투쟁을 전후해서 학출 노동운동가와 외곽단체의 지원이 늘어나고 NL, PD 등으로 인간관계도 목적의식적으로 분화하게 됐다.”

당시 사상투쟁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는 오 전 부위원장은 학출이 노동운동에 끼친 폐해를 “운동권이 망쳤다”는 한마디 말로 정리했다. 이유는 이랬다.

“학출들이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자기들 존재의 이익을 위해 대중조직 지도자를 타격한 것이다. ‘투쟁 1세대는 물러나라!’는 것이었는데, 사상학습이 안됐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현장대중이 지도자를 따르는 것은 인간관계가 우선이지 ‘사상’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투쟁1세대) 열심히 싸우고, 감옥에 간 죄밖에 없다. 뭐가 잘못됐나.”

선거 때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현장조직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컸다. 오 전 부위원장은 “망해버린 현중노조도 현장조직이 10여개나 된다. 지금 현장조직을 종파주의라 서로 비판하지만 심하게 얘기하면 조폭보다도 못하다. 의리도 예의도 없기 때문”이라면서 “자파의 선거를 도와주면 ‘민주파’고 그렇지 않으면 ‘어용’이 된다. 어제까지 어용으로 규정하다가 오늘은 버젓이 민주파라고 부르는 것이 나는 수용이 안 된다”고 말했다.

오 전 부위원장은 작정한 듯 더욱 신랄하게 현장조직을 비판했다. “지금 현장조직들은 자기들이 열심히 하니까 ‘조합원들은 나를 당연히 찍어야 한다’는 교만함까지 보인다”며 “상대방을 인정하고 통일, 단결해야지 자신을 중심으로 왼쪽은 좌파요, 오른쪽은 우파라는 규정에 서로들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했다.

“현중 대의원 230여명 가운데 민주파는 2~3명밖에 없다. 그런데 회사탄압 핑계를 댄다. 자본의 노동탄압은 예나 지금이나 기본 아닌가.” 오종쇄 전 부위원장의 노조 내부문제에 대한 지적이 계속되자, 이원보 이사장은 “노조가 대응을 잘못했더라도 자본쪽의 공세가 대단히 집요하고 치밀하게 이뤄지지 않았냐”고 반문했다. 


“변하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

이에 대해 오 전 부위원장은 “변하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No Change No Future)는 말은 회사가 노조간부들한테 전해주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며 “적으로부터 배우자”고 강조했다.

그는 또 “회사 중역들은 영어, 컴퓨터 등 개인 업무능력 향상은 물론 외주, 조합원 관리에 철저하다. 아내는 물론 심지어 장인어른 생일까지 챙겨주는 통에 나중에는 온 집안 식구들이 나를 공격합디다”고 소개했다.

그는 아울러 “그런데 활동가들은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사고로 끼리끼리 어울리며 배타적이다. 조합원들로부터 너 같은 놈이 노조간부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조합원들에게 비빌 언덕이 돼줘야 하지 않나”라고 덧붙였다.

노동운동의 위기논쟁이 치열한 것과 관련 오 전 부위원장은 “일찍 터져야 될 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크기로 다가와 노동운동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기도 한다”며 “노사관계는 물과 기름의 관계이다. 단지 (기름이) 물 위에 뜨는 시점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노란 조직(회사서 양주 대접받는 노조) 얘기도 있는데 먹었으면 먹었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솔직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솔직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위기”라고 강조했다.

오 전 부위원장은 아울러 “조합비만 내고 임금, 산재 버튼 누르면 다 해결되고, (조합원들이) ‘이것 물어 와’하면 노조는 사냥개, 똥개가 돼버리는 상황”이라며 ‘자판기노조’가 돼버린 현중노조와 민주노조 진영의 문제를 지적했다.

현중노조의 현장이 무너질 때는 조합원들 돈 따주고(임금인상), 노조간부들 서로가 욕하고, 우리만 손해 봤다는 인식이 팽배했다는 설명이었다. 오 전 부위원장은 그러나 “그런데도 현장조직 활동을 잘해야 하고, 정말 내가 주인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는 물음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성공과 실패는 언제나 있는 일, 일희일비에 초월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대담에서는 또 2000년 이후 현중 현장에는 ‘과일나무에 빨대를 꽂아 단물을 빨아먹는 해고자들’ 모습이 담긴 사측 홍보물이 나돌았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던 얘기. 역전의 용사들인 민주노조 운동가들은 점점 (민주노조를) 올라가지 못할 나무로 생각하고 내가 어찌 활동가가 되냐는 자조 섞인 한숨 얘기 등 구체적인 사례들이 소개됐다.

오 부위원장은 극복과제도 제시했다. “자기들끼리 휴가가고 될 법한 이야기인가. 활동가들은 조합원의 변화된 상황과 정서를 잘 읽어야 한다. 현중 정규직 노동자 평균연령은 40대 중반이에요. 다들 고등학생, 대학생 학부형들이고, 교육비만 100여만원씩 부담하고 있는 상황인데 무조건 파업하자고만 해서는 안 될 일이죠.” 

