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법 개악 당시 진보정당 필요 절감...“내 작품은 작품으로 평가해야”
“노동자, 철거민 투쟁 그 자체로 드라마”...언젠가 영화 속에 등장할 것


영화 <살인의 추억>을 다시 떠올려본다.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장면. 바로 끔찍한 어둠을 만들던 등화관제 훈련이다. 살인자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시골마을마저도 ‘국민여러분.. 여기는 민방위 본붑니다’라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불빛 하나 없는 무시무시한 어둠으로 몰아버린다. 전쟁의 위험에 대비 한다는 등화관제훈련은 끔찍한 살인흉기가 되고 이 시대 공권력은 학생들 집회를 막는데 경찰 병력을 죄다 투입하느라 살인마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나약한 여성들을 외면한다. 그 서슬퍼렇고도 나약한 국가의 실체라니!

켄 로치에게 희망을 본다면 그도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을까? 그는 특히 ‘브레스트 오프’나 ‘빌리 엘리어트’ 등과 같은 노동자들과 노조들의 투쟁을 다루면서도 인간미와 위트를 잃지 않는 그런 영화들에 대해 “매우 대중성이 뛰어난 작품이다”고 평가한다.

“내가 만들면 그것보다는 좀 심각하려나? 난 학교 다닐 때 접한 현대중공업노조의 골리앗 투쟁이 아직도 인상적이다. 80년대 철거민들의 투쟁도 매우 영화적인 현실이다. 그런 노동자와 서민들의 모습은 매우 ‘드라마틱’해서 충분히 대중적 영화로 만들 만하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봉감독은 언젠가는 이런 소재로 영화를 만들 작정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고 한다.

영화 속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아닌 영화를 만드는 노동자들에 대해 물어봤다. 사실 그 자신도 조감독 시절 7~8년간은 거의 ‘극빈자 생활’이었단다. 그 시절 2년 작품기간에 받은 돈이 겨우 650만원이었다.
“한국영화계 스탭들의 처우개선 문제는 반드시 노조를 조직해서 가야겠지만 어려움이 만만치 않을 거다. 다른 영역에서 그만한 전문성을 가지고 노동을 한다면 터무니없는 보수다. 합리적인 임금구조로 개선하려면 일단 제작자가 키를 쥐고 있다고 하겠지만 무엇보다 도제시스템을 바꾸고 전문인력으로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는 영화에 대한 열정과 꿈으로 열악한 현실을 견뎌내는 현재의 구조로는 스탭들의 임금 개선은 불가능하며, 꼭 감독이나 프로듀서로의 입문이 아닌 ‘전문 조감독’ 제도를 육성해야만 합리적인 임금구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 스탭이던 ‘극빈자 시절’, 결혼식 촬영 등의 아르바이트를 해 가며 근근이 먹고 살았다던 그는 민주노동당의 공약 중에 무상교육 정책이 가장 ‘솔깃’하단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아빠이기도 한 그는 어떠한 사교육도 시키지 않고 있는데 오히려 아이가 불안해 한다는 것. “우리 같은 영화인들이야 원래 돈과 권력에 무심한 사람들이라 부유세 징수 대상이 될 일은 없을 거다”며 농을 한다.


“문성근, 명계남 선배 존경”...경쟁하며 제역할 해야

지난 2002년 대선 때 ‘노사모’활동을 주도적으로 했던 문성근, 명계남 씨에 대해 봉감독은 “존경하는 선배들”이라고 말한다.

“한 분야에서 성과를 이룬 선배이고 스타다. 먼저 정치적 신념을 밝히고 활동했던 분들이고. 어떤 당을 지지하느냐는 개인의 성향이니까. 좋은 의미의 ‘경쟁’을 통해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본다. 분명히 차별성은 있다. 민주노동당은 한국영화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나 같은 상업영화 감독이 꼭 운동성을 담은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송환>같은 다큐멘터리가 있지 않나. 그런 의식적인 작품이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정책을 보완해서 지켜내야 한다.”

그는 상업영화 일색의 문화환경에서 민주노동당이 정책적으로 진보적 문화를 양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존경하는 선배들’과 경쟁적 관계로 한국영화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당연한 말이다. 이미 문화는 가장 정치적이다.


마지막으로, 평소 궁금해 하던 것 하나를 물었다. <살인의 추억>에서 박해일이 학생운동권 출신의 ‘위장취업자’ 캐릭터라는 ‘설’에 대해서 물어봤다. 봉 감독 왈, “사실은 그 사람이 실존하는 인물이었노라”고 털어 놓는다.

“철저하게 숨겨왔는데 당시 화성연쇄사건 조사과정에서 정말 DNA 검사까지 받은 실제 용의자였다. 박해일의 이미지와 유사하게 다른 용의자와는 달리 매우 샤프하고 유재하 음악을 좋아하는 섬세한 공장노동자였다. 알고 보니 97년에 건강이 좋지 않아 죽었더라. 그래서 고인과 가족에게 폐가 될까 더 숨겼다.”

‘위장취업자’라는 설정은 터무니없는 거라고 말하는 그는 진짜 언젠가는 노동자나 철거민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 거라고 했다. 그가 ‘한국의 켄 로치’로 돌아오는 날, 다시 ‘봉준호가 그린 노동자 서민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고 졸라볼 참이다.

김경란 기자 (eggs95@lab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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