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한 복판, 농민들이 주저앉은 시멘트 바닥 위로 비가 내렸습니다. 깊어 가는 가을, 그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농민들은 머리띠를 묶었습니다. 그리고 경찰에 끌려갔습니다.
 
근래 보기 드문 대풍이라고 합니다. 어느 때보다 풍성한 가을이라고도 합니다. 그 ‘좋은 날들’을 농민들은 오히려 욕했고, 단식농성장을 꾸렸습니다. 쌀개방 반대와 그 뜻을 묻는 국민투표를 호소했습니다. 한 번만 만나 달라 대통령에게 간청했습니다. 쌀만은 지키자 절절하게 외쳤습니다. 그 호소와, 간청과, 외침에, 11월 하늘은 차가운 비를 뿌렸습니다.
 

 
낫을 놓고 들을 뒤로 한 채 올라온 서울입니다. 그들이 두고 온 들녘에선 벼 베기도 끝났습니다. 벼 베기를 끝낸 농민들은 그러나 베지 않은 논 몇 마지기를 남겼습니다. 쌀개방에 항의하며 9월말 갈아엎은 논들입니다.
 
추수 끝난 습례리(경북 구미시 선산읍)에도 갈아엎어져 홀로 겨울을 날 땅 한 필지가 있습니다. 베어지지 않은 채 서리 맞고, 얼고, 썩을 논입니다. 쌀개방의 기로에 선 2004년의 가을, 그 절박한 시간을 진흙 속에 처박힌 쌀 알갱이들을 통해 선명히 기억해 줄 논입니다.
 
10월 28일, 습례리 추수 마지막 날에 그 슬픈 논 한 필지를 찾았습니다.
 
“웃음이 안 나와”
 
이른 아침, ‘습례들’은 안개에 묻혔습니다. 빽빽하게 내리는 뿌연 입자들이 추수 끝난 논을 적막 속에 가둡니다. 그 고요함을 양팔로 휘저으며, 농부 두 명이 호밀씨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기름값이 오르니까, 수입 강냉이 갈아 만든 사료값까지 덩달아 올라. 호밀이라도 키우면 좀 아낄 수 있을까 해서요.”
 
이상준씨(54)가 씨를 뿌리고, 친구가 트렉터로 땅을 뒤집습니다. 내년 모심기 전에 거두면, 소 사료값을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쌀농사 외에 축산을 병행하는 그에게 사료값은 ‘어쨌거나’ 최대한 아껴야 하는 비용입니다.     
 
“쌀농사만으로는 못 살거든요. 기름값도 오르고, 애들 공납금도 오르고, 뭐든 다 오르는데 나락값만 내려. 어떻게 살아, 같이 올라도 힘드는 판에…. 촌에선 열심히 일해 봐야 다 빚쟁이만 된다니까.”
 
팔을 휘휘 저으며, 그는 다시 호밀씨를 뿌립니다.
 

 
습례들의 추수 적기는 10월 20일에서 30일 사이입니다. 쌀알을 씹어 보고 만져 본 뒤, 몸이 익힌 지혜대로 날짜를 정합니다. 습례들 추수가 막바지로 치닫던 28일, 조득제씨(50)도 올 한 해 벼 베기를 마무리할 작정입니다. 주위에선 일찌감치 끝낸 터라, 그의 벼 베기가 습례들 마지막 추수가 될 듯 합니다. 
 
콤바인이 움직였습니다. 기계는 누런 논을 먹으며 볏짚을 토해내기 시작했습니다. 농민회에서 같이 활동하는 친구들과 동네 어르신도 일손을 보태러 모였습니다.
 

 “웃음이 안 나오는데 어떻게 웃으란 말이야.”  
 
한 때 가을 추수가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추수철마다 찾아와 갓 베어낸 황금빛 벼와 활짝 웃는 농부들의 얼굴을 사진 한 컷에 우겨 넣으며, 농부들의 고민을 덧칠한 카메라들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천고마비’ 한 귀퉁이의 장식품 노릇하면서도 농민들이 웃을 수 있었던 건, 자신들 때문에 이 땅 사람들이 김나는 밥 한 공기 먹을 수 있다는 뿌듯함에서였습니다.
 