“노조운영, 민주주의 관철 중요하다”

민주주의 학교인 노조의 운영에서 민주주의 관철의 중요성도 지적됐다. 오 전 부위원장은 “입장을 가지되 올바름을 견지하고, 주의를 가지되 아집과 고집에 빠져선 안 된다. ‘정파’라는 사조직이 공조직을 지배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공조직과 대의기구가 중시돼야 한다. 골방에서 내린 결정사항을 회의에서 관철하려는 것은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이밖에 오 전 부위원장은 각 노조의 회의문화와 월급 지급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시도 때도 끝도 없이 회의를 하지만 노조회의가 30분~1시간 늦는 것은 예사이다. 또 안 온 사람은 그냥 두고서 제 시간에 온 사람들 앞에서는 안 온 사람들 뭐라고 하면 안 되죠. 회의 마치는 시간을 정해놓는 금속산업연맹의 똑소리 나는 회의하나는 배우면서 풍토를 바꿔야 한다.”

활동가들에 대한 월급 실비지급과 관련해서 그는 “현장노동자들은 오전 8시에 출근하는데, 활동가들은 오전 11시나 돼서야 출근하는 게 다반사이다. 전날 이런저런 이유로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신 것”이라며 “조합원들은 할 말이 있어도 활동가들이 돈도 적게 받고 희생하니까 미안해서 말을 못 꺼내요. 이래서야 기강이 잡히질 않죠”라고 말했다.

이원보 이사장은 대담을 마치며 “오늘 우리는 고고한 철학 얘기가 아닌 노동운동가의 구체적인 현장 활동 경험에서 우러난 소중한 얘기들을 들었다”며 “향후 운동의 지향을 스스로 살피고, 추려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을 맺었다.

질풍노도와도 같은 한편의 장대한 ‘서사시’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성공회대 ‘노동대학’에서 지난 주 ‘70~80년대 노동운동’ 강의에 이어 11일 저녁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민주노조운동’을 주제로 강연했다.


이원보 이사장은 강연에서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운동의 분수령을 이뤘고, 6.29 선언이후 잦아들었던 투쟁의 불길을 당긴 최대 규모의 대중적 항쟁이었다”며 “7월 이후 약 3개월 동안 3,400여건의 파업이 있었는데, 이는 그 이전 100년을 합한 것보다 많은 투쟁건수였다”고 소개했다.


이 이사장은 또 “당시 민주노조운동의 발전경로는 3가지 였는데, 대기업 재벌 그룹사 중심의 ‘연대회의’, 병원 사무금융 등의 ‘업종회의’, 90년도 중앙조직으로서 ‘전노협’ 등이었다”며 “이들 지역·업종·그룹 별 연대조직들은 95년 11월 마침내 민주노총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아울러 “민주노총의 건설과 함께 투쟁의 고양과 전략전술의 발전도 이뤘다”며 “투쟁역량의 확대, 노조 주도하에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투쟁 전개, 지역 산업 그룹별 연대투쟁 확산,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 국가권력과 대항한 완강하고 격렬한 투쟁의 전개가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이 이사장은 이와 함께 “IMF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임금 동결과 삭감, 단협 파기 등 정권과 자본의 유연화 전략에 밀리며 수세적이고 방어적 기조로 돌아서게 되었다”며 “이제 깃발만 들면 되던 예전과는 달리 현장을 재차 장악하고 노동운동 이념도 재정립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골리앗의 신화 그러나 무너진 노조
노동대학 수강 노조간부들 표정에는 만감 교차
90년 골리앗 투쟁으로 대변되는 노동운동의 신화 현대중공업노조. 그 현장의 투쟁1세대인 오종쇄 전 금속연맹 부위원장의 생생한 얘기에 귀를 쫑긋 세우며 듣고 있던 학생들(각 노조 간부들)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강력하고도 위대한 투쟁을 일구었던 노조가 하루아침에 어용노조로 바뀌게 되고, 지난해 금속연맹에서 제명당하는 사태까지 오게 된 것 때문이리라. 강의가 끝난 뒤 농협노조에서 온 한 수강생은 오종쇄 전 금속연맹 부위원장을 찾아와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표하며 차후 강연을 부탁하는 등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치유되지 못한 상처에 대한 회복은 가능한 지’,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의문을 던지는 분위기였다.


한 수강생은 강의와 대담이 끝나고 “과연 현중노조의 민주화는 불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또 다른 수강생은 “중요한 현장경험 얘기를 들었지만 막상 성공과 실패의 교훈이 딱 집히는 게 없다”며 답답해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했던가. 대다수 노조활동 경력이 일천한 수강생들에게 70~80년대, 그리고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안아오는 과제는 쉽지 않은 과제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지난주 이원보 이사장의 강의를 들은 이주노동자 아웅틴툰(미얀마)은 분임토의에서 “한국의 이주노동자의 처지가 70년대 당하는 한국노동자의 상황과 비슷하다”며 “자기 자존심 때문에 서로 반목하고 단결하지 못하는 부분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그는 또 “70~80년대 시절보다 ‘현재 운동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된다”면서 “하지만 교육과 토론을 하면서 활동가들이 새롭게 양성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앞으로 노동운동을 짊어지고 나갈 일꾼들인 학생들. 현대중공업 노조의 성공과 실패의 뒤안길. 냉탕과 온탕을 경험한 한 노동운동가의 20여년 전 얘기를 ‘반면교사’로 삼아 위기의 노동운동을 기회로 잡을 몫은 온전히 그들에게 달려있는 듯 했다. 학생들은 저녁 늦은 시간까지 분임토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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