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난 전혀 착하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생각. 뭐, 그건,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반드시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추구하고 나아가 ‘조국과 민족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교육을 지난 30년간 학교 안팎에서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또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선과 악의 끊임없는 유혹 속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 ‘선(善)’을 유지하고 사는 것은 사실 ‘두려움’ 때문인 것 같다. 왜냐하면 철저하게 나쁜 사람은 철저하게 외롭기 때문이다. 타인들 속에서 완전히 고립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면 절대 완벽하게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
 

 
개성 있는 캐릭터, 객관적인 시선
 
재일한국인 출신 최양일 감독의 영화 <피와 뼈>는 그 누구의 시선도, 심지어 가족조차도 아랑곳 하지 않고 폭력과 섹스, 그리고 돈만을 탐닉하며 제멋대로 한 평생을 살아간, 진짜로, 심하게, 해도 해도 너무 나쁜 남자의 이야기다.
 
1923년 제주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향하는 배 위에 해맑은 인상을 가진 제주도 청년 김준평(기타노 다케시)이 있다. 일본 땅에 발을 디딘 그는 오사카에 정착해 이영희(스즈키 교카)라는 여자를 강제로 강간해 결혼하고 가족을 이룬다.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이 땅에서 그는 남의 집 땅에 어묵공장을 차려 돈을 벌고, 어느 틈에 주변에 형성된 한인촌 마을에서 폭력과 착취를 일삼는 냉혹한 권력자가 된다. 세월이 갈수록 그는 더욱 포악한 가장이 되고, 공장 직원들을 학대하며, 끊임없이 여자를 탐하는 못 말릴 ‘괴물’로 변한다.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는 매우 불편한 영화다. 화면 자체는 매우 직설적인데도 시종일관 친절한 설명 없이 관찰자적인 시선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김준평은 세상에 둘도 없는 악당인데 그가 왜 악당이 됐는가를 알려주지 않는다. 더 이상 폭력적이고 몰인정하고 냉혹  할 수 없을 것 같은 인물을 세밀하지만 차분하게 묘사함으로써 관객이 그를 동정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게 만든다. “그래, 이렇게 나쁜 놈이 있다. 기분이 어때?” 하고 물어 볼 뿐이다.
 

 
보통 영화 속 악인들의 캐릭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단순히 악행을 저지르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경우 그의 악행은 너무나 충만한 주인공의 정의감을 드러내기 위해 배치하는 일종의 ‘장치’에 불과하며 별다른 이유는 없다. 원래부터 악당이었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관객에게 구한 후 행해지는 악행이다. 때문에 왜 폭탄을 장치하는지, 왜 멀쩡히 잘 지내고 있는 연인들 사이를 훼방 놓는지, 왜 주인공을 배신할 만큼 심약한지는 알 필요가 없다. 그냥 늘 보아오던, 영화 속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악당들이니까.
 
두 번째 경우는 악인이 주인공이거나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다. 이때 악당들의 특징은 비중이 있는 만큼 어느 정도 이야기가 전개되면 반드시 그가 악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드러난다. 비운한 가정환경에서 자랐거나, 누군가에 의해서 조정을 받고 있었거나, 사랑 때문에 어쩔 수 없었거나···. 즉, 악인들의 시선으로 카메라를 환기시킴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지게 만든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인 김준평은 그동안 봐 왔던 악인과는 차원이 다르다. 영화는 철저하게 김준평의 입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편이 돼 주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후에야 관객들은 다시 궁금해 한다. 왜 이토록 ‘나쁜 남자’가 됐을까? 물론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아들에게마저 잔인하게 폭력을 휘두르고, 좀 쉬게 해달라는 공장 직원의 얼굴에 벌건 석탄을 짓이겨 화상을 입히고, 구더기 꼬인 고기를 먹어가며 정력을 유지하려는 그의 표정과 몸짓에서 치를 떨기 보다는 어떤 서글픔 같은 것을 느낀다. 물론 영화가 끝난 후에····.
 
어쩌면 원대한 꿈을 안고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너 일본행을 택한 이 순박한 조선인 청년은, 냉혹하던 그 시절에 두 주먹만 가지고 폭정을 휘두를 수 있는 자신만의 한인촌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는지 모른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감독으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는 기타노 다케시의 놀라운 연기력이다. 그가 없었다면 절대 김준평이라는 인물이 이처럼 설득력을 가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일찍이 어떤 영화에서도 보기 어려운 개성 있고 문제적인 인물의 일대기를 연기한 그는 마치 영화 속 인물과 동일하게 늙어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재일 한국인 1세대 사회에 대한 매우 세밀한 묘사이다. 실화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원작 소설가, 감독, 시나리오 작가가 모두 재일 한국인으로 6년간의 시나리오 작업과 고증을 거쳐 완성됐다. 다만, 등장인물들이 이민 1세대들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대사가 지나치게 어눌하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다. 2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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