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글라데시 친구 두 명을 사귀었습니다. 참 맑고 선한 얼굴을 가진 청소년 이주노동자들입니다. 지난 16일부터 30일까지, 이들과의 2주간 만남을 정리했습니다. 글에서 언급한 모든 지명과 사람 이름은 익명 또는 가명입니다.<편집자 주> 
 

바리타도 자희도 옷을 얇게 입고 있었습니다.

몸을 감고 도는 찬바람도 아랑곳 않습니다. 일 끝내고 공장 문을 나서는 두 친구의 옷은 얇은 점퍼 하나였습니다. 겨울옷이 없어서는 아닌 듯했습니다. 열아홉인 까닭입니다. 옷맵시를 따질 만큼 한창 멋 부리고 싶은 나이니까, 생각했습니다. 

바리타와 자희는 동갑내기 외사촌 형제입니다. 한국에 온 지 4년이 넘었습니다. 자희가 2000년 7월 19일, 바리타가 같은 해 8월 8일. 한국에 첫 발을 디딘 날짜를 둘은 자기 생일처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고작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노동자가 될 수도 없는 나이, 이주노동자들 중에 또래가 있을 리 없습니다. 온종일 일하느라, 학교 다니는 한국 친구 사귈 시간도 없었습니다. 언제 잡혀갈지 몰라 불안한 거리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게 놔 둘 만큼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그 4년을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둘은 가족이자 친구였고, 동료면서 버팀목이었습니다. 같은 도시, 다른 공단에서 일하는 그들은 매일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묻습니다. 휴일이면 만나 같이 시간을 보냅니다. 둘이서만 놉니다.


 
“오늘 세 명 잡아갔어요”

밥 때를 놓친 저녁, 배가 고팠습니다. 맛있는 거 먹자는 말에, 바리타가 길을 안내했습니다. “시내 비싼 데서 먹자”고 해도, 바리타는 “거기가 좋다”며 꽤 먼 곳까지 데려 갔습니다. 바리타를 아껴 주던 ‘먼저 번 공장 사장님’이 회사 부도내고 시작한 작은 식당이라 했습니다.

○○시.

‘한국형 자본주의’가 밀어낸 사람들, 각지에서 흘러 온 하층노동자들이 ‘그 자본주의’ 밑바닥을 지탱하며 사는 곳. ○○시는 계엄령 선포 지역 같았습니다. ‘노란색’ 한국인에겐 적용되지 않는, ‘흰색’ 외국인에게도 관심 없는, 오직 ‘검은색’ 이주노동자들에게만 으르렁거리는 계엄령입니다. 공장에 단속반이 들이닥치고, 길 으슥한 곳에 숨었다 덮치기도 하는, ○○시는 인간사냥이 한창인 ‘정글’이었습니다.

바둑판 같은 공단을 빠져 나오며, 자희는 인근 공장에서 들은 살풍경한 소식을 전해 줍니다.

“오늘 세 명 잡아갔어요.”

단속반이 공장에서 작업 중인 노동자들을 덮쳤다고 했습니다. 새로울 것도,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담담한 말투였습니다.

“우리 회사에도 단속반 온 적 있는데, 방에 숨어서 살았어요.”

한 마디 더 이어집니다. 

“며칠 전엔 우리 삼촌도 잡혀갔어요.”
 
요즘엔 공장에서 일할 때가 더 무섭다고 합니다. 단속반이 상주하는 역 근처에만 안 가면, 차라리 길거리에서 사람 속에 섞이는 게 더 안전할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유독 가로등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이 도시는 밤이면 더 깜깜해집니다. 말처럼 뛰어 놀 나이의 청소년들을 공장과 기숙사에 꽁꽁 묶어 두는 밤입니다.

이리저리 헤맨 끝에 식당을 찾았습니다. “왜 그 동안 안 왔어”하며, 주인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습니다. 바리타는 이제 단속 걱정 않고 밥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와서 먹을 땐 꼭 그곳에서 먹는다고 했습니다.
 
가족이자 친구, 동료이자 버팀목

흔치 않은 경우입니다. 어딜 가든 이주노동자들을 쉽게 보는 시대라지만, 바리타와 자희처럼 십대 청소년 노동자는 분명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국의 이주노동자들 속에 드문드문 섞여 있는 청소년들은 어른들보다 신분상 훨씬 더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성년자인 아이들은 비자를 받을 수 없어, 브로커를 아버지로 가장해 입국합니다. 브로커가 적당한 곳에 떨궈 주고 나면, 아이들은 그때부터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15세 이하면 ‘아동노동’으로 취업도 할 수 없습니다. ‘좋은 사장’ 만나 ‘불법고용’을 호소해야 합니다.  

