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씨년스러운 날씨만큼이나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를 찾는 사람들의 어깨는 움추려져 있었다.
 
빚지고 마음이 편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불법추심에 오랫동안 가위눌림 당해보지 않았더라도 대부분 사람들은 빚을 지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답답한 일상에 괴로워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픈 심정의 이들은 개인회생·파산을 신청해 볼 요량으로 법원을 찾았다.
 
12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 1층 파산부. 사람들은 ‘자신이 신청자격이 있는지, 신청서류는 어떻게 꾸며야 되는지’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오후 3시 단체상담 시간에 10여명의 신청자들은 회생과 파산에 대한 법원측의 설명에 귀를 쫑긋 세우며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일단 책자 보고 연구 좀 하시라니까”
 
“어떻게든 아들을 구제하기 위해 와봤는데…서류 읽어보고 신청하러 다시 와야죠.” 60대의 한 할머니는 사채 등 아들의 사업실패로 생긴 2억여원의 빚을 갚을 길이 없어 법원을 찾았다. 파산지경에 이르러 패인이 되다시피 한 아들을 어떻게든 살려보겠다는 마음에서다.
 
“현재 110만원 월급에 5인 가족인데 회생신청이 가능합니까. 서류가 틀렸다고 안받아주던데….” 양복을 입은 50대 한 남자는 “소득에서 생계비를 제하고 최소 10만원 이상은 남아야 신청이 가능하다”는 법원측의 설명에 연신 고개를 떨궜다. 
 
“개인회생 신청하면 카드 계속해서 쓸 수 있나요.” “식당일을 하는데 신청이 될까요.”
 
“일단 책자와 홈페이지를 통해 연구를 좀 해보세요.” 상담원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가뜩이나 쪼그라든 가슴을 펴지 못한 채, 서류 한 장 달랑 들고 발걸음을 돌렸다.
 
오후 4시경, 파산부 2층의 2호 법정에서는 10여건의 파산과 2건의 면책 재판이 진행중이었다. 한 50대 여성 채권자가 재판정 밖으로 나왔다. “돈 빌리고 안돌려주려는 인간은 뭐여. 지긋지긋해, 이런 고생이 없어.” 동생 친구 사업자금으로 1억여원을 빌려줬는데 10년이 넘도록 주지 않아서 사기죄로 채권자가 고소를 한 것. 그 ‘동생 친구’라는 채무자는 결국 사기죄로 걸려 파산신청이 법원에 의해 기각됐다.
 
면책재판을 기다리는 20대의 박모씨는 친구와 함께 초조한 마음으로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지금까지 7개월여 걸렸는데 채권자의 이의제기로 2차 면책 판정까지 왔어요. 너무 힘들죠.” 박씨는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일찍 알고 신청해서 다행이네요”라는 기자의 말에 박씨는 씁쓸한 웃음만 내비칠 뿐이었다.
 
개인회생제는 최저생계비를 제하고 8년 동안 일정한 비율로 돈을 갚으면 나머지 빚을 면제해주는 제도다. 지난달 23일 시행에 들어간 개인회생제의 신청건수는 시행 2주째인 지난 7일까지 전국 14개 법원에서 403건에 불과했다. 그리고 10월 12일이 되어서야 개인회생제의 첫 수혜자가 나왔을 따름이다.
 
반면, 하루 20건 안팎이던 파산신청 건수는 최근 60여건을 넘어 3배 가까이 늘었다. 개인파산 신청건수는 1999년 503건, 2000년 329건, 2001년 672건, 2002년 1335건에서 지난해는 3856건으로 늘었다. 올해 들어서는 상반기에만 3759건에 이르고 있다.
 
개인회생제 신청보다는 ‘개인파산’ 쪽에 관심을 돌리는 채무자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다.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회생은 8년 동안 최저생계비로 생활을 감내해야 하고, 보증인에게 채무 독촉이 가능하다. 반면, 개인파산제는 파산선고를 받게 되면 곧바로 채무 면책 결정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개인회생이건 파산이건 복잡한 서류절차와 6~7개월에 이르는 판정기간, 200여만원에 이르는 의뢰비용은 채무자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었다.
 

 
“돈 없어 파산하려는데 의뢰비만 200만원?”
 
지난 9일 오후 4시.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가 매주 토요일 주최하는 ‘개인회생과 파산 나홀로 신청하기’ 첫 강의에는 40여명의 신청자들이 몰렸다. 대부분 법원에 한번씩은 가 본 사람들이었다.
 
“법원에 가서도 뭐가 뭔지 도대체 모르겠더라.” “법원문턱이 너무 높죠. 물어보려 해도 고압적 태도에 주눅 들기 일쑤구요.” “변호사 비용 200만원은 돈이 없어 파산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만만찮은 돈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채권추심과 압류 등으로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카드 사용한도’가 갑자기 줄어들면서 신용불량에 빠진 공통점이 있었다.
 
“처음부터 한도를 높게 안줬으면 됐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한도를 팍 줄이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들이(카드사) 괘씸하다.” 이장호(가명, 56)씨는 쌀가게를 하다가 사채를 포함해 총 1억2천여만원의 빚을 졌다. 2500만원에 달하던 카드한도가 갑자기 500만원으로 줄어들면서 카드로 카드를 메꾸던 방식은 더 이상 통할 수 없게 됐다.
 