이젠 아니었습니다. 휴대폰 하나 더 수출하겠다고 쌀을 버리는 나라를 상대로, 농민들은 억지 웃음을 사양했습니다. 더 이상 농사짓지 않아도 된다며 농민들을 닦아세우는 나라 앞에서, 이들은 망연자실할 뿐이었습니다. 
 
“낫으로 한 포기씩 끊으며 나락을 벴어도, 옛날엔 기분이나 좋았지. 중국 찐쌀은 마구 들어오지, 쌀개방 한다고 떠들어대지, 지금은 추수한다고 기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50년 농사꾼 박정도씨(64)는 그래도 농사 포기하고 습례들을 떠나는 일은 없을 거라 합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부터 농사 지었응께. 50년 내내 이곳에서 배운 거라곤 농사밖에 없응께. 그래도 흙 만지고 사는 게 좋응께.”  
 

가슴에 모래바람 일으키는 ‘대풍’
 
쌀개방만 문제가 아닙니다. 올해가 추곡수매제가 시행되는 마지막 해란 사실도 농민들을 애타게 합니다. 내년부터 정부 방침대로 공공수매제로 바뀌면, 정부 수매량도 줄고 수매가도  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올 수매가격만 해도 작년에 비해 4% 삭감된 터에 말입니다. 말투는 조용조용한데, 김칠건씨(45)의 언어는 가시를 품고 있었습니다.
   
“이왕 망할 거 더 빨리 망하라는 소리죠. 현실이 자꾸 이래 되니까 농촌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송장밖에 없어요. 말이 풍년이지 풍년이면 뭐 합니까.”
 
그의 말처럼, 올해는 근 10년 만에 찾아오는 풍년입니다. 그러나 풍년의 여유로움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빚 구멍 틀어막을 방법도 못 만드는 풍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빈손만 남는 게 요즘 풍년이기 때문입니다. 아랫돌 뽑아 윗돌 괴는 게 농촌 풍년이고, 빚쟁이 닥달만 거세지는 게 풍년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북치고 장구치는 풍년타령 들리지 않는, 가슴에 모래바람만 이는 ‘대풍’이기 때문입니다. 
 

이 날 추수 중인 논, 9백 평 한 단지가 만들어낼 연소득은 고작 220만 원 선입니다. 그렇다고 이게 다 순수익은 아닙니다. 뺄 게 많습니다. 종자값, 밑비료와 이삭거름값, 콤바인과 트렉터 등 농기계 대여료, 농약값에다, 토지 임대료까지 제하면 일 년 동안 9백 평 농사지어 얻는 수익은 약 84만 원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인건비를 한 푼도 제하지 않은 액수입니다. 해서, 한 해 6천 평 농사짓는 조득제씨의 일 년 수입은 570여만 원입니다. 농협 대출금 갚는 건 고사하고 기본적인 생활비에도 턱없이 못 미칩니다.     
 
“지난 10년 사이에 수해를 세 번 당했어요. 특히 재작년 태풍 루사 때는 쌀 농사 짓는 놈이 먹을 양식이 없었다니까요. 그러다 보니 그 해 농사 날린 건 둘째치고, 농사짓느라 들어간 돈은 다 빚으로 넘어가는 거죠.”
 
쌀 알갱이들이 쏟아져 나오는 탈곡기를 바라보며, 조득제씨의 얼굴은 별다른 표정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젊었을 땐 그도 농사만은 안 짓겠다며 막노동판을 전전하기도 했습니다. 농사에 손을 댄 건 부모님 때문이었습니다. 젊은 사람 다 떠나는 서울 갈 줄도 모르고 부모님 모시러 되돌아온 고향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10년 농사짓고 손에 쥔 건 1억 넘는 빚뿐입니다.
 
