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전’이라는 말을 아시는지? ‘청백전’ 이란 ‘청년백수전성시대’를 일컫는 신조어다. ‘니트족’이라는 말도 있다. ‘니트(NEET)족’은 ‘Not in Employment, Education or Trainning’의 머릿글자를 모아놓은 말로, 직업도 없고 직업을 구할 생각도 없고, 취직을 위해 교육도 받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다. 경제불황과 취업난이 고스란히 반영된 말들이다.

경제불황의 그림자가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대학을 졸업한, 혹은 대학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들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청년백수전성시대’에 태어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해 보기도 하지만, ‘니트족’만은 되지 않기 위해 지금 이순간도 취업포털 싸이트를 뒤지고, 이력서를 꾸민다.

‘기필코 언젠가 직장에서 받은 선물세트 꾸러미를 챙겨들고 고향집으로 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꾸며, 오늘은 도서관으로 고시학원으로 발길을 돌리는 이들 대졸 취업준비생들에게 설날은 피해가고만 싶은 부담스러운 날일뿐이다.

6일 취업포털 스카우트에 따르면, 최근 취업을 위해 서울에서 생활하는 지방 출신 구직자 80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설 연휴때 고향에 내려가지 않겠다’는 응답자가 59.5%로 집계됐다. 고향에 가지 않으려는 이유로는 ‘친척들 보기 민망해서’가 60.4%로 가장 많았다. 이어 ‘금전적인 부담 때문’ 18.2%, ‘취업 준비를 위해’ 15.3%, ‘귀찮아서’ 6.1% 등의 순이었다.

“대화할 상대도 없다"

2002년 2월에 수도권에 위치한 4년제 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공무원시험을 준비해왔다는 김혜정(27)씨는 이번 설연휴 기간동안 학원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 문제풀이반’ 특강을 들을 예정이다. 경기도 행정직공무원 채용시험과 서울시 행자부 공무원 채용시험이 3월과 4월 연달아 실시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을 전혀 안한 건 아니에요. 공무원 시험준비와 병행하며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학생 때부터 줄곧 학원강사를 해왔죠. 몇달 전까지 학원강사일을 계속 하다가, 시험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최근에 그만 뒀어요.”

그동안 학원강사 일을 하며 모아둔 돈으로 공무원학원 수강료며, 교제비, 차비, 밥값, 핸드폰 사용료, 인터넷 사용료 등에 지출하고 있다는 김씨는,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공부하기 위해 한 달에 80만원 정도를 본인이 부담하고 있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번 공부방에 들러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과외를 하고 있긴 하지만, 한 달에 30만원의 수익으로 80~90만원의 지출을 감당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단다. “그나마 벌어놓은 돈이 있어 다행”이라고 말하는 김씨.

“학원강사 그만 둔 지 5개월 됐는데, 한달 평균 80만원씩 5달이면 벌써 400만원이죠. 물론 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부에 들어가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안하려고 하지만, 경제적 부담이 큰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정작 더 큰 걱정은 따로 있죠. 뭐든지 막연하다는 것, 그것이 주는 마음의 부담을 떨쳐내기가 가장 힘들어요.”

공무원 채용공고만 났다하면 100대 1의 경쟁률을 훌쩍 넘기는 ‘무한 경쟁’의 장에 홀로 떨구어져 있다는 생각, 수만명의 경쟁자들 속에서 나의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불안함, 이 모든 불안함과 막연함이 몸서리쳐질 정도로 스스로를 위축시키고 외롭게 만든단다.

“도서관에서 10시간 넘게 혼자 공부를 하다보면 참 외로워요. 학원에도 혼자 가고, 밥도 혼자 먹죠. 사람은 사회적 존재라는데, 군중속의 외로움 같은 걸 느껴요. 집, 학원, 도서관을 맴맴 돌다보면, 하루종일 대화할 상대가 없어요. 머리 속에는 이야기거리가 가득한데도 말이죠.”

어디에도 소속돼 있지 못하다는 현실이 스스로를 외롭게 만드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말하는 김혜정씨. 그는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지니고 살아가는 취업준비생들이 수십만명에 이르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표준화된 교육제도가 양산해낸 그릇된 결과물이라고 지적한다.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는 12년동안 ‘좋은 대학 나와서 출세하라’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일류대 진학’을 위해 ‘올인’하죠. 그러나 막상 대학에 와도 답은 없어요. 대학에 간들 ‘뭘 해서 어떻게 먹고살라’고 가르쳐 주지는 않거든요. ‘토익 점수 올리고, 자격증 많이 따라’는 말만 대학 4년동안 줄기차게 듣죠. 사회와 언론은 ‘왜 공장에라도 취직할 생각을 안하느냐’며 대졸자들을 자기 편한 것만 좋아하는 이기적 집단으로 매도하지만, ‘기껏 공장에나 들어가려고 힘들게 졸업장 땄나?’라는 생각을 주입시킨 것도 사회와 언론이었어요.”

