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작은 송년회로 술렁거리는 연말. ‘흥청망청’과는 거리가 먼, 아주 특별한 송년회가 열렸다.
 
인터넷 다음 카페에서 활동 중인 ‘파산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파사모). 올 4월 모임 결성 이후 그들은 조촐한 첫 ‘송년회’를 가졌다. 다들 쪼들리는 형편에 ‘십시일반’해 자리를 만든 것. ‘동병상련’의 아픔을 같이 하는 이들이기에, 그들은 서로의 존재가 힘이 되는 그런 관계였다.
 
지난 19일 서울 대학로. 일요일 저녁 도심의 풍경은 네온사인 불빛 아래 휘청거렸다. 대학로 번화가의 번잡스러움을 피하려고 했을까. ‘파사모’ 회원들은 뒷골목 허름한 호프집을 빌렸다. 송년회 장소인 호프집 이름은 공교롭게도 ‘한국사람’.
 
‘채무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가는 500만 신용불량자들(잠재 포함). 우리나라 경제활동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이들 가운데 ‘파산’을 통해 재기해 보려는 ‘파사모’ 회원들은 호프집 이름처럼 우리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기를 원하고 있었다.
 


여성지 2권 분량 파산 신청서류와 씨름
 
멀리 부산에서부터 대구, 강릉 등 각지에서 올라온 열성 회원들과 아이들을 데려온 회원들로 호프집은 가득 찼다. 줄잡아 50~60여명의 회원들이 맥주와 소주 등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픔을 같이 하는 이들이기에 그들끼리는 꽤 친숙해 보였다. 온라인 카페에서 주로 글을 주고받던 이들은 ‘닉네임’이 쓰인 명찰을 보고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 크레용님.” “돌베게님! 너무 반가워요.”
 
“100% 파산면책을 위하여!” 건배에도 희망은 담겨졌다. 회원들이 100% 면책을 받고, 제대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기를 그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렵게 살고 있죠. 파산과 면책과정이 6개월에서 1년여 걸리는데, 이 기간이 또 피 말려요. 신청에 필요한 서류가 여성지 2권 정도 되는 분량이죠.” ‘파사모’의 운영자인 30대의 ‘크레용’님이 모임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회원 30% 이상이 ‘워크아웃’ 신청하다가 파산 신청하러 오신 분들이에요. 그나마 파산신청 하려는 사람들은 깨어 있는 사람들이죠.”
 
파사모는 매주 ‘신입회원, 서류준비중, 서류정리가 끝난’ 회원들을 나눠 소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서로 학습하고, 정보공유하며 ‘나 홀로 파산’을 준비하는 것. 자원봉사자인 ‘서포터즈’ 15명이 회원들을 돕고 있다. 서포터즈는 두 번 이상 소모임에 나왔거나 ‘파산’ 서류를 접수한 경험자들이다. 현재 파사모 회원 3700여명 가운데 ‘면책’을 받은 회원은 10명 남짓. 아직 갈 길은 멀다.
 
비영리로 운영되는 ‘파사모’의 개설에는 서글픈 사연이 있었다. 이 카페 개설자이자 현재 고문으로 있는 ‘굿뉴스’님이 한 ‘파산 전문’ 변호사 카페 소모임에서 활동하다가 강퇴 당하면서 모임이 출발한 것. 회원들에게 서류작성법 등을 가르쳐 주다 보니, 그 변호사 사무실쪽에선 자신들의 영업에 지장을 받는다며 그를 몰아냈다.
 
“수입이 없어 먹을 것도 제대로 사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150만원~300만원에 이르는 변호사 비용은 만만치 않습니다. 결국 각종 서류 떼는 일도 본인들이 다 하게 되고, 게다가 변호사가 법정에서 변론해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변호사는 ‘소송대리인’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파산신청 비용이 10만원, 면책에는 50만원이 드는데, 이 돈이 없어 신청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에요.” 지난 3월 면책을 받고, 현재 자영업을 하고 있는 ‘굿뉴스’님은 내년에는 한 단계 진전된 활동을 할 계획이다.
 
“내년부터는 면책 받은 분들을 중심으로 자활 방법을 모색할까 합니다. 주위의 신망도 잃고 돈 한 푼 없다 보니, 이 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어요. 밑천 없이 할 수 있는 아이템을 발굴하고, 서로 의지하면서 재기할 수 있도록 하려고요.”
 