“빚 생각하면 잠이 안 와요. 새벽에도 못 자고 담배만 피워요.”
 
“나 사람 취급 안 할까봐 친구들한테도 안 보여 준 건데”라며, 그가 내민 마이너스 통장엔 ‘18,476,043’이란 숫자가 찍혀 있습니다. 그의 산더미 빚 중 일부일 뿐입니다. 바로 전날에도 한 카드회사에서 독촉전화가 왔다며, 그가 희미하게 웃습니다. 속으로 꾹꾹 누르고, 제대로 뱉어내지 못하는 마른 웃음입니다. 웃음 끝에 한 마디 뒤따릅니다.
 
“내 속이 아파 죽겠어.” 
 
 
김창섭씨(50)의 목소리는 높았습니다.
 
“젊은 사람 치고 빚 없는 사람 없어요. 보통이 1억입니다. 나도 빚이 7천만 원을 넘어요. 근데 걱정 안 합니다. 왜? 안 갚아 버릴 거니까. 갚을 돈이 없는데 어떡하라고요. 우리 농민들요, 정신적으로 다 망한 지 오랩니다.”
 
“우린요, 자기 빚이 얼만 지도 잘 몰라요. 너무 많고, 생각하면 골치만 아프니까, 신경 안 쓰면 그 순간은 괜찮으니까요. 이빨이 너무 아픈데, 진통제라도 맞으면 그 때만큼은 괜찮은 것처럼요. 농사 안 지었다면 차라리 빚이나 없지….” 
 
김창섭씨도 며칠 전 ‘신용불량거래처 등록예고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등록일은 11월 24일, 등록금액은 5백만 원입니다. 자신조차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빚을 갚으라며, 독촉서는 5백만 원씩 나눠서 ‘계속’ 날아온다고 합니다.
 

새참이 없어진 것도 그래서입니다. 요즘 농촌엔 새참 갖고 나올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참은 고사하고 점심도 사 먹어야 한다고 김창섭씨는 말합니다.
 
“촌에는 60대 초반만 되도 김치공장 나갑니다. 부부가 같이 농사지으면 같이 망하는 거라. 한 사람이라도 따로 벌어야 공과금이라도 냅니다. 우리 마누라도 전자회사에 밥그릇 씻으러 나가요. 아침 9시에서 밤 10시까지 일해도 한 달에 60~70만원 받습니다. 그래도 그게 도움이 돼요. 정기적인 소득이 있으니까요.”
 
논두렁 사이로 자장면 배달 오토바이가 덜덜거립니다. 
 
끝내 추수되지 못할 한 필지, 갈아엎은 논
 
마침내 탈곡기가 멈췄습니다. 습례리 추수가 끝나는 순간입니다. 한 필지가 더 남은 게 사실이지만, 그 논은 ‘끝내 추수하지 않을 작정’이기에 끝났다는 말이 맞습니다.
 
조득제씨가 안내한 ‘추수하지 않을 논’엔 ‘쌀·수·확·포·기·논’이란 여섯 글자 선명한 플래카드가 꽂혀 있었습니다. “국민의 힘으로 우리 쌀을 지켜냅시다”란 문구도 보였습니다. 지난 9월말, 쌀개방에 반대하며 전국농민회총연맹 주도로 갈아엎은 논 가운데 하나입니다. 2004년 구미에서 추수되지 않을 유일한 논입니다.
 

 “한 3백 명 모였어요. 트렉터 세 대가 들어가 갈아엎는데, 동네 어른들이 트렉터 앞에 드러눕는 거예요. 울고불고 난리였죠. ‘자식 같이 키운 나락을 어떻게 갈아엎을 수 있냐’면서….”
 
9월 25일의 일이었습니다. 
 
“그 심정을 어떻게 말로 다 합니까?”
 
