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지역 노동자 주거권 실천단’이 지난 4월5일 진행한 ‘2023 주거권 서울시티투어’에서 참가자들이 용산 철도 정비창 부지의 문에 “내놔라 공공임대” “팔지마 공공의 땅” 등 문구가 적힌 쪽지를 붙였다. <빈곤사회연대 홈페이지>

“아파트보다 저렴하면서도 인프라가 갖춰져 있어 상대적으로 저렴한 전셋집으로 이사했어요. 그런데 뉴스에 나오는 일이 닥쳐서 그저 막막한 생각만 듭니다. 계약기간이 끝났는데도 보증금을 반환해 줄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눈앞이 깜깜해졌어요.”

경기도 용인의 한 도시형 생활주택에 거주하는 직장인 공현기(41·가명)씨는 2년 계약 만료를 앞둔 지난달 임대인인 소형 건설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집이 경매에 넘어가 보증금 2억6천만원을 돌려주기 어렵다는 것이다. 법원경매정보를 보니 대부분 세대가 경매 목록에 올랐다. 공씨는 법원에 배당요구를 했지만, 언제 보증금을 돌려받아 언제 이사할 수 있을지는 기약이 없다. 경매 낙찰가가 전세금보다 낮아지게 됐을 때 손해는 불가피하다. 그사이 한 달 대출이자 70여만원은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집이 ‘시한폭탄’이 된 셈이다.

공공임대 부족, ‘분양’ 정책은 투기 악순환

최근 불거진 전세사기 같이 주거 문제는 우리나라 부동산 정책의 부작용이 한데 모여 생긴 집합체라는 비판이 나온다. ‘주거 불평등’은 무려 50년 이상 이어진 난제다. 민간 중심의 주택공급은 ‘부동산 자산 격차’로 그대로 이어졌다. 오랜 기간 이어 온 문제인 만큼 해법도 간단하지는 않다. 하지만 집을 소유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인식을 주거 공간으로 바꾸려면 ‘공공’ 역할이 중요하다는 데에는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정부와 기업 위주에서 노동자 주도로 패러다임이 전환돼야 한다는 요구도 크다.

먼저 ‘공공임대’ 특히 ‘장기(영구) 공공임대’가 대표적 구원투수로 꼽힌다. 서울지역 노동자 1천227명을 대상으로 한 2021년 민주노총과 한국도시연구소의 주거실태조사에서 응답자 55.8%는 공공임대주택에 입주 의사를 밝혔다. 특히 비정규직과 무주택자에서 공공임대주택 필요성 응답이 두드러졌다. 비정규직의 63.5%가 입주를 희망했는데, 정규직(49.7%)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았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의 공공주택 정책은 ‘임대’보다는 ‘분양’에 방점이 찍혀 있다. 공공브랜드 ‘뉴:홈’을 통해 2027년까지 50만 가구를 공급하는 것이 목표다. 반면 공공임대주택(10만호)은 문재인 정부(13만호)보다 축소됐다. 정부는 올해 공공임대 관련 예산도 전년 대비 28% 삭감된 5조7천억원가량으로 줄였다. 이후 국회에서 6천600억원만 증액된 채 통과됐다.

공공임대주택 공급량은 부족하다. 국토교통부는 2021년 10년 이상 장기공공임대주택 재고율이 8.9% 수준으로 추산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6.9%를 상회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도시연구소 분석 결과 10년 후 분양전환주택과 전세임대를 제외하면 지난해 공공임대 재고율은 약 5.8%다. 2021년(5.5%)보다 0.3%포인트 상승하는 데 그친다. 임대기간이 6~10년 사이인 행복주택을 제외하면 수치는 더 떨어진다.

