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정오 무렵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내 복지관 2층의 노조 사무실은 사뭇 분주한 모습이었다. 노조 상근 간부 10여명은 저마다 유인물을 한 움큼씩 들고 두, 세명 짝을 이뤄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점심 시간을 이용해 신임 김일섭 위원장 명의의 성명서를 조합원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식당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김일섭 위원장의 새 집행부가 업무를 시작한 지 이제 사흘쨉니다. 조합원들에게 인사도 할 겸, 앞으로 노조활동을 어떻게 해날 것인지, 또 현안인 체불문제나 구조조정에 어떻게 대응할 지를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노조의 홍길표 대외협력부장 역시 말을 끝맺자마자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새로 출범한 집행부의 조합원들에게 보내는 '첫 메시지'인 셈이다. 으레 당당한 포부와 원대한 사업 구상 등이 담겨있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회사 처리방향은 여전히 안개 속에 휩싸여있고, 무엇보다도 두 달여째 임금 체불로 조합원 동지들이 고통받고 있는 지금, 위원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향후 노조 운영의 기본방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사말 뒤에 바로 이렇게 글을 이어간 성명서의 분위기는 무거웠고 문맥에선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새 노조 집행부가 느끼는 중압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조위원장의 비장한 성명서
현재 대우자동차는 제너럴모터스(GM)과 인수협상이 추진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포드의 돌연한 인수 포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 추이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다.

또 조합원들에겐 공장가동률이 50%대로 떨어지면서 야간조업이 거의 없어 기존 임금의 70%정도만을 지급 받아오던 터에 8월 상여금과 9월분 급여의 체불까지 겹쳤다.

게다가 산업은행 등 채권단은 하루 전 운영위원회를 열어 정주호 사장을 전격 경질하면서 신임 사장에 올 봄 해외매각 반대투쟁에서 '악명'을 떨쳤던 이영국 상무를 내정했다.

노조는 채권단의 이번 사장 인사를 "구조조정을 위한 포석"이라고 분석했다. 김일섭 위원장은 "이상무씨는 파업 투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20여명의 조합원을 해고하고, 노조에 대한 고소·고발은 물론, 가압류 등 초강경책으로 맞선 장본인"이라며 "이번 인사는 채권단이 강력한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이영국 상무는 부평사업본부장으로 있으면서 올 봄 노조의 파업을 막기 위해 각 조합원 가정에 자신 명의의 경고장을 발송하고 직·조장 교육을 직접 주관하는 등 적극 앞장섰다. 원성이 높다보니 파업 당시 그의 사무실이 조합원들의 계란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부평공장 구 식당에서 노조 유인물을 받아 본 한 조합원은 혼잣말처럼 이렇게 내던졌다. "채권단이 얼마나 '쎄게' 나오려구 이영국 상무를 사장에 앉힌 거야?"

*조합원, "고용불안 없이 마음 편히 일하고 싶다"
점심을 마친 조합원들은 다시 삼삼오오 작업 현장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웅웅, 뚜르르…철컥. 삐-' 반복되는 기계 소음이 요란한 속에서도 라노스 자동차의 차체 조립이 한창인 조립 1부 공장.

'생존을 위해 뜻모아 힘모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조립 1부'
작업장 안쪽에 막 들어섰을 때 이렇게 쓰인 현수막에서 특히 '생존'이란 글씨가 더욱 크게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이 노조 조합원인 기능직 노동자들은 100m가 넘음직한 각 라인에 열을 지어 서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동차 문짝에 부품을 조립하던 조합원 김모(48)씨와 어렵게 대화를 시작했다.

-8월분 상여금하고 9월치 급여가 안나왔는데요, 힘들지 않으세요?
=물어 뭣하겠어요. 다 마찬가지지.

-가계는 어떻게 꾸려가세요?
=지난달 적금을 깼어요. 애들 학원도 줄이구….

-포드가 인수를 포기했잖습니까?
=회사에 대해 안 좋은 소리만 들리니 현장 직원들 모두 불안해해요.

-GM에 매각되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헐값으로 팔리는 건 문제지만, 그렇다구 공기업화는 더 어려운 거 아닌가?

-새 노조 집행부에 가장 바라는 게 뭡니까?
=제발 마음 편히 고용안정 지키면서 일했으면 좋겠어.

거의 고함치듯 오간 대화에서 고참 노동자의 '마음 편이 일하고 싶다'는 이 마지막 말마디가 현재 대우자동차 노동자의 공통된 바람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다른 라인에서 라노스 샤시부분에 부품 조립 작업 중이던 이모(32)씨도 임금 체불로 인한 고충이 적지 않았다. 몇 달 전 은행 빚을 얻어 아파트를 새로 구입했는데, 매달 20만원씩의 대부 이자를 가까운 친지의 도움으로 해결하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해외매각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포드가 인수를 포기한 마당에 GM에겐 헐값으로 팔릴 게 뻔해요. 분할매각 얘기도 있구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요."

이씨는 또 채권단과 회사 경영진의 구조조정 움직임에 강한 불만을 털어놨다. "대우가족이라고 할 땐 언제고 또 인원을 정리한다고? 실업자되란 얘긴데, 터무니없죠." 그는 노조가 파업에 들어갈 경우 "적극 참여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기도 했다.

임금체불은 이들 조합원들 뿐 아니라, 그 동안 노조간부들로부터 회사의 현장 통제의 촉수 역할을 하고 있다며 눈총을 사 온 직장들에게도 불안 요인이 되긴 마찬가지였다.

조립 라인을 오가며 작업상황을 점검하던 조립 1부의 한 직장(41)은 "불안감이 늘긴 마찬가지"라며 "회사쪽에서 그동안 월급제였던 직장들에게도 시급제를 적용한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는데, 이렇게 될 경우 직장들도 나름의 대책을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회사의 전도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계속되는 임금체불과 새 경영진이 몰고 올 구조조정의 먹구름이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불안감을 확대재생산하고 있음을 현장은 보여주고 있었다.

*노조 대의원, "노조의 신뢰회복이 급선무"
지난달 중순께 임원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포드가 돌연 인수 포기를 선언하자 조합원들 사이에선 "무슨 노조 선거냐"는 체념과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던 게 사실. 올해 초부터 노조가 '해외매각 반대와 공기업화'를 이슈로 파업과 농성을 거듭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얻지 못한 데 따른 패배감도 겹쳐있었다.

노조 사무실에서 만난 기술연구소 소속의 한 대의원은 "다른 무엇보다 조합원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게 급선무"라며 말을 이었다.

"돌이켜보면 조합원들은 그 동안 준비 안된 투쟁을 해왔어요. 왜 해외매각과 공기업화가 대안인지를 노조 지도부가 설득하고 이해시키지 못한 거죠. 새 집행부는 이런 과오를 되풀이 말아야 합니다. 현장에 깊이 들어가 조합원들과 함께해야 해요. 또 사무직뿐만 아니라 선거에서 맞섰던 후보진영과도 가능하면 힘을 합쳐야 합니다."

현재 김일섭 집행부는 대우자동차 사무노동직장발전위원회와 현장 제 조직에 정책간담회를 제안해 놓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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