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재능노조 정종태 전위원장 위암투병 중 오늘 17시30분 운명
 
유난히도 긴, 달콤한 설 연휴를 한창 즐기고 있던 지난 10일 오후, 경쾌한 신호음과 함께 ‘갑작스레’ 날아든 휴대폰 문자메시지는 잠시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열흘도 채 되지 않았다. 그와 전화 통화를 한 것은.
 
“괜찮아요. 좋아지겠죠. 새해 복 많이 받아요. 김 기자도 새해에는 좋은 일만 있고···.”
 
너무나 밝게 말하던 그가 그리도 빨리 숨을 거둘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기나긴 투쟁과정에서 얻은 병마, 끝내 이기지 못하고
 
“종태는 늘 그랬어요. 주변 사람들이 잔뜩 걱정을 짊어지고 찾아가면, 병든 몸을 하고도 오히려 씩씩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 걱정까지 덜어주는 그런 사람이었요. 아픈 사람 찾아갔다가 우리들이 되려 안심하고 돌아왔는걸요. 그렇게, 마지막까지 주변 사람들 챙기다, 그렇게 간 거죠.”
 
11일, 빈소가 마련된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만난 애니메이션노조 유재운 위원장은 이렇게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살려는 의지가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늘 다시 일어나겠다고 말했으니까. 의사도 원래 3개월 정도 더 살 것이라고 했는데, 6개월 앓다가 갔잖아요. 끝내 의지가 병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마지막까지 열심히 살다가 간 거라고 생각해요.”
 
옆 자리에 있던 홍준표 전 한국통신계약직노조 위원장도 이렇게 말하며 술잔을 넘겼다.
 
설 연휴 기간이었지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들은 재능교육교사노조 조합원들, 비정규직노조·민주노총 관계자들, 학교 선후배 등 그의 지인들은 서둘러 고향에서 올라와 빈소를 지켰다.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모두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어서인지 빈소 분위기는 차분했다. 그의 죽음을 받아들인 지인들은, 겨우 40살 나이에 아깝게 간 정 위원장의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도, 지난 5년간 비정규노조 운동을 하며 하루도 편치 않았을 그 ‘무거운 짐’을 훌훌 벗어던지고 편히 쉬기를 바랐다.
 
지난 99년 재능교육에 학습지교사로 입사한 정 위원장은, 그해 쟁의부장을 맡아 비정규직 특수고용노동자들로서는 최초의 노동조합(재능교육교사노조) 설립을 주도한 바 있다. 재능교사노조는 비정규직 노조운동의 최초의 도화선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립사업자로 분류돼 4대보험은 물론, 근로기준법 적용조차 받지 못하고 있던 학습지교사들로 설립된 재능교육교사노조는, 지난 2000년 역시 비정규직노조로는 최초로 한달이 넘는 파업을 진행, 임단협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업 이후, 회사는 파업 당시의 손해 배상액으로 노조 조합비와 노조 간부의 급여를 가압류하는 등 공세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한층 더 강경해진 회사 측 태도에 노조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당시만 해도 4,700명이 넘는 조합원 숫자가 수백 명 정도로 줄어들었고, 가압류 때문에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상당수 노조 간부들마저 노조를 떠나고 말았다. 이들 중에는 전임 위원장들까지 있었다.
 
그러나 정종태 전 위원장은 전임 위원장이 손을 털고 나간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 2001년 3기 위원장에 당선돼 2003년 10월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다른 간부들과 함께 재능교육교사노조를 지켰다.
 
사용자들이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아 교섭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는 특수고용노조를 지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3년여를 끌어온, 끝이 보이지 않는 임단협 교섭을 위해 삭발, 단식, 천막농성… 안해 본 것이 없었다. 특히 지난 2002년 겨울, 정 위원장은 ‘손배·가압류 철회’를 요구하며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 20일이 넘는 기간 동안 차가운 천막 안에서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다.
 
위원장 임기를 마치고도 현장에 복귀해 노조 대의원으로서 다시 조직 활동을 하겠다고 결심한 정 위원장이었지만 현장 복귀 후 현실은 훨씬 더 참혹했다. 회사에서는 1주일에 하루밖에 그에게 ‘교실(수업)’을 주지 않았다. 게다가 급여의 절반은 가압류를 당해 끼니조차 챙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걸걸한 목소리, 아직도 귓가에 생생
 
재능교육 노사는 정 위원장이 한참 투병 중이던 지난해 9월, 3년간 끌어왔던 긴긴 임단협 교섭을 끝내고 임단협 갱신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길고도 어두웠던 투쟁 과정에서 정 위원장의 몸은 점점 병들어갔고, 결국 6개월여의 투병기간을 거쳐 숨을 거두고 말았다.
 
12일 민주노총 서울본부장으로 혜화동 재능교육본사 앞에서 치러진 정종태 전 위원장의 노제에는 매서운 칼바람이 정신없이 몰아쳤다. 학습지교사의 노동3권을 인정받기 위해 정 위원장이 5년간이나 투쟁했던 바로 그 현장.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장례위원장인 고종환 민주노총 서울본부장의 조사 낭독으로 장례가 시작됐다.
 

 
“함께 했던 우리가 당신을 외롭지 않게 했다면, 활동하는 우리가 좀더 잘 했다면 이렇게 빨리 가게 하진 않았을 텐데···. ‘꼭 다시 일어나서 비정규직 운동을 하겠다’는 약속을 못 지키고 떠난 정 위원장의 뜻을 민주노조 운동으로 다시 이어갈 것입니다.”
 
정 위원장의 30년 지기 친구라는 박용건씨(40)는 떠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종태야, 이렇게 어이없이 간다는 것이 원망스럽다. 하지만 우리 친구들은 비정규직 운동을 하면서 자신을 돌보는 것도 사치스럽게 생각했던 너를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가혹한 현실 속에서 네가 이렇게 갈 수 밖에 없었지만, 그것마저도 언제까지나 자랑스럽게 여길 테니 저 세상에서는 비정규직 차별 같은 것이 없는 곳에서 오래 오래 행복하게 지내길 바란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의 추모사 낭독에 이어 정 위원장 재임시 부위원장을 지냈던 유득규 재능교사노조 전 위원장의 차례가 됐을 때는, 조합원들의 눈물로 장례식장은 울음바다가 됐다.
 
“자신이 정말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죽어라 죽어라 투쟁했던 위원장님인데, 너무 힘들다 보니 맘대로 일이 잘 안되면 괜히 화도 많이 냈습니다.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자신을 잘 못 돌보는 것도 맘에 안 들어서 싸우기도 많이 했습니다. 위원장님, 힘들어서 표현을 못했지만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제가 너무 미워해서 그랬는지, 사랑한다는 표현을 할 기회를 안주신 위원장님이 더 밉고, 죄송합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화장터를 향하는 영구차를 보내며 조합원들은 “금방이라도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 올 것 같다”며 울먹였다.
 
늘 걸걸하고 큰 목소리와, 그보다 더 크고 환한 웃음소리로 사람들을 맞이했던 정종태 위원장. 그는 짧은 생을 마감하고 결국 이 겨울 한줌의 재로 변해 뿌려졌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 바꿔보려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차별이 계속되는 한, 그의 걸걸한 목소리는 늘 귓전에서 맴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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