‘장기’ 공공임대 확대, ILO 권고안 부합

부동산 전문가들은 ‘공공임대’를 늘려야 노동자 주거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은 “공공성이 담보된 주택들이 기본으로 깔려야 시장의 통제나 경기변동의 영향을 덜 받는다”며 “박근혜 정부는 행복주택 20만호를 공급한다고 발표했고, 문재인 정부 때도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을 추진했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이 있다. 공공성이 높은 주택을 최대한 확보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장기’ 공공임대주택을 더 공급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김윤상 경북대 명예교수(행정학)는 “투기적 가수요에 의해 주택시장에 거품이 끼다 보니 토지 불로소득을 차단할 방법이 필요하다”며 “투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영구임대주택이나 토지임대형 주택, 환매조건부 주택 등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성영 희년함께 토지정의센터장도 “우리나라는 토지의 약 90%를 국가가 소유한 싱가포르처럼 공공분양을 하기 어렵다. 대부분 금수저 청년들이 가져가기 때문”이라며 “정부 주거정책은 주거 마련이 목표이므로 공공임대 재고량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공임대주택 활성화는 국제노동기구(ILO)가 1961년 채택한 ‘노동자주택 권고안’과도 부합하는 정책이 될 수 있다. 권고안은 “공공당국은 임대주택 계획에 직접 자금을 지원하거나 재정 지원을 제공해야 하며, 특히 새로 형성된 가장·독신자·경제의 균형 발전을 위해 재정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국가가 노동자 주거 프로그램을 위해 재정을 정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얘기다.

‘노동자주택’ 정부가 매입해 공급해야

노동자의 주거 문제를 직접 지원하는 방안도 해결책으로 떠오른다. ‘노동자주택’이나 ‘사택’을 대안으로 꼽을 수 있다. 노동자들은 대부분 주거지원을 희망한다.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한국도시연구소가 2021년 실시한 ‘서울지역 노동자 주거실태조사’에서 응답자의 74.7%가 사원임대주택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동안 정부는 근로자주택 공급을 추진해 왔다. 2019년 박신영 한국행정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이 국토연구원 세미나에서 발표한 ‘매입 임대주택을 활용한 중소기업 사원주택 공급방안’에 따르면 1990년 200만호 추진 예정이었던 근로자주택은 14만3천호 공급에 그쳤다. 이후 초기 의무임대 기간이 50년에서 5년으로 단축됐고, 2009년 이명박 정부에서 일반 분양이 가능하도록 규제가 완화돼 2019년에는 사원임대주택이 1만5천209호에 머물렀다.

정책은 중소기업 노동자 지원에 초점이 맞춰졌다. 2016년께 중소기업에서 5년 이상 근무한 노동자를 대상으로 국민주택과 행복주택 591호를 공급하기로 했다. 2018년 11월에는 ‘중소기업 근로자 전용주택(청년형·신혼부부형·가족형)’ 3천호 공급을 추진하면서 주거지원이 꼭 필요한 지역에는 행복주택을 우선 공급하는 방침을 세웠다.

올해는 중소벤처기업부가 중소기업 장기근속자(재직기간 5년 이상)에게 주거전용면적 85제곱미터 이하의 국민·민영 주택을 공급물량의 10% 범위에서 일반 청약자와 경쟁 없이 공급하는 ‘중소기업 장기근속자 주택 특별공급’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직주근접성’을 고려해 정부가 공단이나 도심 내 기존주택을 매입해 노동자들에게 공급해야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서울지역 노동자 주거실태조사 결과 발표 토론회 및 증언대회’ 보고서는 “공공이 매입시 회사가 매입비용 일부를 부담해 공공으로부터 임대받아 노동자들에게 더 저렴하게 재임대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원·하청 손잡고 기금 조성, 격차 해소

‘공동근로복지기금’을 활용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대기업에 주로 조성된 사내복지기금은 노동자 간 불평등을 양산한다는 문제로, 2016년부터 둘 이상 사업주가 공동으로 기금을 조성하는 ‘공동근로복지기금제도’가 도입됐다. 원청이 참여해도 경조비 지원 등 기초적인 복지에 그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컸다.

전문가들은 원청에 기금 출연 의무를 지우고 지역 중소기업의 기금 조성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한솔 이사장은 “노조 기금을 활용하면 LH가 독점하는 공공주택 등에 대한 취약점을 상당수 보완할 수 있다”며 “외국의 사회주택처럼 주거모델로 활용할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업무용 기업 토지와 교통 여건이 좋은 곳에 노동자주택을 짓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하늬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 사무차장은 “사업장 단위 단체교섭이나 복지기금만으로 접근하면 사업장 규모에 따라 격차가 커질 것”이라며 “사내근로복지기금법 개정에 따라 복수 사업자가 기금을 조성할 수 있게 됐다. 원·하청과 중소기업들이 함께 기금을 마련해 노동자 복지 격차를 줄이는 방안을 활성화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나아가 기금 조성 주체를 지방자치단체까지 확장해 소규모 사업장이나 불안정 노동자 밀집지역 노동자를 지원하는 방안도 고민해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노조, ‘일제시대 세입자 운동’에서 배워야
독일, 세입자단체-임대인단체 표준임대료 협상