바리타와 자희도 그렇게 한국에 왔습니다. ○○시에서 10대 이주노동자로는 세 명이 있다고 합니다. 바리타와 자희 외에 한 명이 더 있다고 들었지만, 말도 못하고 길도 몰라 기숙사를 나오지 않는다고 자희가 일러 줬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부모님은 감자농사 지었어요. 감자만 키워서는 먹고살기 힘들어요. 먹을 건 있는데, 남는 게 없어요. 학교 가고, 옷 사고, 신발 사려면 돈이 모자랐어요.”

한국에 와야 했던 이유를 바리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자희도 말했습니다.

“아빠 사업하다 망해서 돈이 없었어요. 누가 나서서 돈을 벌어야 했어요.”

가난 때문입니다. 가난해서 부모들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처분하고, 가난해서 부모들은 빚을 얻어 돈을 만듭니다. 어린 자녀를 홀로 한국에 보내며 ‘입 하나 던’ 사실에 안도하는 것도 가난 때문이고, 부모 정도 덜 뗀 아이 어깨에 ‘집안 일으킬 무거운 책임’을 지워야 하는 까닭도 가난해서입니다.   

바리타 부모도 감자밭을 팔았습니다. 자희 집에선 아빠 사업 정리한 돈을 다 긁어모았습니다. 700여 만 원씩 주고 ‘가짜 아빠’를 만들었습니다.  

15살 바리타는 처음 만난 한국이 무서웠다고 했습니다. 외로워서 혼자 울었다고도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바리타에겐 아빠가, 자희에겐 형과 외삼촌들이 한국에 먼저 와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둘만 남았습니다.

바리타보다 2년 일찍 한국에 들어왔던 아빠는 할머니가 위독하시단 소식을 듣고 작년에 귀국했고, 자희의 형은 그때까지 번 돈으로 여비를 만들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한국에 미래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와 있던 자희의 외삼촌들 중 한 명은 일주일 전에 잡혀 이틀만에 출국조치 당했고, 다른 한 명은 귀국한 바리타의 아버지입니다.

둘은 서로가 더 소중해졌습니다.



어린 가장들


바리타와 자희의 하루 노동시간은 12시간입니다.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해서 밤 8시 30분까지 일합니다. 수요일과 토요일은 5시 30분에 끝나지만, 늘상 있는 잔업이 밤 10시 30분, 혹은 11시 30분까지 이어집니다. 심할 경우 새벽 4시까지 계속되기도 합니다. 

바리타는 A공단에서 자동차 부품을 기계에 찍어내는 일을 하고, 자희는 B공단에서 전자제품에 금과 은을 입힙니다. 자희는 “일이 힘들어 한국 사람은 일주일 만에 도망가는 일”인데다, 너무 바빠 화장실 가기도 힘들다고 합니다.

“우리 회사는 라인이 세 갠데, 내가 자리를 비우면 앞 라인 사람들은 놀고 있어야 돼요. 아파도 안 돼요.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공장 전체가 멈춰요. 참고 일해요.”

이렇게 일해서 두 친구가 버는 돈은 식대까지 합쳐 한 달에 120만 원입니다. 잔업이 많은 달엔 140만 원까지 받는다고 합니다. 같은 일 하는 한국사람들이 200만 원 받지만 말입니다.

친구들은 “그나마 꼬박꼬박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좋은 사장님 만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리타와 자희도 처음부터 ‘좋은 사장님’을 만난 건 아닙니다. 이들도 여타 이주노동자들이 받았던 설움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나이 어리다고 봐 주는 한국이 아닙니다.

“처음 일한 공장에서는 음식이 잘 안 맞아서 밥도 잘 못 먹고, 말도 잘 못하고 하니까, 부장님이 소리소리 지르고 때리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 회사 나와서 다른 데서 일했는데,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두 달치 월급을 못 받았어요. 사장님한테 전화했더니 기다리라고 하고선, 도망갔어요. 지금은 오이도에서 부동산 한대요. 원래부터 주기 싫었던 거 같아요.”

어린 가장들은 힘들게 번 돈 대부분을 매달 빠뜨리지 않고 집으로 부칩니다. 한 달이라도 송금하지 않으면 고향집 생계가 힘들어집니다. 둘이 책임져야 할 고향집 식구수는 똑같이 다섯 명씩입니다.

작년 귀국한 바리타의 아버지는 이미 감자밭을 다 팔아 버려 아무 일도 못 하고 있습니다. 바리타가 보내는 80만 원으로 생활비와 바리타 동생들 학비를 충당합니다. 일본으로 건너 간 후 병에 걸려 제대로 송금하지 못하는 형 때문에, 역시 자희가 보내는 70만 원이 고향에 있는 가족의 생명줄입니다. 해서 바리타와 자희 본인이 한 달에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은 20만 원 정도입니다.  
        
