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탄좌’가 문을 닫습니다.
 
태백선 기차를 타고 사북역을 지나는 승객들을 검은색 위용으로 압도했던, 우리나라 최대의 민영탄광이 사라집니다. ‘사북항쟁’의 치열했던 현장이 없어집니다. 설립(1962년) 후 42년 만에, 사북 탄광노동자도, 사북의 잿빛 먼지도 사라집니다.
 
“광산일 아무나 못 하는 거래요. 씨름 선수도 못 해요. 우리니까 지금까지 버틴 거지.”
“강산이 두 번 변할 동안 일했는데, 개뿔 벌어 놓은 것도 없고….”
“눈깔이 똘똘 굴러다니는 머리 좋은 놈들은 이미 다 떠났어요. 남은 건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뿐이고.”

 
자욱한 담배연기가 대기실에 피어올랐습니다. 탄재로 인이 박힌 ‘검은’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 불빛만 ‘빨갛게’ 도드라졌습니다. 밤 11시를 훌쩍 넘긴 시간, 길어지는 담뱃재를 바라보며 광부들은 ‘입갱’을 기다렸습니다.     
 
‘산업전사’란 칭송이 사탕발림임을 알았을 때, 가슴에 남은 유일한 훈장이 숨구멍 조이는 진폐증뿐이었던 이들입니다. 10월을 넘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북 탄광노동자들에 남은 마지막 며칠, 걸어 왔고 또 걸어 갈 그들의 고된 길을 배웅하고 싶었습니다.   
 
‘을반’ 퇴갱, ‘병반’ 입갱 (6일 밤 11시 30분)-“이제 우린 천연기념물”
 
다시 찾은 사북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2년 전, 마지막으로 사북을 찾았던 때의 기억이 혼동을 일으켰습니다. 탄가루로 뒤덮였던 사북이 말끔해지고 있었고, 말끔해진 자리엔 안마시술소를 겸한 룸싸롱과 러브호텔이 네온사인을 번쩍였습니다. 카지노가 만들어낸 ‘지각변동’입니다. 
 
광부들의 ‘활기’ 대신 자본의 ‘경기’를 느끼며, 동원탄좌로 향했습니다. 갱을 받치던 통나무들은 산처럼 쌓여 있고, 석탄과 사람을 빽빽이 실어 나르던 ‘광차’ ‘인차’도 멈춘 지 오래입니다. 탄광은 생명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 쌓인 자재와 움직이길 멈춘 장비들이 동원탄좌의 오늘입니다.  

 
노동자 평균연령 48세. 남은 노동자는 고작 720여 명입니다. 95년 이후 신규직원을 채용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노쇠한’ 동원탄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때 직원이 6000명에 이르던 ‘꿈 같은 시절’은 정말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리운 날’이 됐습니다.
 
그래도 문 닫는 그날까지, 3교대 근무는 계속됩니다. 가쁜 숨이라도 쉬기 위한 최소한의 심장박동인 셈입니다.
 
밤 11시가 가까워지면, ‘수갱탑’(막장으로 내려가는 수직갱도) 불빛만 반짝이는 어둠 속으로 ‘병반’ 노동자들이 출근을 시작합니다. 1주일씩 돌아가며 근무하는 갑·을·병 3교대 작업은 아침 7시 30분, 오후 3시 30분, 밤 11시 30분이 교대시간입니다.    
 
옷을 갈아입고, ‘하이바’(작업모)를 쓰고, ‘케프’(안전등)를 차고, 장화를 끌며, 그들은 대기실로 향합니다. 대기실에서 광부들은 창문 하나씩을 꿰차고 담배를 피웁니다. 입갱 전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 한 모금 빠는 모습이 참 허허롭습니다. 폐광에 대한 근심을 담배연기 속으로 ‘훅’ 뱉어내는 듯 합니다.
 
“담배 많이 피우시네요.”
짧은 답이 돌아옵니다.
“담배라도 안 피면 못 견디지….”

 
▲ “담배라도 안 피면 못 견디지….”

 
정득모(54)씨는 경력 20년 된 광부입니다. 석탄으로 데우는 히터 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답답하긴 하지만, 정부정책인데 우리가 떠든다고 되는 것도 아니잖아.” 체념한 듯 했습니다. 폐광은 기정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이 시행된 89년부터 말입니다. 폐광 후 생계보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것이 지금으로선 유일한 바람이었습니다.
 
