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남은 달력이 허허로움을 더하는 2004년 12월 1일. ‘10가구 가운데 3가구 꼴로 적자’ ‘소득 상위 20% 가구가 하위 20% 가구의 7배가 넘는다’는 구구한 통계수치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 가득한 ‘빈곤의 굴레’는 여전히 가슴을 짓누른다.

0.5~1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몸을 의탁하고 있는 극빈층.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은 최근 영등포 쪽방체험을 통해 “차라리 감옥의 독방이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비인가숙박소’인 쪽방촌은 남대문, 용산, 동대문, 종로, 영등포 등 서울 5곳, 부산 2곳, 인천 2곳, 대구 1곳, 광주 1곳, 대전 1곳 등 전국 12곳에 산재해 있다. 
 

“서울 장안 한복판에 펼쳐진 벌집”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영화 한편 보면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로 거리는 활기에 차 있고, 연일 벌어지는 질퍽한 술판에 휘청거리는 서울의 심장 종로. 그 서울시내 도심 한복판인 종로구 돈의동 피카디리 극장 뒤편의 쪽방촌. 한발 짝 길목으로 발을 들이밀자, 이내 좁은 골목에 미로처럼 얽혀 닥지닥지 붙어 있는 쪽방이 들어온다. 

IMF 이후 대부분 벽돌집으로 개조가 되어 외형은 나아졌다지만 속은 닳고 닳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옆으로 젖혀서야 들어설 수 있는 방들은 칸칸이 나눠져 있고, 좁은 나무계단을 통해 윗 층으로 올라가면 또 그만한 방들이 펼쳐져 있다. 마치 ‘종이접기’라도 하듯 내부는 판자집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사람이 간신히 몸을 누일 만한 코딱지 만한 방. 주인집에서 제공하는, 무료함을 달랠 텔레비전과 눅눅한 이부자리. 여기에 살림살이라고는 라디오나 간단한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브루스타(휴대용 가스렌지)와 벽돌 얹은 밥통 등이 전부다. 화장실, 세면장은 10~15명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한다. 같은 하늘 아래 ‘완전 딴 세상’이 펼쳐져 있는 셈이다.

속칭 ‘벌집방’, ‘간판 없는 여인숙’이라 불리는 쪽방에는 독거노인, 장애인, 알콜중독자, 부랑인, 실직가장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거주자들 대부분 요통, 신체장애, 위장병, 간질환 등 각종 질병에 노출되어 있고, 방세가 떨어진 이들은 하룻밤 사이에 노숙인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80년대 중반 집창촌이 없어지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돈의동 쪽방촌에는 700여명이 위태로운 삶을 의탁하고 있다. 1평도 안되는 잠자리는 보증금 없이 월세 20~24만원이나 일세 7천~8천원 남짓을 받는다. 보증금 없이 월세 13~18만원, 일세 4천~7천원선에 영등포 쪽방촌에 견줘 비싼 편이다. 그런데도 굳이 비싼 이곳을 찾는 이유는 뭘까. 영등포 쪽방이 작년에 250여 채가 철거돼 지금은 530여개로 줄어든 데다, 종로지역에 크고 작은 인력회사들이 많아 일감 구하기가 좋기 때문이다. 

새엄마가 싫어 18세에 가출한 뒤로 혼자 살아왔던 이철수(50)씨는 올봄에 이곳에 들어왔다. 중국집 주방장을 했던 그는 IMF 이후 실직하고 사귀던 여자에게 가진 돈까지 뜯기면서, 서울역 등지에서 노숙생활을 하게 되어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일자리도 없고, 노가다 하다가 속상해서 술로 지샜죠.” 그 때 하루에 마신 술이 소주 8~9병. 얼굴은 붓고, 혀도 굳고,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이 온몸이 마비될 정도가 되어서야 그는 ‘다시서기 지원센터’를 찾았다. 3개월여의 치료를 통해 알콜중독에서 벗어난 이씨는 막일과 공공근로 등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방 벽에 쓴 “정신 차려”

“주방 일을 하면 좋겠지만 이제 힘이 딸려 서있지도 못해요. 노가다는 일감도 없고 나이 먹었다고 써주지도 않고. 지금은 동사무소에서 ‘취로사업’해요.” 이씨는 올해 4월초부터 9월까지 동사무소 청소와 잡일 등의 공공근로를 해 한달 54만원 정도를 받았다.