농약 냄새 뒤섞인 한여름 불볕 더위를 현기증 버티며 기른 벼였습니다. 그 벼들이 진흙 속에 처박혔습니다. 뜨거운 밥으로 익지도 못하고, 이 ‘풍요로운’ 가을에 썩어가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필요에 따라 ‘백성(농民)’도 되고, ‘군사(농軍)’도 됐던 그들입니다. ‘천하지대본’이란 말을 들으며, ‘천하지천민’처럼 살아온 그들입니다. 말과 글을 소유한 사람들이 ‘국익’이니 ‘경제’니 하며 쌀밥 먹는 입으로 쌀을 폐기처분 하는 동안, 이들이 할 수 있었던 건 한 해의 땀으로 키워 낸 논을 울며 엎어 버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진흙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운 쌀알은 그렇게 말라비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쌀은 밥상 위에 오르지 못하고, 외로이 서서 서리를 맞고, 눈을 맞을 것입니다. 우리 쌀의 현실입니다.     
 

조득제씨가 논두렁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 한 대를 뽑아 물었습니다.
 
“한 여름 비지땀 흘리며 피 뽑은 게 아까워 죽겠어. 올해 나락은 최고로 잘 됐는데….”

“제발 우리 사정 좀 잘 알려 줘요”
 
추수한 쌀은 읍내에 있는 선산농협미곡처리장으로 싣고 가 팝니다. 11월 10일까지 계속되는 ‘물수매’(말리지 않은 쌀을 수매하는 것) 기간 안에 처리해야 합니다. 조득제씨도 이날 탈곡한 벼를 트럭 가득 싣고 출발했습니다. 이 중 극히 일부만을 정부가 수매하고, 나머지는 농협에 팔거나 농민들이 알아서 처리해야 합니다. 
 
미곡처리장 앞엔 쌀을 싣고 온 트럭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습니다. 끝이 안 보입니다. 정문 안으로 들어가는 데만 최소 다섯 시간 이상은 기다려야 합니다. 때문에 하루 안에 일을 못보고 차안에서 새우잠을 자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기다리다 지친 농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소주 한 잔을 기울입니다. 마음속에 눌러 둔 노여움도 터뜨립니다.    
 
“농민들 죽이려면 다 죽이라카소. 왜 휴대폰 팔아먹는 놈들 돈 많이 벌게 하자고, 쌀 팔아먹고 마늘 팔아먹는 놈들이 죽어야 되냔 말이지. 경제 빙자해서 농민들 죽이려면 거기서 얻은 이익을 농민들한테 보상해 줘야 할 거 아니요.”
 
농산물 시장 개방하면 전자제품 수출이 늘어나 경제에 도움이 된다던 ‘한-중 마늘협상’과 ‘한-칠레 FTA’ 체결 논리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논리와는 달리, 결과는 오히려 무역적자폭 확대란 사실에 농민들의 목울대는 더 거칠게 떨렸습니다.   
 
김종성씨(58)의 목소리도 점점 커졌습니다. 
 
“우리나라 농민들은 짐승만도 못해. 말이 사람이지 짐승만도 못한 게 농민이라. 발에 차여도 ‘아야’ 소리도 못하는 게 농민이라. 아무 소리 안 한다고 농민을 이래 업신여기고 말이지.”
 


점점 날이 저물어 갑니다.
 
조금 전에서야 간신히 차를 정문 안으로 넣었다는 유경상(42)씨는 귀농한 지 7년째 되는 농부입니다. 미곡처리장에 쌀 처분하면 얼마 남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절절합니다.
 
“전혀, 전혀, 전혀, 전혀, 전혀 없어요.”
 
소주 한 잔 들이키고, 돼지머리 눌린 고기를 입에 찍어 넣습니다.
 
“소득은 없고, 빚만 불어나는데 어쩔 거야. 오늘 싣고 온 쌀 다 팔아도 농협 부채 갚는데 고스란히 꼴아 박혀.” 
 
