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내를 숨긴 채 그럴듯한 이유를 둘러대면 언제든 들통 나게 마련이다. 14일 경총을 비롯한 사용자단체들의 행태가 그랬다.

경총은 14일 올해 임금 인상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1천인 이상 대기업 사업장에는 ‘동결’을, 그 외 사업장에는 3.9% 인상을 하라고 권고했다. 경총 회원사에는 이날 이 같은 내용이 담긴 ‘2005년 경영계 임금조정 기본방향’이란 지침서가 전달됐다. 경총은 이 지침서에서 “대기업 임금을 동결해 비정규직 근로자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신규 인력 채용을 늘리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실 이 같은 경총의 지침은 전혀 낯선 주장이 아니다. 노동계가 극심한 저임금과 차별 등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대한 시정을 요구할 때마다 정부와 재계는 늘 정규직 노동자들의 직무급 고임금과 고용 경직성을 문제 삼았다. 다시 말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보호를 위해서는 대기업 정규직이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사회에서는 기업 규모나 고용형태에 따른 소득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노동시장의 양극화 문제가 심각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따라서, 사용자뿐 아니라 대기업 노조도 함께 변화하는 국내 산업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고 연대임금을 구축하는 등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대안을 고민해야 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경총의 ‘대기업 임금동결’ 지침은, 이 단체가 내세웠던 명분인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것이 아님이 금방 들통나고 말았다. 이날 오전 경총이 임금 지침을 발표하자마자, 같은 날 오후 전경련·경총 등 5개 사용자단체들로 구성된 경제단체협의회(경단협)의 ‘2005년 단체협약 체결 지침’이 연이어 ‘유포’된 것이다.
 
이 지침서에서 경단협은 2007년부터 노조전임자 급여지급금지 법률이 시행됨에 따라 노조전임자 급여지급금지를 단협에 명시토록 요청했다. 여기까지는 개정되는 법률에 대한 혼선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침서에는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대해 단체교섭을 요구하는 것도 배제하도록 돼 있다. 또 사회공헌기금, 노동연대기금 등 각종 사회기금 조성과 관련한 노동계의 요구도 법적근거가 없기 때문에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임금격차를 줄이기 위해 대기업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을 동결하라고 하면서도, 노조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교섭 요구를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회사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을 위해 기금을 내놓는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도 하니, 노동자들에게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뿐만이 아니다.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폐지에 대해서는 그토록 서두르면서, 2007년에 그와 동시에 폐지되기로 돼 있는 복수노조 금지 조항에 대해서는 여전히 ‘복수노조 불인정’ 입장을 재확인하고 있다. 한국통신계약직노조·워커힐호텔 명월관노조 등 수많은 비정규직 노조들이 복수노조 금지조항으로 인해 노조 설립 반려 등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아왔는지 알고나 있는 것일까.

경총측도 단체협상 지침이 동시에 알려진 것에 대해 당황해 하고 있다. 경총 관계자는 “애초 임금가이드라인만 언론에 공개하고 단협 지침은 지난해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에 내부용으로만 사용하려 했다”며 “경단협 총회에서 경제지 출입기자가 자료를 입수하고 여과없이 보내면서 문제가 된 것 같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비정규직 관련 교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원칙이지만, 복지나 임금 등과 관련 논의는 지금도 하고 있다. 다만, 정규직화 요구 등 인사권 관련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전, 오후 그 짧은 시간차를 두고 하루 사이에 알려진 이 같은 ‘속 보이는’ 지침들은,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의제화 하려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엊는 것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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