벌써 27살. 어느새 결혼을 생각해야할 나이에 이른 김씨는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맞선’ 제의도 부담스럽기만하다.

“맞선이라는 게 몇 가지 조건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게 되는 자리잖아요. 상대방이 ‘당신 하는 일이 뭐냐?’고 물어올 때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고 말하기가 싫어요. 나의 가치를 그런 식으로 단정적으로 평가받는 게 싫은거죠. 자격지심이랄수도 있지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 누구보다 능력받는 직장인이 되고 싶다는 김씨는, 이날 인터뷰를 마치고 또 다시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백수, 그거 사람 미치게 만드는 말입니다”

방송 연출쪽에 꿈을 갖고 있다는 김승욱(가명·26) 씨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인천에 있는 대학에서 언론홍보학을 전공하고 있는 그는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있는 처지다. 취업을 앞두고, 전공분야와 관련한 경험을 쌓고 싶어서 iTV(경인방송)에서 6개월 간 FD(조연출) 일을 했었는데, 지난해 말 iTV가 폐업조치되는 동시에 일자리를 잃었다.

“비록 한 달에 80만원 받는 비정규직 FD였지만, 1~2년 열심히 일해 경력을 쌓은 후, 한 학기 남은 대학을 졸업해 본격적으로 취업시장에 뛰어들자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죠.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상태에 회사가 문을 닫게 돼 너무 허탈합니다.”

그나마 다니던 직장을 잃고 완전히 ‘백수’가 됐다는 김씨는 하루하루 속절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단다.

“아침에 눈을 뜨면 우선 집밖으로 나가죠. 어머니랑 부딪혀 봤자 말싸움만 붙을 게 뻔하니…. 집밖에 나와서 동네 한바퀴 돌고, 피씨방 가서 한 게임 하면 2~3시간이 훌쩍 갑니다. 그러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때쯤이면 어머니는 이미 출근을 하셨을 시간이고, 집안에서 나만의 시간이 지루하게 시작되는 거죠.”

어머니가 출근한 후 퇴근하기까지 본격적인 김씨의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힘들게 일하시고 돌아올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 청소며, 빨래, 설거지 등을 끝마쳐 놓고 토익책을 펼쳐든다.

“요즘 음식물 쓰레기 분리수거가 골칫거리라는 거 알고 계시죠? 집에 있다보니 그런 건 전문가 다 되더라고요. 뼈와 가시는 퇴비로 쓸 수 없으니 음식물이 아니고, 생선살과 고기는 음식물이고….”

“학교 다닐 때 토익 공부같은 건 미리미리 끝내 놨어야 하는건데”하는 후회가 밀려들 때쯤 “술 한잔 하자”는 친구들의 전화가 오기라도 하면 또다시 외출할 채비를 차리는 김씨. 거의 매일 취업포털 싸이트에 들어가 방송 연출직과 관련한 신입직원 채용 광고가 났는지 살피고, 눈에 띄는 곳에 이력서를 내보기도 하지만 “6개월 경력은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인사채용담당자의 답변에 되돌아오는 건 한숨뿐이다.

“워낙 구직자가 몰리다 보니 왠만한 학벌, 왠만한 경력 같고는 정말 명함도 못내밀겠더라구요. 그러니 아무리 토익책을 들여다 본들, 그 안에 뾰족한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도 유명한 방송국에서 정기적으로 개설하는 ‘방송아카데미’ 같은데 들어가서 체계적인 교육도 받고 싶고, 현장감도 쌓고 싶지만, 집안 살림 꾸리기도 벅찬 어머니께 한 학기에 200만원이 넘는 수강료를 내달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요. ‘왜 우리집은 부자가 아닐까?’하는 쓸데 없는 생각을 하다보면, 내 마음과 달리 어머니께 짜증도 부리게 되고…. 더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데 나는 뭐가 못나서 이러고 있나 하는 자책감도 많이 들고요.”