“폐광 후라…. 우리 같은 사람이 무슨 계획이 있겠어. 지금 나이에 직장을 잡을 수도 없고. 뭘 하긴 해야 되는데, 우리한테 맞는 일이 없잖아. 탄 캐는 거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건강? 그렇게 일했으니 다 됐지 뭐. 우리 중 성한 사람 몇이나 되겠어. 여기 문 닫으면 다 병원 간다고 봐야지. 우린 햇빛을 못 보고 일하는데, 광부 그만두고 하루 종일 햇빛 보면 금방 늙어버릴 거야.”
 
담배를 빨며, 잠시 창밖을 내다봅니다. 
 
“내가 서른에 탄 캐기 시작해서 여기서 청춘 다 보냈는데, 80년대만 해도 ‘산업전사’다 뭐다 하더니 지금은 사람 취급도 안 해.”  
 
섭섭함이 묻어났습니다. ‘광부는 산업전사’란 말은,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란 말만큼이나 기만적인 거짓말임을 아주 오래 전에 알아버린 탓입니다. ‘한 달에 이틀만 쉬는’ ‘전사’가 되길 강요했던 그 말, 희생당한 사람들의 ‘냉소’조차 이젠 옛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최정선(50)씨의 웃음은 씁쓸했습니다. 
 
“이것도 마지막 인터뷰고, 사진촬영이 될 거요. 조금 있으면 광부도 ‘천연기념물’이 될 테니까. 허허. 회사 문 닫으면 일단 고용보험으로 견뎌야죠. 겨울철 다가오면 막노동 할 것도 없거든.” 
 
김상근(47)씨가 입사한 지도 벌써 20년째입니다. 탄을 캐는 대신, 막장에서 ‘인차’와 ‘광차’를 몹니다. “이게 20년 된 하이바”라며 그가 작업모를 보여 줬습니다. 검은 탄재가 스며들어 거무튀튀하면서도 반질반질했습니다.
 
더 이상 물을 수 없었습니다. 윤기 나는 작업도구는 석탄과 함께 살아 온 그의 ‘삶’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물을 필요 없는, 땀의 진실 말입니다.    
 
▲ 한 탄광노동자와 20년을 같이 한 장비들은 그 자체로 노동자의 청춘이고, 인생입니다.

 
종이 세 번 울렸습니다. 입갱하란 신호입니다. ‘병반’ 광부들이 작업모를 쓰고 움직였습니다. ‘케이지’(엘리베이터)를 탄 노동자들의 얼굴이 금세 땅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침침한 대기실 창문 사이로, 언덕 위 카지노를 올려다봤습니다. 너무 밝았습니다. 거대한 형광등 덩어리 같았습니다.
 
다시 종이 두 번 울렸습니다. 3시 30분에 내려간 ‘을반’ 노동자들이 온 몸에 탄재를 뒤집어  쓰고 올라왔습니다. ‘케이지’ 문이 열리자, 시커먼 얼굴의 노동자들은 “추워 추워” 하며 대기실 통로를 뜁니다. 후덥지근한 지하에서 땀과 탄가루로 범벅된 몸을 조금이라도 빨리 씻어내기 위함입니다. 11시 50분, 샤워실 창문으로 뽀얀 김이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습니다.
 
▲ 퇴갱한 광부들이 뛰어 들어간 샤워실 밖으로 뽀얀 김이 뿜어져 나옵니다.

 
길, 주인을 잃다
 
10월초, 사북의 한밤중은 춥습니다. 입김도 하얗게 나옵니다. 밤 12가 넘은 시각,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을반’ 노동자들이 탄좌 진입로를 서둘러 내려갑니다.
 
길옆은 죄다 전당포입니다. 탄 캐고 나온 광부들의 목에 낀 먼지를 돼지고기 몇 점으로 씻어주던 선술집들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수십 개의 전당포만 빛을 발산하고 있고, 점포 옆엔 고급승용차 몇 대가 주차해 있습니다. 카지노 ‘강원랜드’에서 돈을 탕진한 사람들이 담보 잡힌 차들입니다.  
 
