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이 운다>는 ‘화해’의 영화다. 더 이상 비참하기도 힘든, 인생의 막장까지 간 두 남자가 세상에 미소를 보내기 위해 권투는 ‘핑계’이자 ‘필연’이다. 동시에 이 영화는 ‘위로’의 영화다. 때린 사람의 것도 맞는 사람의 것도 그들의 주먹은 나에 대한 혹은 상대에 대한 상처를 감싸주거나 달래주는 따뜻한 손길이다.

더 이상 이 사회는 ‘맨 주먹’이 권력이 아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속설처럼, 주먹은 어떠한 제도와 규범에도 호소할 수 없는, 그야말로 가진 건 달랑 주먹밖에 없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방어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부와 권력이 없는 사람이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강한 주먹을 가졌다는 것은 사실 유용하지 않다. 원래 이 사회에서는 거대한 폭력에는 관대하지만 맨 주먹이 저지른 폭력의 대가는 혹독하기 마련이다.

<주먹이 운다>는 오로지 주먹만 믿고 살아오던 두 남자 강태식(최민식 분)과 유상환(유승범 분)이 링 위에서 주먹을 다스리게 되기까지 이야기를 교차 편집을 통해 박진감 있게 그리고 있다. 영화 내내 한 번도 만나지 않는 두 인물이 ‘신인왕 타이틀전’에 올라가기까지, 그들의 인생은 이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 할 각자의 이유를 절절하게 설명한다.

태식은 길거리 한 복판에서 ‘단 돈 만원으로 인간 샌드백이 되어 맞아주기 사업’을 한다.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딸 정도로 잘 나가는 복서였지만, 연이어 사업에 실패하고 아끼는 선후배들한테 돈까지 떼이면서 가정마저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비참한 신세가 됐다. 가진 것이라고는 날렸던 두 주먹뿐. 재기의 몸부림을 치며 “강태식 안죽었어”를 반복하지만 그는 결국, “‘가오’가 밥 먹여 주냐”며 거리의 복서로 나서게 된다.

그러나 얻어맞으며 번 돈은 여전히 후배에게 사기당하고 빚쟁이에게 털리고 있고, 그 사이 아내에게는 새 남자가 생겼다. 유일한 희망인 어린 아들은 무식한 복서 출신의 아빠를 창피해 한다. 더 이상 물러 설 곳도, 잃을 것도 없는 인생 막장의 42살 늙은 복서 태식은 다시금 희망을 품고 신인왕전 출전을 결심한다.

상환은 자동차에서 오디오를 몰래 훔치고, 아이들의 돈을 삥 뜯어서 생활하는 19살 양아치다. 어쩌다 애들을 심하게 손봐주는 바람에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네 일수장이의 가방을 털려다 소년원에 들어간다. 어차피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없었던 상환은 아버지에게 “어차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데 입 하나 던 셈 치자”고 말할 정도로 그저 담담했다.

그러나 수감생과의 격투 도중 교도관의 눈에 들어 시작한 권투는 그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한다. 주먹을 휘두를 줄만 알았지 다스릴 줄 몰랐던 그는 권투를 하면서 ‘쪽팔림’을 경험하고 권투에 대한 오기가 발동한다. 그러던 중 공사판에서 막일 하던 아버지가 사고로 죽고 연이어 남은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마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상환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을 씻어내기 위해 역시 신인왕 타이틀을 준비한다.

최초의 승자가 되기 위한 최고의 권투경기

이렇게 각자 인생의 사연을 안고 링 위에 올라와 두 주인공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면해 펼치는 대결은 감동 그 자체다. 액션을 잘 찍기로 소문난 유승완 감독의 권투 장면은 그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세상을 놀라게 했던 리얼 액션 스타일을 압도한다. 주인공의 시선과 일치시키면서 들고 찍고 흔들고 찍은 핸드핼드 기법은 경기장에서 온갖 인생 역정 끝에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는 두 인물의 심리상태를 속도감 있게 실감나게 표현한다.


거기에 더해 <올드보이> ‘장도리 결투’에서 진가를 발휘했던 최민식의 연기는 역시 이 영화에서도 가장 진지하고도 사실적인 권투 경기 장면을 연출하다. 거기다 시종일관 독기어린 눈빛을 잃지 않고 최민식의 주먹을 받는 ‘타고난 배우’ 유승범은 불혹의 나이 최민식의 투혼에 경쟁이라도 하듯, 이 결투 장면에 특유의 반항적이고 힘 있는 카리스마를 온 몸으로 뿜어낸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이 경기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록키>나 <챔프>, 혹은 유오성 주연의 영화 <챔피언>에서도 관객이 이기기를 바라는 대상은 한 명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이겨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가진 사람도 주인공 하나다. 그러나 결승까지 올라온 상대편이라고 어찌 사연이 없겠는가. 국수집 주인 최 사장이 태식에게 “세상에 사연 있는 사람이 너 뿐이냐. 이제 겨우 마흔밖에 안 된 주제에…”라고 하는 말처럼 말이다.

권투 경기뿐 아니라 인생의 모든 대결에 임한 사람들은 오직 자신만이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가장 절실하고 정당하다고 믿는다. 대결 장소에 선 상대편이 어떤 생각과 이유를 가지고 있든 나의 그것보다는 하찮을 것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이 영화의 태식과 승환처럼, 어떤 대립관계에서든 승자와 패자는 있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승패는 아닐 것이다. 우리사회의 모든 대립은, 그것이 빈부 격차에 의한 대립이든, 노사 간의 대립이든, 노노 간의 대립이든 상대의 절박성과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승자는 한명 혹은 한 부류여야 한다는 강박증과 몸에 배인 비뚤어진 경쟁논리로부터 비롯되는 것 같다. 태식을 괴롭히던 조폭 후배, 상환을 질투하던 소년원 동료가 그들의 멋진 경기에 눈물을 흘리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래도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늘 스타일이 변하기는 했지만, 유승완 감독의 전작들이 보여줬던 통쾌한 액션, 박진감 있는 줄거리, 화려한 테크닉을 원하는 관객이라면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닐 것 같다. 순수 스포츠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 만큼 내용은 매우 차분하고 게다가 지나치게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4월1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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