그 후 재활용 분리수거 등을 하는 ‘취로사업’ 일로 바뀐 뒤로는 한달 26만원에 주민자치위에서 지원하는 돈을 합해 40여만원 남짓이 수입의 전부다. ‘레종’ 담배 한 갑 사피기가 두려운 마당에 저축은 엄두도 못내는 빠듯한 살림. “공공근로라도 하면 혼자 먹고 살 만한데, 일을 꾸준히 주지 않아요. 없는 사람들 정부에서 일 시키면 술도 안 먹잖아요. 그렇지 않으니까 폐인되는 겁니다.”

소주 한 병에 1300원, 가스한통 800원, 담뱃값 2000원…. 겁나게 오르는 물가에 먹고 살라고 술을 자제한다는 이씨에게 유혹의 손길은 시시각각 다가온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온 오후 4시 무렵에도, 주변에 사는 동료들이 몰려들었다.

“술 한 잔만 하자.”
“내가 돈이 어딨어.”
“한잔만 하자니까.”

실랑이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정신 차려! 이△△’. 이씨의 얼굴은 방벽에 쓴 글귀를 아로새기려는 듯 단호해 보였다. 착잡한 표정의 이 씨를 뒤로하자, 주위 사람들이 따라 붙는다.

“일하다가 솔직히 술 한 잔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사진) 찍어주쇼.” 안동기(50)씨는 기자의 손을 잡고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면봉, 수세미 등속을 팔아 방세를 마련하고 있는 안씨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5년을 넘고 있었다.

“사는 게 사는 기요. 돈 한 푼 나오는 곳도 없고. (기초생활보장) 수급은 나오는 사람만 나오고, 그보다 못한 사람이 못 받아서야 말이 돼요. 동사무소서 쌀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두 명이 마주 앉으면 꽉 차는 방. 안씨는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말은 겉돌았다. 안씨는 30대로 보이는 옆방의 장애 청년을 가리키며, “수급대상도 아니고, 현재 놀고 있는데 밥도 나한테 와서 먹는다”며 연신 불쌍하다고 말한다. “다음에 내가 연락하면 인터뷰해주는 거죠. 이 동네 겨울이면 죽는 사람 많아요. 내 다 이야기 해 줄께.”

술에 의지하지 않고는 하루라도 버틸 수 없는 고달픈 삶. 오후 5시. 어둠은 내리고 있었고 골목 사진을 찍으려 하자, 멀찌감치 쭈그려 앉은 이가 “왜 찍어. ×팔. 누구 허락받고 찍는 거야.” 시비를 걸어온다. 눈은 벌써 반쯤 풀려 있다. 다행히 앞서 만났던 이씨가 나와 말려서야 멱살잡이를 면할 수 있었다.

“휴우~.” 한숨 한번 내지르며, 다른 골목으로 들어서서 사진을 찍으려 하자, 또 한 아주머니가 항의한다. “내 사진 찍으면 안돼. 내 나오면 안 돼요. 큰일 나.”

“어제 대통령이었으면 무슨 소용 있나”

세상의 풍파와 씨름하다가 이곳으로 흘러 온 다양한 사연의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얼굴이 비춰지길 좀체 허락하지 않았다. “저녁에 혼자 다니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돈의동 사랑의 쉼터’ 사회복지사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될 듯했다. 또 다른 방을 찾았다.
 
“어제 대통령이었으면 무슨 소용 있나. 한 때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고, 흙 안 묻히고 살았는데….” 류머티스 통풍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박창석(68) 할아버지는 20여년 사업을 하다가 IMF 이후 부도로 무너져 내렸다. 1년여를 여러 곳을 헤매다 2001년 11월 이곳으로 들어왔다. “서울 장안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을 줄 어찌 알았겠소. 나이 먹고 몸 망가지고 어찌어찌 흘러왔지. 처음 여기 올 때는 삼일만, 일주일만 했죠. 내년에 꼭 가야지 하지만 벌써 3년째요. 이북서 내려와 피난살이할 때도 이렇게 고생은 안했는데….”


