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는 없다!” “강제철거 살인철거 투쟁으로 박살내자!” “갈 곳 없는 세입자 강제철거 목숨건다!” “11월29일 가자! 성남시청으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지역. 택지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판교지구 280만평에 포함된 판교동과 삼평동, 사송동 일대 거주민은 가옥주 700여 가구와 세입자 1,500여 가구 등 총 2,300여 가구 7,000여명에 이른다. 24일 오후 기자가 찾은 판교동 거리 곳곳에는 현수막이 펄럭거렸고, 빈 가게와 빈 집이 널려 있는 인적 드문 시가지에는 벽보만이 어지러이 나붙어 있었다.
 

 지난해 12월부터 토지와 건축물에 대한 보상이 시작된 이래 세입자 1,500여 세대 가운데 현재 남은 세대는 700여 남짓. 집과 땅이 있는 주민들은 진작 보상을 받고 이사를 갔다. 토지공사, 주택공사, 경기도, 성남시 등 4개 시행처가 조만간 철거를 강행하려 하고 있는 가운데, 이주비조차 받지 못하고 오갈데없는 세입자들은 판교에 발을 묶어 두고 있었다.
 
“10원 한 푼 없이 85년에 이곳으로 와서 18년간 살았어요. 그런데 이주비조차 제대로 못받고 어디로 가겠어요. 내 집에서 하루만 살다 죽었으면 원이 없겠어요. 너무 지치고, 괴로워서 밤에 잠도 안와요.”
 
판교동 316번지에 살고 있는 정영자(65)씨는 큰 아들 내외와 한 건물에 세 들어 살면서 월세 11만원을 별도로 지불하고 독립된 세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직계존비속’이란 이유로 별도의 이주비 보상을 받지 못하고, 아들 내외 4인과 본인, 남편을 합해 800여만원(6인가족)의 이주비만 받게 됐다.
 
“우리도 아들 내외와 같이 사는 거 불편해요. 요즘 부모들이 젊은 애들과 같이 있으면 편해하지 않잖아요. (토공측 관계자에게) 이주비를 별도로 달라고 하니까 ‘어느 자식이 부모를 내팽겨 치겠냐’는 말을 해요.” 남의 사정도 모르고 하는 답답한 소리에 정씨는 “그래도 같이 살기는 어려워요”라고 하소연했다. 
 
세입자들에 대한 이주비 보상은 4인 기준 750만원. 그나마 이 돈은 3년 후 임대아파트 입주시 반납해야 하는 돈이다. 이 돈으로 근처에 방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그동안 어디 가서 살아야 할지 세입자들은 막막할 따름이다. 그래서 세입자들은 철거 전에 ‘가이주단지’를 만들어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성남보다 방값이 싸서 이곳으로 와서 살았던 거예요. 돈이 없으니까 교통도 안 좋은 이곳으로 온 거잖아요. 그런 우리 보고 또 어디로 가란 말이냐고요.”
 
백현동에 사는 이미자(43)씨는 88년에 부모님이 계신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오빠는 일곱 살, 여덟 살 조카들을 남긴 채 어디론가 떠났고, 올케는 재혼했다. 이씨가 조카들과 어머니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
 
그런데 세입자인 이씨는 직계가족이기 때문에 이주비 보상을 받을 수 없었고, 89년 5월부터 집 뒤편에 하우스를 지어 악세사리를 만들어 왔지만 ‘무허가 건물’이라 영업보상, 상가권 등 일체의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 
 
“(토지공사측은) ‘이주비는 집주인인 엄마한테 받아라’고 하고, 하우스는 무허가라고 하는데, 없는 사람들인 영세사업자 대부분이 사업자등록증까지 만들 여유는 없어요.” 이 씨는 “이것저것 따져 물으니까 (토지공사측은) 개인별로는 얘기해줄 수 없고, 일단 이사가면 통보해 주겠다고 해요”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갈 곳 없는 세입자들의 딱한 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름 밝히기를 꺼려한 40대의 한 아주머니는 2000년 오갈 데가 없던 처지에, 평소 알던 주인의 배려로 삼평동 498번지 철근공장이 있는 비닐하우스 한 켠에 몸을 의탁했다.
 