이 겨울, 그들은 동료의 체온을 느낀다
 
호프집 곳곳에서는 회원과 서포터즈 간에 소견서, 진술서 등 파산신청 서류 검증이 한창이었다.
 
“평이한 흐름으로 되어 있네요.”
“서류작성에서 큰 틀은 알겠는데, 작은 틀은 잘 모르겠더라구요.”
“현재 일을 할 수 없고, 파산을 신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설명되어야 할 것 같네요.” 
“저는 장사하려면 차가 꼭 필요한데. 이건 또 어찌 해야 할지 걸리네요.”
“생계형이란 걸 강조하세요.”
 
그들은 한참 동안 파산신청 서류에서 빼고 더할 것을 이야기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무자라고 해서 주눅 들지 마세요. 당당해 지셔야 돼요.” 오히려 ‘불법 채권추심’과 관련한 고충을 토로하는 회원보다 상담하는 회원이 분개해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다들 유경험자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 아닌가. 이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파산 면책에 대한 잘못 알려진 상식이다.
 
“호적에 빨간 줄이 그인다.” “자녀에게 해가 간다.” “해외 못나간다.” “이사 못 간다” 등등.

파산과 관련한 잘못된 상식은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다.
 
“대부분 잘 몰라서 파산신청 못하는 사람들이죠. 명동에 있는 신용회복위에서도 계속 그런 잘못된 얘기를 하니까요.” 굿뉴스님이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채무자를 만나 자신의 부채와 이자를 물으면 다들 잘 몰라요. 형편 좋으면 갚을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들을 하죠. 그래서 변변한 직장 없이 아르바이트만을 해서는 원금은 커녕 이자충당도 어렵다는 얘기를 해줘요. 그러면 그때서야 채무자들은 아! 그렇구나 하죠.”
 
옆에 있던 2대 카페지기인 ‘돌베게’님이 파산면책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말을 거들었다. “서울, 의정부 등은 법원의 심리가 빨라요. 그런데 다른 지방은 보통 1년 이상 걸려요. 여기서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죠.”
 
법원의 면책 불허가 사유에는 ‘사기, 도박, 과다낭비, 재산은닉, 편파변제, 사치·낭비’ 등이 있다. 그런데 주식투자의 실패의 경우, 서울은 95%이상 인정하는 반면, 지방에서는 ‘합당한 소비’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허가’가 많다는 얘기다.
 

경제적 실패가 인간적 실패는 아니다
 
‘파사모’ 회원들은 친한 친구는 물론, 친척들에게조차 자신의 처지를 알리지 못하는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술자리가 깊어가면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픈 회원들은 서로 간에 고충을 이해하고 달래주며 형제, 친지 그 이상의 정을 느끼고 있는 듯 보였다.
 
“이런 모임은 처음이라서 서먹서먹했는데 친절하게 챙겨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모두에게 빛을)
“눈물 흘리는 날은 올해 끝내 버리자구요.”(예영)
“게시판 글속의 주인공들의 얼굴을 뵐 수 있어서 넘 반가웠고요. 베풀어 주시는 따뜻한 말들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놀빛)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희망이 보입니다. 방향을 못 잡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던 저와 신랑에게 방향을 일러주신 ‘백일홍’님 정말 감사드립니다.“(해피하우스)
“우리는 경제적으로 실패했지만 인간적으로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파산자지만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살고자 노력해야죠.”(돌베게)
 
회원들의 말들 속에는 개개인의 재기를 바라는 송년 희망이 담겨 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출구로 나가는 길. ‘파사모’ 회원들이 선물을 들려준다. 절편 한 봉지와 쥐 모양의 포장지에 담긴 사탕 몇 알. 내년에는 회원 모두가 먹고사는 데 지장 없고,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바라는 작은 희망의 의미였다.
 
운영자에게 인사를 하며 복도를 나오는데, 한 회원이 운영자에게 말을 건넨다. “(카드사에서) 지급정지 시켜놨더라구요.”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기자는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를 방해하고 싶지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몸 고생, 마음 고생의 나날에서 오랜만에 맛보는 ‘행복한 자리’. 그들은 늦은 밤까지 회포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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