이 시간, 동원탄좌와 강원랜드는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어둠 속에 묻힌 동원탄좌를 조롱하듯, 탄좌를 내려다보며 강원랜드는 강렬한 빛을 뿜어댑니다. 2003년 4월 들어선 카지노가 점점 ‘괴물’이 돼 가는 동안, 광부들의 삶은 점점 초라해지고 있습니다. 강원랜드가 탄광노동자와 폐광지역 경제를 살린다는 말이 허구였다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광부들과 지역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독약 먹는 심정’으로 유치한 카지노는 고용창출 면에서나, 지역발전 면에서나 ‘사북인들’에겐 접근 불가능한 ‘성채’입니다.
 
▲  탄광 위에서 어둠에 싸인 새벽 탄광을 압도하는 카지노는 거대한 ‘형광등 괴물’ 같습니다.

 
광부들은 카지노를 오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카지노가 세워진 땅은 아직도 한 때 8백 세대의 광부들이 살았고, 그 아들딸을 가르친 초등학교가 있던 삶의 터전일 뿐입니다.  빚내서 놀음하다 패가망신하는 것, 외지인들에게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 터전을 잃은 노동자들은 길을 내려가고, ‘한 판 벌이러’ 온 외지인들은 고급세단을 타고 길을 오릅니다. 내려가고 오르고…, 사북의 주인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병반’ 퇴갱, ‘갑반’ 입갱 (8일 오전 7시 30분)-“우린 푹 썩었어”
 
새날이 밝았습니다.
 
오전 6시 50분, 7시부터 시작되는 ‘갑반’ 근무를 위해 전성만(48)씨가 집을 나섭니다. 그가 아버지를 이어 2대째 광부일을 한 지도 벌써 16년째입니다. ‘쫄딱구뎅이’(하청업체)에서 6년 일하다, 동원탄좌 직영노동자가 된 게 88년 4월입니다. 그는 ‘후산부’로 일합니다. 앞에서 직접 탄을 캐는 ‘선산부’를 돕는 일입니다. 갱목과 쇠기둥을 등에 짊어지고 옮겨야 합니다. 갱을 떠받쳐서 무너지는 것을 막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아내와 사별한 그는 중1, 고1인 두 딸과 함께 삽니다. 어젯밤 술 한 잔 하고 늦잠 잔 덕분에, 둘째 딸 도시락 못 싸주고 나와 못내 맘에 걸립니다.   
 
다른 동료들처럼 그에게도 폐광 후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는 사북을 등질 생각이 없습니다. 이곳이 고향인 그는 끝까지 고향에서 살 방도를 찾을 작정입니다.
 
“타지에 나가서 뭘 하겠어.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여기서 살아야지. 나야 무슨 일을 하더라도, 어떡하든 애들 공부만 시키면 돼. 내 이쁜 새끼들 하고 그렇게 살 거야.”
 
다시 대기실입니다. 아침 작업조여서인지, 120여 명 안팎인 ‘병반’ 근무자보다 많은 200여 명이 모여 있습니다. 전성만씨도 옷을 갈아입고 커피 한 잔, 담배 한 대로 입갱을 기다립니다. 
 
▲ ‘하이바’를 쓰고, ‘케프’를 차고, 장화를 신은  ‘갑반’ 노동자들이 입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그는 올 6월에 받은 정기 건강진단 결과를 통보 받았습니다. 진폐증이 의심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최근 부쩍 숨이 찹니다.
 
진폐증이 의심된다고 해서 병원치료비를 지원 받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진폐가 확실하고, 거기에 합병증까지 겹쳐야 ‘나랏돈’으로 입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퇴직한 그의 아버님도 진폐가 분명하나, 합병증이 없다는 이유로 입원치료를 못 받고 있습니다.  
 
평창이 고향이라는 31년차 동료 광부가 한 마디 거듭니다. 
 
“우린 푹 썩었어. 평생을 탄 캤는데 폐가 다 썩었지. 건강진단 매년 하면 뭘 해. 병원은 이상 없다고 그러는데. 이상 있다고 판정하면 정부에서 돈을 대 줘야 하는데, 좆이나 씨발, 정부에서 돈 대주지 싫으니까 검은 가래가 뭉티뭉티 나오는데도 정상이래. 세 발도 채 못 뛰는데….”
 