가게 문을 닫고 올 1월부터는 운전을 하며 다달이 150만원을 벌지만 사글세 40만원에 의료보험 등 공과금을 내고나면 빚 갚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나이 때문에 취직도 제대로 안되고 옥수수, 김밥 등 노점과 불고기판 닦는 일 등 닥치는 대로 해봤지만 1년 내내 일해 갚은 돈이 150여만원이었다. 불어난 이자에 빚 갚는 일은 계속 ‘제자리걸음’이었다. 그가 법원에서 들어야 했던 말이다. “당신이 무슨 돈이 있다고 개인회생을 하나. 파산신청을 하라”
 
매일 오던 빚 독촉 전화 안 오면 오히려 불안하다는 이씨는 “생계유지를 위한 타우너 차량마저 압류당하면 큰 일이다. 파산신청에서 면책판정까지 6~7개월 걸린다는데 이 기간을 어떻게 견딜지 답답하다”고 말했다.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닌 고단한 삶의 굴레
 
결혼 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만하며 별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던 30대 후반 강모씨의 안락했던 삶은 남편의 사업실패로 180도 달라졌다.
 
계속되는 빚 독촉과 집안 곳곳에 붙여진 압류딱지를 보며 최근 중학생인 딸아이의 스트레스가 부쩍 심해졌다. “엄마, 다른 집은 다 잘 사는데 우린 왜 이런거야.” 딸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없는 부모의 심정이 오죽하랴. 강씨는 연신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했다.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현금서비스 1천만원 등 이곳저곳에서 3천여만원의 빚을 빌려 썼다. 카드사용 한도액이 낮아지면서 돌려막기도 못하고, 빚 갚을 길이 막막해졌다. 후회가 막심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강씨는 예전에 신용불량자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생활을 어떻게 했기에 저렇게 대책 없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치자 “다른 사람의 경험을 함부로 얘기해선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방화동에 산다는 70대 한 할머니의 사연은 더욱 기가 막히다. 시집간 딸이 몇 년 전에 가구점을 운영하면서 2억여원의 사업자금을 빌려갔다. 딸은 어머니 명의로 카드 빚을 얻어 썼고 보증도 세웠지만 사업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급기야 딸은 어머니도 모르는 곳으로 숨고야 말았다.
 
결국 채권자들은 할머니에게 소송을 내고, 압류도 걸었다. 할머니는 최근 노령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청소 일을 하며 고단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결혼하지 않은 30대 중반의 아들이 같이 살고 있지만 가끔 막노동을 나갈 뿐이다. 일감이 없어 쉬는 날이 많아 생계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할머니는 당장 먹고살기 위해 청소 일을 하지만 빚 갚을 엄두도 내지 못할 따름이다. “그저 부모 잘못 만나 자식들이 고생하는 거지.” 딸에 대한 원망도 있을 법하지만 할머니는 도망간 딸을 원망하지 않았다.
 
중년 여성 두 명이 강의 중간에 빠져 나왔다. “변호사 비용만 150~200만원인데다 서류 꾸미는 것도 복잡하고, 결국 혼자 신청하는 것은 어렵다는 거 아니에요.” 3년 전 무릎 등 관절이 안 좋아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던 신씨는 미용실을 접었다. 이후 3명의 자식들 대학학자금대출에 5천여만원의 빚을 졌지만 갚을 길이 막막하다.
 
“파산하면 자식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신씨의 고민은 한 곳에 있었다. 파산하면 호적에 빨간줄이 그어지고, 자식들에 해가 되는 등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고, ‘인생 끝’이라는 항간의 오해 때문이었다.
 
“파산신고하면 아이들 취직 안 될까봐 두려웠다. 그런데 강의에서 지장 없다고 하니 다행이다.” 옆에 있던 김씨가 이야기를 거들었다. “신용보증기금에서 부모의 신용상태가 안 좋다며 대출을 해주지 않았다. 상담에서는 아무 상관없다지만 어디 현실이 그리 녹록해요.”
 
김씨는 “자식들에게 불이익 주며 누가 되고자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냐”며 20대의 딸 이야기로 옮겨갔다. “조그만 피부관리실 하던 딸이 불황에 문을 닫았다. 그런데 딸이 고용주라는 이유로 미용사자격증 취득을 위한 무료교육조차 안되더라. 그러면서 세금은 왜 내라고 하는지….”
 
카드정책 실패 책임, 고스란히 개인 몫
 
강의에 참석한 신청자들은 각자 고달픈 사연을 안고 있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파산에 필요한 서류작성을 혼자 할 수 있다지만 실제 상당히 까다롭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 변호사 비용도 만만찮아 민주노동당의 실질적인 도움을 원하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의 이선근 본부장은 “빚 때문에 온 집안이 파탄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기에, 민주노동당은 고금리제한법, 공정채권추심법 등 제정운동에 나서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본부의 임동현 국장은 “당사자들의 애타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당의 현실적 인력한계로 서류대행까지는 어려운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500만명에 육박하는 신용불량자(잠재 포함). 경제활동인구의 20%가 신용불량에 빠져 있는 셈이다. 현재 신용불량자양산과 LG카드 유동성 위기 등 이른바 ‘카드대란’에 대한 국정감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 책임자가 처벌받으리라고 기대하는 국민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정부 정책실패의 책임은 고스란히 개개인에게 돌아가고 있다. 초라한 모습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돌아서는 파산신청자들의 모습. 그들의 떨군 고개는 거리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낙엽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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