<인간극장> 같은 사람냄새 풀풀 풍기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꿈이라는 그는, 요즘 같이 힘이 들 땐 매일 밤 잠들기 전 “내일 아침에 눈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하게 된단다. 한번은 “누구네 집 자식은 어디어디에 취직했다더라”는 어머니 말에 발끈해 “다른 집 부모들은 어학연수도 시켜주고, 하고싶은 공부 다 시켜준다는데 나는 뭐냐”고 대들었다가 크게 후회한 적도 있더란다.

“평소에 매우 괄괄한 성격의 어머니인데, 그날 따라 ‘미안하다’고 하시는 거에요. 뒷통수를 한대 세게 맞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 이후로 더욱 어머니를 피하게 되더군요.”
평소 다른 명절 때에는 친가, 외가를 두루 돌아다니며 연휴를 즐겼다는 그는 이번 설연휴만큼은 그냥 조용히 보낼 생각이라고 한다. 뭔가 안쓰러운 눈길로 ‘얼른 좋은데 취직해야 할텐데’하고 쳐다보는 친지들의 시선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까닭이다.

“경력직 채용 관행, 대졸자 넘치는 현실도 문제”

수많은 젊은이들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는 ‘청백전’에서 ‘우승’하기 위한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윤진호 인하대 교수는 수년간 지속되고 있는 청년실업문제의 원인을 ‘고용시장 내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서 찾는다. 고용없는 성장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기업들이 직원을 채용할 때 경력직을 중심으로 고용하다보니 넘쳐나는 대졸자들이 갈데가 없어지고, 전체 고용률은 크게 하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여러가지 대안책을 생각해볼 수는 있지만, ‘이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대안책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십대 태반은 백수’(이태백)라는 쓸쓸하고도 혹독할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취업준비생들에게 ‘정답’이 보이지 않는 고용불안의 터널은 길고도 지루한 고통만을 안겨주고 있었다.


청년실업자 두 번 죽이는 ‘미디어’
‘무능력한 백수' 이미지 유포…사회적 편견 조장
백수는 ‘명절’만 괴로운 것이 아니다. TV를 봐도, 영화를 봐도 괴롭다.


SBS가 ‘설날특선영화’로 준비한 오상훈 감독의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 창식(임창정 분)과 미영(김선아)는 ‘백수’다. 창식은 명문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빈둥거리는 고학력 실업자로, 미영은 탤런트가 되려는 꿈을 가진 백조로 나온다. 송창용 프로듀서는 “고학력 실업자가 많은 세태를 반영해 백수들이 펼치는 흐뭇하고 푸근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다”고 했지만 이 영화를 보는 백수, 백조들은 결코 흐뭇하지 않다.



‘창식’은 요즘 미디어가 그려내는 ‘백수’의 대표선수다. 츄리닝 복장에 덥수룩한 머리로 백화점 시식회나 찾아다니고 형 등쳐먹을 궁리만 한다. 그래서 궁상맞고 칠칠맞아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다. 창식은 돈 100원 때문에 이웃에 사는 '백조(김선아)'와 사생결단하며 싸우고, 동갑내기 형수에게 매일 얻어맞는다. 창식은 주변의 구박 속에서도 구직활동을 포기한 듯 ‘사회가 나를 버린 게 아니라 내가 사회를 버렸다’며 백수생활을 즐긴다.


이렇게 희화된 ‘청년백수’는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청백전(청년백수 전성시대)같은 신조어가 유행하는 요즘 시대의 고통은 찾을 수가 없다. 또한 ‘실업’의 문제를 일개 ‘개인의 무능력’때문인 것으로 그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물론,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코미디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하겠지만 ‘백수’를 다루는 미디어의 태도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장항준 감독의 ‘라이터를 켜라’에서의 주인공 허봉구, 곽경택 감독의 ‘똥개’ 주인공 철민, 최근 종영한 KBS 드라마 ’백수탈출‘의 주인공들 역시 영락없이 무능력한 백수들이다. 이러한 백수의 이미지들은 청년실업을 사회적·구조적 문제가 아닌 철저한 개인의 문제로 만들어버리며, 수많은 청년실업자들을 무능력한 인간으로 전락시켜 사회적 편견을 조성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지난해 말 출범한 전국백수연대(전백련·대표 주덕한)는 이러한 미디어의 백수 이미지는 ‘청년실업자를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백수인권선언문’을 통해 “이러한 (미디어의) 백수의 상은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으며, 백수는 희화화 혹은 동정의 대상이 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선포, 백수 권리찾기에 나서고 있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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