그는 한껏 돋우어 가래를 뱉었습니다.
 
전성만씨는 어제 아버님께 연탄 오백 장을 실어다 드렸습니다. 이젠 사북에서도 가난한 주민들 외엔 때지 않는 연탄으로, 겨울 따뜻하게 나시라고 말입니다.
 
종이 세 번 울렸고, 600미터 아래로 전성만씨가 입갱했습니다.
 
▲“땡땡땡!” 입갱 신호인 3회 타종 후, ‘갑반’ 노동자들이 ‘케이지’를 타고 땅 밑으로 내려갑니다.

 
둥지 잃은 ‘기러기 아빠’
 
‘병반’ 노동자들이 퇴갱했습니다. ‘20년 된 하이바’를 보여 줬던 김상근씨가 샤워를 마치고 퇴근 중이었습니다.
 
“일은 힘들어도, 이렇게 목욕하고 나오면 참 개운해요. 빨리 가서 밥 해 먹어야죠.”
 
일을 마치고 지친 상태에서도, 그는 밥을 직접 지어 먹습니다. 아내가 서울로 유학간 아이들 뒷바라지차 가 있기 때문입니다. 
 
“폐광하면 서울 가서 합쳐야죠. 부모 할 일이 자식들 가르치는 거지 뭐 있겠어요. 서울 가서 뭘 할지는 가 봐야 알죠.”
 
 ▲  검은 탄재를 뒤집어쓰고 어젯밤 내려간 '병반' 노동자들이 퇴갱합니다.
 
‘기러기 아빠’ 문제가 심각하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곳만큼 ‘기러기 아빠’가 많은 곳도 없습니다. 광부의 절반이 기러기입니다. 이곳의 기러기들은 가슴이 더 아픕니다. 아이들이 유학이라고 간 곳이 고작 춘천이고 강릉입니다. 가장 사치 부려 가면 서울입니다. 자녀들 ‘외국’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들’, 여기선 명함도 못 내밉니다. 탄광이 문 닫으면, 이곳 기러기들은 보금자리를 잃습니다. 아내와 아이들도 돌아올 둥지가 없습니다.

 
직접 말은 하진 않았지만, 퇴근 후 김상근씨는 고랭지 배추밭에 일하러 가는 듯 했습니다. 이곳 광부들 중엔 그처럼 일이 끝나면 ‘아르바이트’ 해서 생계에 보태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아르바이트가 폐광 후엔 본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거리가 없는 퇴직광부들이나 그 아들들 가운데 일부는 ‘행복이 깃든 곳, 강원랜드’ 진입로 공사를 하며 하루밥을 법니다. 그것도 도급업체를 낀 4개월 계약직입니다. 이 인원수를 십분 활용해, 강원랜드는 지역민 대상 고용창출 비율이 35%라고 말합니다. ‘수치의 속임수’입니다. 폐광하면 이 일조차 동 나고 말테지만 말입니다.    
 
맑아지는 물, 어두워지는 마음
 
‘선탄장’은 막 캐낸 석탄에서 돌과 나뭇조각을 분리해내는 곳입니다. 여성 노동자 비율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10여 미터 높이에서 여성 노동자 몇 분이 석탄에서 떼어낸 폐석을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탄 먼지가 너무 심해 숨을 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수건과 마스크로 얼굴을 감싸고, 이분들은 하루 8시간씩 일합니다.
 
 
10년 가까이 선탄장에서 일했다는 한 여성 노동자는 “힘드시죠?”란 물음에 웃으며 한 마디 합니다.
 
“하는 거 보시면 알죠.”
 
보니, 우스운 질문임을 알았습니다. 커다란 해머로 돌을 깨는데, 돌에서 파편이 튀고 불꽃이 입니다. 여간 위험한 게 아닙니다. 
 
한 층 밑 작업장에서 나무를 골라내고 있던 분은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썼습니다. 대구에서 올라온 지 20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시집가서 바로 올라왔지예. 처음엔 모르고 왔어예. 오다보니까 여기까지 왔네예. 마스크를 쓰고 일해야 하니까 숨이 차예. 그게 제일 힘들어예.”

“회사 문 닫으면 섭섭하시겠어요”란 말에, 이 분 역시 웃습니다. 
“그렇지예. 대구로 내려가야지예.”