노조가 직접 주거문제 해결에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실제 2021년 9~10월 서울지역 노동자 주거실태조사에서 응답자 10명 중 8명이 △주거 관련 법률지원·상담 및 정보제공 △정부에 주거지원 요구 △사회연대를 통한 노동자 주거권 의제 확장을 노조에 요구했다. 노조가 회사에 주거지원을 요구해야 한다는 비율도 74.1%에 달했다.

노동자들의 주거권 의제화 욕구가 높은 것이다.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다.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는 올해 초 ‘서울지역 노동자 주거권 실천단’ 준비모임을 꾸렸다. 주거권 실현을 위한 노동·시민사회 연대를 활성화하고 서울지역 노동자 주거권 보장과 공공주택 확충 요구를 전면화한다는 목적이다.

실천단은 노조 주도로 만들어진 세입자협회가 임대인단체와 집값을 협상하는 모델을 그린다. 독일 사례를 본떴다. 1880년대 설립해 130만 회원을 둔 독일 세입자협회는 2년마다 시 정부·임대인단체와 함께 표준임대료 작성에 합의한다. 시의회가 입법을 거쳐 임대료를 정한다. 우리나라도 이미 100년 전부터 세입자 운동이 전개됐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평양 차가인(임차인) 동맹은 “비싼 집세·땅세를 내리자”고 선언했다. 당시 일본은 임차인과 임대인의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하는 차지법과 차가법을 시행했다. 하지만 조선 탄광촌에서는 일본 사업주만 보호받았고, 세입자인 조선인들은 차별받았다. 이를 바로잡자는 목소리였다.

실천단은 현재도 충분히 노조가 주도하는 주거정책 운동이 가능하다고 전망한다. 김하늬 사무차장은 “평양 차가인 동맹이 주도해 만든 세입자단체와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독일처럼 표준임대료 협상을 통해 도시 임대료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운동의 형성을 위해 주거권 실천단이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주거권은 보편적 권리,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

노사 교섭 의제로 주거권이 전면화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프랑스 모델이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프랑스의 경우 20명 이상 사업장은 1년간 인건비의 최소 1%를 사회주택 주택건설 기금으로 출연하도록 했다. 대신 기금을 출연한 기업은 노동자용 사회주택을 요청할 권리를 가진다. 우리나라로 치면 기업이 노동자주택을 정부로부터 공급받는 것이다. 기업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에게 값싸고 안전한 거주지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공동근로복지기금 활용도 고민하고 있는 방안 중 하나다. 원청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들이 함께 조성하는 공동근로복지기금을 활용해 작은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주거취약 노동자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방안이다. 지자체까지 기금 조성 주체로 확장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하늬 사무차장은 “과거에는 사업장 단위의 임금교섭에서 주거비를 반영해 임금을 인상하는 방식으로 노조 조합원들은 주택가격 폭등 피해를 방어할 수 있었지만, 구조적 문제에 대응하고 개선하는 노력은 부족했다”고 성찰했다. 그러면서 “사업장 단위로 접근하면 사업장 규모에 따른 노동자 간 격차가 커질 수밖에 없다”며 “임금협상을 통해 조합원의 주택 구매력을 높이는 것을 넘어 주거권이 보편적 권리로 보장되지 못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다양한 주택제도를 정부와 노동계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빌라왕’ 피해자인 이철빈(30)씨는 “전세사기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전세 제도에서 벗어난 다른 주거모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며 “시장 논리에만 맡겨 임차인들이 갈 곳 잃는 상황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공공임대주택·사회주택 등 다양한 주거정책으로 적정 비용만 내면 도시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보다 주거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돼야 한다. 인천 부평구 한국지엠 공장에서 일하는 사내하청 노동자 이정민(31·가명)씨는 이렇게 말했다. “일하지 않고 집을 사고팔며 시세차익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은 강력히 제재해야 합니다. 스스로 노동하는 사람들이 집 문제로 피해 보지 않고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주거야말로 무엇보다 노조의 능력을 보여야 할 부분이다.

홍준표·강예슬·임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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