가족들이 많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바리타와 자희의 고향은 ‘빠니야’와 ‘뿌아이샤’입니다. 4년 넘게 못 본 가족들이 그립고 그립지만, 비자 받을 길 없는 이들은 가족 보러 고향 갈 방법이 없습니다.

바리타가 말했습니다.

“막내가 여덟 살이에요. 네 살 때 보고 못 봤는데, 얼굴이 생각 안 나요.”

다시 만날 땐, 부쩍 커 버린 아들 얼굴을 엄마 아빠가 못 알아 볼지도 모릅니다. 

꿈을 잃다

실은 꿈이 있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둘은 아주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자희는 반에서 2·3등, 바리타는 전교 1등을 했습니다. 한국과 학제가 다른 방글라데시(초중등 묶어서 5년, 고등 5년, 대학 3년)에서 입국 당시 둘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돈 버는 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한국에 올 때 바리타와 자희에겐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단한 꿈은 아닙니다. 공부하는 거였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생이 되는 것, 그게 꿈이었습니다. 그 소박한 바람을 ‘꿈’으로 정하고, 꿈을 이루는 데 한껏 부풀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꿈이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자희가 말했습니다.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바리타가 말했습니다.

“현실은 달랐어요.”

입국 후 일 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한국에선 ‘미등록’ 신분으로 학교 다니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습니다. 자희는 꿈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역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돕는 단체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포기했습니다.  

“불법(체류 상황)이라도 학교 다닐 수는 있대요. 근데 왔다갔다 하다 잡히면 추방되니까, 지금까지 고생한 거 아무 소용없어지니까, 그냥 일만 하기로 했어요.”

사실 미등록 아이들도 학교를 다닐 수는 있습니다. 이주노동자 관련 단체 운동가들이 오랫동안 교육부와 싸워 얻은 결실입니다. 초등학교의 경우, 교장 재량으로 정식 학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중학교부턴 사정이 달라집니다. 정식 학생이 아닌, 청강생 신분만 보장됩니다. 졸업장도 안 나옵니다. 상급학교 진학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냥 ‘한국 학교를 겪어 보는 것’ 외에, 대학생이 되는 길은 원천적으로 막혀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정식 학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학교장 재량’이란 것도 ‘양날의 칼’입니다. 입학을 가능케 하는 열쇠면서도 불가능케 하는 족쇄기도 한, 시혜면서도 장벽인,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아이들의 ‘사회적 지위’이자 ‘교육권의 실상’입니다.

청강생은 일종의 ‘신분’입니다. “사고 치면 학교를 그만 둬야 한다”는 각서를 쓰고 입학했던 한 아이는 ‘뺑소니 사고를 당하는’ ‘사고를 치고’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청강생 이주노동자 아이들은 이런 계급이고, 21세기 한국 학교는 중세 신분제 사회입니다. 

자희가 “나중에 ‘어떻게든’ 할 거예요”라고 말했지만, 한국은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란 걸 두 친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코리안 드림’의 뜻이 ‘코리아에선 꿈’이란 사실도 말입니다.    

“다른 나라에선 불법체류 신분이라도 일 년 있다 신고하면 합법이 되고, 공부도 할 수 있어요.”

바리타와 자희에게 이 사실은 방글라데시에 있을 때부터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친구가 알지 못했던 게 하나 있었습니다. 자희가 말꼬리를 흐립니다.

“한국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 왔는데….”

바리타와 자희는 공부가 정말 하고 싶습니다. 

“또래 한국 아이들이 교복 입고 학교 가는 거 보면 진짜 부러워요. 학교 다니다가 붙잡히더라도 출국시키지만 않으면, 더 이상 돈 안 벌고 공부만 할 거예요.”

그래도 꿈꾸고 싶다

그래도 두 친구의 나이 고작 열아홉입니다. 꿈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는 나이입니다. ‘어쨌거나’ 한국이 무조건 좋다는 두 친구는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희가 더 그랬습니다. 왜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게 바보스럽다 느꼈습니다.

혹시, ‘그것’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잘생긴 자희에겐 휴대전화로 문자 보내는 여자친구가 있습니다. 본인은 ‘여친’이 아니라 극구 부인했지만, 옆에서 능글맞게 웃는 바리타의 얼굴표정을 봐선,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바리타와 자희는 가끔 인라인스케이트를 탑니다. 단속을 피해서 ○○시 변두리에 있는 스케이트장을 이용한다고 합니다. 특히 자희의 스케이팅 실력은 선수급이라 했습니다. 스케이트로 계단도 탄다고 합니다.

조만간 두 친구에게 인라인 타는 법을 배워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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