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2? 로사(勞使)^^.

로사씨, 암호냐구요? 세상에. 오랜 떠돌이 생활에 피씨방 인터넷 채팅 정도는 기본일 줄 알았더니….

점잖은 것이라면 뭐든 경기부터 일으키는 요즘 아이들 어법 좀 따라해 봤어요. 직역하면 ‘안녕? 로사, 헤헤헤’쯤 되는 셈이죠. 게으름에 겨운 탓이겠지만, 이제사 여쭙는 안부가 조금 민망하여 제 발 저린 도둑으로서는 뭔가 기운칠 너스레가 필요했겠거니 치세요.

살다보니, 어느 덧 세태가 이리 됐네요. ‘사랑하는 로사씨’까지는 아니더라도 ‘보고픈’, ‘그리운’ 정도의 수사는 거들어주어야 편지지의 성마른 감촉을 잊던 우리들이잖아요. 그런 우리들에게 이런 통신용어가 주는 감흥이라곤 기껏해야 낯선 이물감 따위가 고작이겠죠. 그래도 굳이 이렇게 시작하고 싶었답니다. ‘그간 별고 없으신지요?’가 ‘하이(H2)?'로 대체되는 동안, 세상에는 그리 짧지 않은 시간과 변화가 함께 했음을 딴에는 느껴보시라 끄적인 것이죠.

꼭 3천일입니다, 당신을 찾아 헤맨 시간이. 죽어간 열사들이 그리도 살고팠을 오늘의 텅 빈 무게감에 가슴을 쥐어뜯다가도 내일이면 언제고 내일의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족히 3천번의 절망과 희망을 번갈아 곱씹어온 세월이었습니다. 나는 자랐고, 그리움이 말라붙은 가슴은 사막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그대를 불러봅니다.
사랑하는 로사씨,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금번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은 그 내용이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지금의 노동시장 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기업의 경쟁력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어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현실의 경제상황을 감안할 때 지금은 기업의 경쟁력을 회복시키고 강력한 투자유인책을 통해 일자리를 늘려가야 할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취업자의 권익에만 급급하는 민노당의 입법안은 즉각 철회되어야 할 것이다.(경총 2004.7.7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의 비정규 근로자 관련 입법안에 대한 경영계 입장)”
 
“정부의 비정규직입법안이 10일 발표되자 노동계 반응은 그야말로 ‘경악’의 수준. 10일 민주노총은 긴급 성명을 통해 ‘김대환 노동부 장관의 퇴진’과 ‘노동부 비정규직대책과의 해체’를 요구했다.
한국노총도 같은 날 ‘노사정위 탈퇴 고려’를 들고 나와 그나마 노사정의 논의구조에 참여 해 왔는데도 철저하게 배척하고 일방적으로 정부안을 확정한 것에 강력히 항의했다.(매일노동뉴스, 2004.9.13)”

매노(每勞)님, 하이루^^;;

섭섭하군요. 설마하니 암호라 여겼을라구요. 오랜 방랑으로 심신은 애저녁에 결딴났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대한 관심마저 접었을 리 있겠습니까? 일그러졌으나마 방랑도 사람이 사는 모양새이고 보면 세상만사, 그 내밀한 사연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았습니다. 이쯤 되면, 제 인사말은 번역(?)하건대 ‘존경하는 매노씨, 안녀엉, 흐흐흐(진 땀)’정도가 되겠습니다. 어떻게 인사가 되었을런지요?

분명히 기억합니다. 봄날 새순처럼 어렸던 당신. 두툼한 월급봉투 대신 지하철 패스 한 장 달랑 쥐어든 순간에도 그 어이없는 경량감따윈 아랑곳없다는 듯 솜털 같은 포만의 미소를 지어보이던 당신. 서울 도심이건 어느 공단도시의 뜨거운 아스팔트위에서건 저의 각혈이 낭자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와 팔짱을 껴안으며 눈물투성이 사랑을 고백하던 당신을 제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그럭저럭’이라 한다면, 잦은 가사(假死)와 토혈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느닷없겠지만, 언제부턴가 관상어 키우는 낙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좁은 수족관에 유폐되어 독한 수돗물 속을 부유하는 미물들 말입니다. 그 놈들의 슬픈 아름다움을 관조할 때마다 어김없이 제 신세를 떠올렸음을 고백합니다.