전입신고는 2002년 4월에야 했다. 그것도 독립된 세대주가 아닌 주인집에 딸린 세대원으로 등록을 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2001년 12월 ‘판교개발계획 공고’가 나갔고, 이 공고일로부터 3개월 전 거주자만 보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우리를 살도록 해줘야 하는데 무조건 내쫓으려 하니까 골치 아픈 거예요. 갈 데도 없어요. 차라리 개발이 안 되고 이곳에서 계속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주비도 못 받을 처지에 놓인 이 아주머니는 홀로 살아갈 대책이 막막해 보였다. 강남과 분당신도시 사이에 위치해 있는 판교. 30여년간 개발이 제한되면서 들판과 산이 온전하게 지켜져 도심속 전원을 형성하고 있다. 이씨처럼 인근 비닐하우스를 집삼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꽤 된다며 주민들은 안타까워했다.
 

 판교동 시내에서 도시락 가게를 겸해 주거를 하고 있던 김설자(53)씨는 무허가 영업이란 이유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무허가였던 이유는 수세식 화장실 등 위생시설을 갖춰야만 하는 식품위생법 규정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 김씨는 영업장소에 딸린 살림방도 토공측에서 인정해주지 않아 아파트도 받지 못할 처지였다. 
 
김씨는 택지개발촉진법 52조의 ‘허가 등을 받지 아니한 영업 손실보상에 관한 특례’조항까지 보여주며 택지개발단의 횡포에 분노했다.
 
“재산 없는 게 죄라면 죄지만 여지껏 주민세 내고 다 했다. 가옥주들은 재산보상을 다 해주면서, 세입자들에 대한 생계대책은 왜 없느냐. 나가서 죽으란 소리냐.” 김씨는 “차별과 차등대우에 울분이 터져요. 이건 평등권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난 헌법소원이라도 낼 거예요”라며 이를 악물었다.
 
“‘집 없는 설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세입자들의 하소연은 끝이 없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도, 법에는 인정이 없었다. 개발의 이득은 눈치 빠른 투기꾼들과 재산을 가진 사람들의 몫일 뿐, 정작 원주민에 가까운 세입자들은 지독한 가난의 설움과 냉대를 떨쳐 내기 어려워 보였다. 세입자들은 곧 닥칠 강제철거의 공포와 맞서기 위해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조만간 엄동설한이 다가오는데 공가(빈집)와 생가 철거의 두려움이 눈앞에 닥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막을 거고, 그러면 구속, 범법자 양산이 되는 등 희생이 따를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재산권’과 ‘주거권’ 확보를 위해 싸울 겁니다.”
 
전철협 산하 판교택지개발주민대책본부 이춘재 위원장은 “세입자 대책이 법적으로 전혀 되어 있지 않다”며 “철거 전에 ‘가이주단지’ 조성 등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위원장은 또 “지난 9월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 면담을 했을 때 ‘아직도 그런 데가 있나. 소외된 곳 신경 써서 일을 추진하겠다. 용기 잃지 말라’고 그랬다”며 “그러나 국회 건교위원들은 여태 진상조사 한 번 안 나온다. 높은 사람들 골치 아픈 일 신경 쓰지 않으려는 것 아니겠냐. 참여정부라던데 개탄스러운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갑갑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원래 10월31일까지 이곳을 떠나야 했던 세입자 등 주민들은 ‘벼랑 끝에 몰린 생존권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예정된 강제철거가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철거가 이뤄질지 몰라 주민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사진제공 = 판교택지개발주민대책본부>

판교택지개발주민대책본부는 오는 11월29일 오후 1시 신분당 화훼단지에서 ‘전국개발지역주민 재산과 주거권 촉구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 대회에는 판교주민들뿐만 아니라 전철협 산하 안양 오존동, 서울 상도5동 등 20여 곳 철거지역 주민들도 합류할 계획이다.
 
또한 판교주민대책위도 같은 날 오후 성남시청 앞에서 대규모 규탄집회를 여는 등 결사투쟁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밖에 판교지역 주민들의 단체인 판교주민대책협의회, 판교개발지구직능단체연합회, 판교세입자대책위 등도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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