이곳에서의 탈출을 꿈꾸면서도 벗어날 길 없는 박 할아버지는 부양할 자식들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보장수급권 혜택도 못 받고 있었다. “가족 얘기는 넘어갑시다. 다들 건강히 잘 살면 되는 거지. 바람이 있다면 노년층이 외로움 타지 않을 정도의 소일거리라도 달라는 거죠. 옷 단추라도 달고 하는 일을 찾으려는데 일거리가 없어요.”

할아버지는 추수감사절에 신학생들이 갖다 준 쌀 한 포대를 아직 뜯지도 않은 채 그대로 두고 있었다.

“왜 드시지 않고요.”
“아까워서 먹지도 못해요. 내가 이 쌀 받고 몇날 며칠 얼마나 울었던지.”

쉼터에서 매일 도시락 하나씩 갖다주고, 푸드뱅크서 빵이 나오면 그걸로 요기를 할 뿐. 따뜻한 말 한마디, 정이 그리운 노인에게 그 쌀은 애지중지하는 자식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주변사람들과 잘 얘기를 안 하고, 움직이지 않아서 처음에 ‘벙어리’인 줄 알았다는 이웃 사람들. 그들은 박 할아버지를 회장님으로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의 한마디 한마디는 인품과 학식을 말해주듯 뼈가 있었다. 노인이 즐겨보는 채널은 YTN과 매일경제뉴스. 집주인들 간에 경쟁이 붙으면서 몇 달 전 케이블이 설치돼 무료함을 달래주는 친구였다.

“뉴스만 보면 짜증나지 않으세요.”
“생각을 하게 하니까 보는 거죠.”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에 ‘근로자 66%, 노력해도 못살아’, ‘최저생계비 8.9% 인상’ 등 한 줄 뉴스가 흘러나온다. “세상이 저리되어서야 되갔소. 나도 벌써 3년이요. 내년에는 다들 좋아져야 할 텐데…. 이 선생도 이런 거 취재하지 말고 ‘미담’ 취재해야지.”

보증 잘못서고, 사업 실패로 자녀들에 피해를 많이 줘 도피해 살고 있는 전직 교장 선생, 잘나가던 사업가 등은 그렇게 인생의 마지막 장을 허허롭게 보내고 있었다.


어둠이 깔린 좁은 골목, 가로등 불빛은 처량한 쪽방촌을 희미하게 비추고, 개한마리 짖지 않는 정적이 감돈다. 골목을 빠져 나오자, 이내 도심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아래 흐느적거리는 인간 군상들이 펼쳐진다. 언제,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를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쪽방촌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뭉크의 ‘절규하는 사람들’로 일그러져 보였다.

 
“주거 문제과 일자리 마련 지원 병행돼야”
‘돈의동 사랑의 쉼터’에서 최근 파악한 돈의동 700여 쪽방 주거실태에 따르면 절반은 IMF이후 실직, 파산, 신불자가 되면서 들어왔고, 나머지 절반은 유아기부터 보육원 등을 전전하거나 가족해체 등을 통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이다.


5년 미만의 거주자가 48%로 가장 많고, 6~10년 미만이 19%, 20년 이상도 22%를 차지한다. 연령대는 40대가 40%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은 주로 건설일용직 33%, 폐지수집 5% 등을 하지만 이마져도 일감이 없어 쉬는 날이 더 많다.


이들의 학력은 초졸, 중학중퇴가 34%로 가장 많고, 중졸 26%, 고졸 23%, 무학 10%, 대재이상 7% 순이다. ‘주거·교육·노동의 소외’ 등 중층적인 소외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돈의동 쪽방촌은 여름철에는 130여명이 자리를 비우는 등 공실률이 높지만 겨울철은 꽉 차 빈방이 거의 없다. 여름에는 돈이 떨어지면 노숙이라도 할 수 있지만 겨울에는 힘들기 때문이다.



돈의동 사랑의 쉼터의 오범석 소장은 “차상위계층에 대한 정부 지원이 전무한 상태에서 쪽방 거주자들은 수혜대상인 불우이웃 취급을 받는다”며 “월세보조, 공공임대주택 입주기준 개선, 주거급여 현실화 등 이들의 주거문제와 일자리 마련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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