매노님께 소개하고픈 놈이 있습니다. ‘베타’라는 이름의 물고기입니다. 다 커봤자 5센티 정도가 고작인 소형열대어로, 파란색이나 빨간색의 원색이 압권인 놈입니다. 열대어 포털사이트에서 처음 이 놈의 자태를 접했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목 부분에서 꼬리까지 부채처럼 넓게 펼쳐진 지느러미와 그 속에 ‘함몰’된 왜소한 몸뚱이가 극단적인 형태의 부조화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대번에 이 놈이 좋아졌습니다. 당장 청계천 물고기 상가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또 한번 놀라야 했습니다.

어느 가게건 입구를 들어서면 좌우로 축양장이, 그 속에 소형수조들이, 그 속에 열대어들이 가득 차 있기 마련입니다. 손님의 시선이 가장 쉽게 머물만한 지점 어디쯤의 수조에서 베타란 놈이 화려한 원색을 뽐내고 있으리라 여겼던 저의 상상은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주인은 저에게 쪼그려 앉아야 겨우 보일 듯한 축양장 하단의 낡은 수조를 가리켰습니다. 거기엔 사과 한 알 크기나 될까 싶은 비닐봉지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습니다. 들여다보니 물이 절반쯤 담긴 봉지마다 베타가 정확히 한 마리씩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토록 아름다운 베타가 이 후미진 곳에서 비닐 따위에 갇혀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주인이 그러더군요. 베타는 합사가 불가능한 물고기라고 말입니다. 일부의 솜씨 좋은 고수들이 다른 어종과의 합사에 성공한 사례도 있긴 하지만, 같은 베타끼리는 절대 불가능하다며 손을 내저었습니다. 둘 중 하나가 죽어 그 아름다운 지느러미가 걸레가 될 때까지 싸움을 그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베타는 자기 이외의 그 어떤 아름다움도 허용하지 않는 물고기였습니다. 저는 그날 빈손으로 청계시장을 떠나왔습니다.

존경하는 매노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의 오랜 방황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죠. 저는 다름 아닌 그 곳, 청계시장의 어느 낡고 더러운 수조의 비닐봉지 속에 오롯이 들어 앉아 있었습니다. 합사불능의 베타, 그것이 저의 이름이었습니다.
추신 : 여전히 아름답겠죠?
 
‘베타라는 이름의 물고기’에게

로사씨의 답장에 뛸 듯이 기뻤습니다. 우리의 슬픈 3천일을 기념하는 뜻으로 선물을 하나 청할까 합니다. 베타를 키우고 싶어졌어요. 가능할까요?
추신 : 당근입니다.
 
로사(勞使)가 매노에게

가능합니다. 베타는 키우기 쉬운 물고기니까요. 먹이를 많이 먹지 않아 물을 자주 갈아줄 필요가 없고, 움직임이 많지 않아 작은 공간에도 잘 적응합니다.

좋은 세상입니다. 생물도 택배가 되니까요. 튼튼한 놈으로 직접 골랐으니, 배달 중에 죽을 염려는 없을 겁니다. 인공사료와 어항으로 쓰십사 와인(wine)잔을 동봉합니다. 크기를 봐서도 아시겠지만, 제법 비싼 겁니다. 거기에 3분의1정도만 수돗물을 받아 하루를 묵히세요. 그리고는 비닐봉지 속에 든 물과 베타를 함께 집어넣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 바닥 용어로 인사드리지요. 즐거운 물 생활 하십시오.
 
합사의 꿈을 잃지 않은 이에게

소포를 뜯다말고 한참을 고민했었어요. 로사씨의 의도가 무엇인지 선뜻 알기 어려웠거든요. 하지만 곧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지난한 사랑이 어디로 향해가야 하는 것인지, 해답은 바로 그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두 마리의 베타, 소중히 잘 받았습니다.
 
오늘부터 저는 새로운 꿈을 꾸어볼까 해요. 제가 꾸는 꿈의 제목은 대충 이런 것일테죠. ‘다른 베타와의 합사’.

와인 잔에서는 이미 파란색의 베타가 도도한 유영을 시작했군요. 급한 대로 맥주잔에 넣어둔 빨간 베타도 파란 놈의 동태를 물끄러미 관망하고 있습니다.

유난히 큰 지느러미 탓이었을까요? 순간, 저의 눈에 들어오는 이 놈들의 유영은 헤엄이 아니라 꼭 ‘펄럭이는’ 것 같았습니다. 자세히 쳐다봅니다. 사실입니다. 두 마리의 베타가 서로를 마주보며 미친 듯이 펄럭이고 있습니다. 켜켜이 쌓인 대립과 갈등의 퇴적층을 뚫고 솟구친 깃대위에서 힘차게 나부끼는 깃발처럼. 독존의 봉인(封印)을 깨뜨리려 한사코 한사코 버둥거리는 선무당의 아린 춤사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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