사방에서 힘들단 말이 쏟아집니다. 정신없이 쏟아집니다. 맺힌 건 많은데, 하소연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일어서는 사람을 붙잡고, 사양할 틈도 없이 순대 한 조각을 밀어 넣습니다. 그리곤 사방에서 말들이 또 쏟아집니다.
 
“기자 양반, 제발, 제발, 제발이지 우리 사정 좀 잘 알려 줘요.”
“부탁해요. 알죠? 우리 이야기 꼭 제대로 전해 줘야 되요.” 
 
정문 안에도 못들어 간 조득제씨도 다음 날을 기약하고, 미곡처리장을 나섭니다. 
 
“딸기만 잘 되면…”
 
습례리 추수가 끝난 다음날, 사람들은 조금 한가해졌습니다. 
 
김칠건씨는 8살, 6살 두 아들의 학예회를 보러 도계초등학교에 갔습니다. 아이들의 발표가 시작되자, 강당은 조잘대는 아이들 소리에 정신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농사짓겠다면 굳이 말리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가 된다 해도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질 거란 희망은 안 합니다.”
 
아이들의 엄마는 오늘 이 자리에 같이 오지 못했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농가처럼, 구미공단에 출근했기 때문입니다. 부품조립해서 버는 월 70만 원이 지금으로선 아이들 학예회보다 급해서입니다.
 
얼마 후, 큰아들 희수가 주인공을 맡은 연극공연이 시작됐습니다. 무대에서 예쁜 몸짓으로 혹부리 영감을 연기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김칠건씨의 얼굴엔 수많은 표정이 어립니다.     
 

전날 끝내지 못한 미곡처리장 일을 마치고, 조득제씨는 딸기 하우스에 들렀습니다. 쌀농사에서 더는 희망을 찾지 못한 그는 딸기에 마지막 모험을 걸었습니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쌀은 미련 없이 포기할 작정입니다.
 
“하우스 세 동 짓느라 2천만 원을 새로 대출했는데, 작황이 안 좋아요. 올해 처음 하는 거라 그런가….”
 

조득제씨의 집에선 여든 여덟 되신 어머니가 길가에 널어 말린 콩을 털고 계셨습니다. 농사가 싫어 외지로 떠돌던 아들이 결국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게 만든 그 어머니입니다. 콩을 털다 콩깍지 더미 속에 비녀를 잃어버린 어머닌 비녀 대신 녹슨 대못으로 머리를 여미고 계셨습니다.  
 
“이래 놓고 비나 오면 우짜꼬 싶어서 털어요. 비오면 썩어도 손댈 사람이 없어요.”
 
콩을 털던 어머니는, 주위를 맴도는 낯선 기자들의 하는 짓이 궁금하신가 봅니다.
 
“누구라? … 서울서 왔어? … 왜? … 늙은 할마이 사진 찍어서 뭐 하구로?” 
 
늙은 어머니는 아들이 한 해 내내 키워 온 논 9백 평을 갈아엎었다는 사실을 모르십니다. 어머니 건강을 걱정한 아들이 쉬쉬 했기 때문입니다. 
 
잠 안 오는 밤
 
추수가 끝나고 황금색 벼로 일렁이던 습례리 논이 마침내 빈들이 됐습니다. 그 빈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들을 비우지 못한 단 한 필지의 논을 바라보며, 습례리 농민은 산그늘 내리는 논두렁에 앉아 올 한 해 쌀농사를 생각합니다. 진종일 땡볕에 진저리치며 키운 쌀, 그 쌀로 지은 밥이 유독 자신에게 쓴 이유를 궁금해하는지도 모릅니다.
 

손끝에서 타는 담뱃불 색깔과 저 멀리 넘어가는 저녘 해의 색깔이 같아질 때쯤, 소처럼 일해도 빚만 늘어나는 살림 걱정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해답 없는 물음에 피식 웃으며, 담배 연기 한 모금 내뱉습니다.
 
이 밤이 다하도록 그렇게, 그는 잠 못 이룰지 모릅니다.
 

사진 = 박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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