 
작업장 사이로 작은 방이 하나 있습니다. 휴게실이라지만 탄재가 마구 날아드는 걸 막지는 못합니다. 그 방 난로 위에 작은 도시락 몇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소박한 밥상입니다. 각자의 도시락과, 숟가락 젓가락, 그리고 물을 담은 주전자 두 개가 전부입니다. 
 
“맛있는 거 싸오셨어요?”

또 웃으십니다.
 


 
‘선탄장’ 밑으론 시커먼 물이 흐릅니다. 사북 아이들이, 물을 그리라는 선생님 말에 물 색깔을 검게 칠했다던 그 물입니다. 이 물이 맑아지면 사북 광부들의 삶도 끝나는 것입니다. 밖에선 탄재가 오염물질이지만, 이곳에서 탄재는 ‘밥’이고 ‘삶의 끈’입니다. 밖에선 탄잿물을 죽은 물이라지만, 이곳에서 검은 탄잿물은 생명수입니다.
 
요즘, 사북의 개울은 점점 깨끗해지고 있습니다.
 

 
‘갑반’ 퇴갱, ‘을반’ 입갱 (8일 오후 3시 30분)-사북, 먼지를 잃다
 
‘을반’이 들어가고, ‘갑반’이 퇴갱을 시작합니다. 전성만씨도 새까매진 얼굴로 올라왔습니다.
 
폐업공고야 10월말에 나겠지만, 노동자들 사이에선 23일 작업이 마지막이 될 거란 말이 돌고 있었습니다. ‘케이지’ 탈 날도 이제 보름 남짓밖에 남지 않은 전성만씨가 카메라를 보고 웃었습니다. 하얀 이를 드러낸 그의 웃음이 검은 얼굴에 대비돼 환해 보이는가 하면, 쓸쓸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틀 뒤인 10일, 동원노조와 그 가족들은 집회를 열었습니다. 10여 년 전, 전투를 방불케 하는 시위 끝에 카지노를 유치했던 그들이었습니다. 폐광 후 살 방도를 찾다찾다 카지노 외에 선택할 다른 대안이 없었던 그들이었습니다. 핵폐기물 매립장 설립까지 추진하다 실패해 ‘어쩔 수 없이’ 도박장에 매달린 그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카지노는 배신했고, 배신당한 그들은 10년 후 초라한 집회를 열어 살길을 달라 간청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카지노에게 말입니다.   
 
“최후의 몸부림이라도 쳐 봐야지, 그냥 이대로 허무하게 승복할 순 없는 것 아닙니까.”

 
정해룡 (주)동원 노조위원장의 말이 아니더라도, 마지막까지 몸부림치는 것만이 남은 유일한 방법입니다.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대단한 게 아닙니다. 폐광 후에도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달라는 것이고, 몇 십 년씩 살아온 사원아파트 부수지 말고 계속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절박하게 말해도 절박하게 듣질 않습니다. 결국 노동자들은 조만간 서울로 올라와 집회를 열 듯 합니다.
 

 세 번째 찾아간 사북은 색깔이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우중충했던 잿빛이 옅어지고 있었고, 사북을 날던 먼지도 점점 걷히고 있었습니다. 사북이 밝아지면서 광부들의 마음은 점점 어두워졌고, 사북의 물이 깨끗해지면서 광부들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석탄은 2억 년은 지나야 만들어지는 연료라고 합니다. 광부들은 그래서 2억 년의 시간을 캐는 사람들입니다. 2억 년의 먼지와 함께 살다, 2년의 카지노 불빛에 밀려 사라지는 탄광노동자들을 보며, 힘겨웠습니다. 이들이 부여잡고 살아온 시간의 무게와 깊이를, 20년 된 작업모에 스며든 땀방울을, 얼굴과 손을 치고 들어가 이젠 살이 돼 버린 탄재의 끈끈함을 알지 못해, 잠깐 소풍온 듯 다녀가는 ‘양아치 기자’는 겨우겨우 씁니다.
 
희망 한 자락, 살아 있는 한 끝까지 놓을 수 없는 이 땅의 마지막 탄광노동자들께, 이 앙상하고 가난한 글을 바칩니다.  
 
 
사진=박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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