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2월21일 새벽 5시50분, 노조사무실에는 밤새워 대의원투표 준비를 마친 간부들이 10분 있으면 퇴근할 야근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후 야근자들이 작업을 마치고 투표를 하기위해 다투어 뛰어오고 있었다.……그들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똥을 집어서 닥치는 대로 조합원들이 얼굴과 온몸에 바르고 귀와 입에 쑤셔 넣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조합원들을 쫓아다니면서 젖가슴에 똥을 집어넣고 심지어는 똥통을 통째로 얼굴에 뒤집어 씌우기도 했다. ……현장에 있던 정사복 경찰관들은 '이 쌍년아 가만있어 조금 있다가 말릴거야'며 윽박질렀다." (「아름다운 저항」중 동일방직 편·노동과 세계 기획)

전평 계열이던 동양방적노조(동일방직의 전신)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파괴된 이후 대한노총 소속이 된 후 30년간 노무부와 다를 바 없었던 노조에 72년에 최초의 여성지부장 주길자씨가 당선시키면서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출발됐다.

이후 동일방직노조는 '나체시위'와 '똥물사건'으로 대변되는 노조탄압과 이에 맞선 여성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 기나긴 투쟁은 똥물사건이 난 이후 124명 해고로 사실상 패배했다. 해고된 이들은 근로자의 날 행사, 통일주최국민회의대의원선거, 부활절예배 등 사람이 모이는 곳 어디든 몰려가 '가난해도 똥물 먹고 살 순 없다'고 외치고 다녔다. 숱한 구타와 연행, 고문, 구속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회사와 결탁해서 노조를 파괴하는데 기여(?)했던 당시 섬유노련 김영태 위원장은 124명의 이름, 주소, 주민등록번호까지 상세히 기록된 문서를 만들어 전국 사업장에 배포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이른바 '블랙리스트'는 이렇게 탄생했다. 취업하는 족족 보따리 하나들고 쫓겨나는 '해고 인생'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이 23년만에 다시 만났다. 지난 14일 오후 인천 만수동 복자수도원의 작은 예배당에는 10대, 20대 꽃다운 아가씨였을 이들이 중년 '아줌마'가 되어 모였다.

강산이 두 번 바뀌고도 남는 세월을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았던 이들이 민주화보상법을 계기로 장장 23년만에 다시 모인 것이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 관련자들 중에는 드물게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원직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당시 폐업, 자본 철수 등으로 사업장이 없어졌는데 비해 동일방직은 70년대 민주노조 중 유일하게 사업장이 건재한데다 동일레나운, 아놀드파마 등 확장일로를 걸어 왔기 때문이다.

이들 124명의 동일방직 해고자들이 - 정확히 말하면 115명 정도.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 세 명이고 당시 가명으로 입사했던 이들중 5명은 아직 연락처를 찾지 못했다 - 모두 연락을 하고 그들 중 절반 가까운 인원이 모일 수 있던 이면에는 그간 꾸준히 모여왔던 동일방직 출신 20여명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노력이 있었다.

이들은 124명을 모두 찾아서 명예회복 신청을 함께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23년전 주소로 엽서를 보냈다. "……집배원 아저씨, 옆집이나 이웃에 수소문하여 연락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는 문구와 함께. 뿐만 아니라 고향이 있는 곳 114로 전화를 하여, 같은 이름을 다 불러달라고 해서 전화를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애써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불과 열 명도 안됐다. 최후 수단으로 쓴 것이 동일방직을 관할하면서 동일노동자들을 연행하고 패고 회사를 비호해 노조를 탄압하던 동부경찰서에 124명의 주소를 찾아달라고 협조공문을 보낸 것이다.

그토록 당시 같이 투쟁했던 동료를 찾으러 애썼던, 지금은 충북 음성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얼마 전 충북 여성농민회 회장이 된 안순애씨에게 그 이유를 들어보자.

"주로 열 일곱 열 여덟 어린 친구들이 객지로 나와서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해고될 때 옷도 못 챙기고 쫓겨 났어. 해고됐으니 돈은 하나도 없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예배당에서 생활했는데, 철지난 옷을 입고 신발은 다 낡아서 떨어져 가는 데 살 돈이 있나. 해고됐으니 고향에도 갈 수 없지. 저녁 때 노을 질 때면 다들 너무 외로워 했어. 동인천 주변을 삼삼오오 짝지어서 한바퀴 돌고는 새우깡에 소주 한 병 사들고 와서는 교회 옥상에서 마시고 서로 부둥껴 앉고 통곡을 해. 난 집이 인천 만석동이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 집에 갈 수가 없었어. 20년이 지난 지금도 경찰서에 잡혀가는 것보다 그렇게 외로와 했던 게 잊혀지질 않아. 우리가 그렇게 처절하게 싸웠던 것에 대해 우리 스스로 정리하고 싶은 거야. 최초로 여성지부장을 당선시킨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렇게 처절하게 싸울 수밖에 없던 우리 젊은 날의 투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시 한번 정리하고 싶은 거지. 그 때 우리를 정말로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매맞고 잡혀가는 것보다 '가슴에 독침을 넣고 다닌다'며 우리를 빨갱이라 호도했던 거야. 그게 가슴에 더 맺혀 있어. 그렇게 매도 당했던 것이 거짓이고 우리 투쟁이 정말 역사적으로 정당했다는 평가를 그 때 같이 고생했던 동지들과 나누고 싶은 거야. 어찌 보면 우리 인생에 가장 크게 상처로 맺혔던 한을 풀고 정리하자는 의미도 되는 거지. 우린 반드시 명예회복이 돼야 해."

이들은 지금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오랜만에 옛 동지를 만난 그 사실이 즐겁기만 하다. 젊은 시절 맺혔던, 아직도 풀리지 않은 한은 가슴에 묻어두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본과 정권과 노동귀족이었던 어용노총에 의한 탄압과 그에 맞섰던 투쟁이 정당했음을 명예회복되고 원직복직이 이루어 지면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모두는 한결같다.

누군가 물었다. 복직되면 정말 동일방직 다닐건지. 충청도에서 올라왔다는 한 분이 말한다. "그럼 다녀야지. 출퇴근해서라도 다닐 거야. 우리가 옳았다는 증거가 되는건데."

그들이 23년 전 그들이 불렀던, 그 시대의 '투쟁가요'가 아닌 '노동자의 절규'를 이 시대가 진정으로 '응답'하기를 그리하여 가슴에 20년 이상 맺혔던 한이 풀리길 기대해 본다.

억눌림서 헤어나려 발버둥쳐 왔다/ 인간답게 살기위해 투쟁하였다/ 오-하느님 주신 평등 어디있나요/ 세상에 너는 아는가 노동자의 고통을
빼앗기고 괄시하고 매맞는 형제여/ 너와 내가 설 땅은 그 어느 곳이뇨/ 오-하느님 주신 권리 어디에 있나요/ 세상에 너는 듣는가 노동자의 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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