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온 이는 추억담을, 떠날 이는 미리부터 들뜬 마음을 갖고 있을, 또한 떠나기 ‘어려운’ 이는 폭염과 맞서며 일상을 지키고 있을 요즈음이다.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은 “무더운 여름만큼은 ‘펄프(종이)’를 보기보다 나무보는 시간을 가질 것”을 권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선풍기 앞에서, 계곡에서, 바닷가에서, 때론 푹푹찌는 천막농성장에서 한 권의 책을 읽는 것도 좋은 피서법이리라. <매일노동뉴스>는 이틀에 걸쳐 한 여름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양서들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더위가 막 시작될 무렵, 파업 현장을 따라다니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한 달 이상 버티며 파업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 앞에 서면 차마 할 말이 없다. “고통스러울 때는 우리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견뎌내자”고 우선 말문을 연다.

돈 좀 있는 사람들은 외국으로 나가고, 그렇지 못하다 해도 최소한 동해바다 한 번쯤은 보고 올 계획을 세우는 휴가철에 혼자 ‘방콕’ 신세를 면할 수 없는 처지라면 자신보다 더 불행한 휴가를 보내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견디는 것도 한 방편이다.



‘입말’이 살아 있는 청계천 이야기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에서 펴낸 르뽀집 <마지막 공간>은 바로 그런 책이다. ‘르뽀문학교실강좌’의 수강생들과 ‘삶이 보이는 창’ 르뽀모임이 10개월에 걸쳐 청계천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했다. 교사, 사회복지사, 시인 등의 직업을 가진 12명의 글쓴이와 2명의 사진가는 황학동, 밀리오레, 러시아 타운, 평화시장, 광장시장, 세운상가를 돌며 청계천 언저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반평생 고물만 모으며 살아온 고물수집중개상, 붕어 파는 아저씨, 러시아 의류상인 아주머니, 아동복 하청공장 범식이네 등은 글쓴이들을 만나 자신들의 이야기를 고즈넉하게 들려준다. 입말이 그대로 살아있는 청계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읽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복원’이라는 명분으로 시작해 ‘개발’로 이어진 청계천 공사는 사람들의 삶터를 빼앗았다. 사람을 쫓아낸 그곳에는 이제 조경시설과 놀이터가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쫓겨난 이들의 삶에서 발견한 것은 절망이 아닌 ‘인간의 품위’였다고 글쓴이들은 말한다.

힘겨운 사람들의 희망과 용기

기왕에 르뽀문학을 손에 잡은 김에 <내일로 희망을 나르는 사람들>까지 내처 읽어볼 것을 권한다. ‘우리 이웃의 희망을 찾아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숨겨진 한국 여성의 역사>와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로 알려진 박수정씨가 “왜인지, 무엇인지 확실한 답을 할 수는 없지만 가능한 낮고 작고 소리 없는 곳”을 찾아다니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학사’에서 펴냈다.

한평생 몸 누일 집을 찾아야 했던 여든일곱 살 할머니, 영등포역에서 만났던 노숙인, 철거지역 공부방 어린이들, 비전향 장기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자신보다 불행한 이웃을 위해 다시 옷깃을 여미고 신발 끈을 고쳐 매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피서를 가지 못한 불만쯤은 저 멀리 사라진다.

더운 여름철에 방구석에서 책을 붙들고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지는 것은 가방 끈 긴 배운 놈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만화책을 읽어도 좋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인간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돈이 많은 인간'과 '돈이 없는 인간'으로… 많이 배운 사람들 역시 인간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유식한 인간'과 '무식한 인간'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들도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을 갖고 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으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던져본 적이 있는 인간과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인간으로…

단편만화의 따뜻한 시선

‘청년사’의 만화작품선 4번째 책 <박흥용>은 우리들을 최소한 ‘다른 사람의 불행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만화책이다. 80년대 중반, 만화가 만화방이라는 막힌 공간을 탈출해 <만화광장>과 <주간만화>라는 잡지를 통해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가던 시절, 가장 빼어난 단편만화 작가 중의 한 사람인 박흥용은 인간의 상처에 대해, 가난의 슬픔에 대해, 그리고 암울한 시대에 대해 발언하는 작품을 여럿 발표했다. 이번 단편집 <박흥용>에서는 86년에서 92년까지 발표한 18편의 단편을 묶었다.

초기 작품의 치열한 고민과 이웃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읽어낼 수 있는 작품들이 갖는 일관된 특징은 ‘돌아봄’이다. 박흥용은 이웃에 대해, 나에 대해, 역사에 대해, 도시에 대해 끊임없이 돌아보고 질문한다.

철거되는 판잣집, 시멘트 포대를 사 가루를 털어내는 삼양동, 경찰서 유치장, 이태원의 밤거리, 옥탑방, 교통사고 환자들이 모여 있는 작은 병실. 광주민중항쟁을 진압했던 군인... 한국 만화에서 의도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던 공간에서 복작거리고 사는 사람들을 돌아본다. 그것은 약한 자들이 서로를 돌아보고, 그리고 보듬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박흥용>에 대한 소개는 <한겨레> 이유진 기자와 만화평론가 박인하의 글에서 부분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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