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병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대거 양산되기 시작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2022년 8월 근로형태별 부가조사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비정규직 규모는 897만명이었다. 전체 임금노동자 중 차지하는 비중은 41.3%였다. 이마저도 위장 자영 노동자와 간접고용 노동자가 과소 추정된 것이다. 그리고 간접고용, 기간제·단시간부터 특수고용, 플랫폼·프리랜서 노동 등까지 비정규직은 규모가 커졌을 뿐만 아니라 그 형태도 다양해졌다.

비정규직 확대는 여러 사회 문제를 낳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꾸준히 확대됐다.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도 안 된다. 그리고 비정규직은 노동기본권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앞서 언급한 분석에 따르면, 비정규직 노조조직률은 3.1%로 정규직 노조 조직률(18.9%)의 6분의 1 수준이다. 비정규직은 노동자로 인정받기 힘들고, 설사 인정받는다 해도 협상할 사용자가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산재공화국이라는 오명 역시 비정규직 확대의 결과다. 위험은 자꾸 아래로 외주화하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가 대두된 지 20년이 더 지났다. 그간 비정규직 문제는 크게 개선된 바 없다. 그러나 그 심각성과 원인에는 대체로 공감대가 형성됐다. 노회찬재단과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지난 주최한 ‘불평등 사회 국민 인식조사’ 결과 발표회(엠브레인 퍼블릭 의뢰, 18세 이상 시민 2천명 대상, 지난 2월3일부터 같은달 20일까지 설문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 규모가 늘어간 것이 양극화의 주된 원인이다’는 질문에 동의하는 비율은 58.5%였다(반대 11.1%). 그리고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 되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 차이 때문이다’라는 질문에 반대 의견은 62.6%로 37.4%인 찬성 의견보다 월등히 높았다. 비정규직 문제는 개인의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로서 양극화의 주된 원인이며 시급하게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 다수 시민이 동의한 것이다.

시민들은 노동시장의 세 주체인 노사정 모두 비정규직 문제에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사업주는 ‘비정규직 규모가 늘어난 것이 양극화의 주된 원인이다’라는 질문에 동의하는 정도가 다른 종사자 지위 집단보다 낮았고,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 되는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정도는 높았다. 그리고 노동시장 일자리 및 비정규직 문제 심각성 인식과 비정규직 문제 정책 대안에 대한 동의 정도는 낮은 것으로 나왔다. 이외에도 사업주가 비정규직 문제 개선에 반대하는 경향이 조사 전반에서 나타났다.

정부는 어떨까? 시민들은 향후 5년 동안 비정규직 규모가 증가할 것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했고, 정부의 비정규직 문제 해결 노력이나 그에 따라 예상되는 성과에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정부가 기업의 편만 든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72.9%나 됐다. 이러한 인식은 그간 정부가 보여 온 반노동적 행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노동시장 양극화의 원인을 노조에 돌렸으나, 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대안은 제시하지 못했다. 노조 때리기를 통해 지지율 제고에 앞장설 뿐이었다. 그리고 주 69시간제와 같이 노동 현장과 심각하게 괴리된 정책을 내놓았다. 노동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친자본적, 인기 영합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노조 역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노동조합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라는 질문에 45.9%의 시민은 부정적이었다. 긍정은 15.4%에 불과했다. 그리고 부정적으로 답한 시민들의 양대 노총에 대한 호감도는 10% 이하였다. 시민들의 이러한 인식은 노동조합과 정규직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했다. 노동조합이 전체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운영된다고 보는 비율은 고작 11%였다. 그리고 현재 노동조합 운영이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 보호’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답변은 5.8%에 불과했으나, 그것에 향후 중점을 둬야 한다는 답변은 34.7%였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필요성은 사회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러나 노사정은 그러한 기대에 부합하지 못했다(적어도 시민들이 인식하기에는 그랬다). 당위가 곧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옳음이 곧 좋음은 아니다. 우리는 옳은 일이기에 행동하기도 하지만, 내게 이익이 되기에 행동하기도 한다. 시민들이 인식한 노사정은 후자였다. 사업주는 이윤 동기에 따라, 정부는 친자본적이고 인기 영합적으로, 노조는 물질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고 봤다.

시민들은 노조의 행태에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노조의 필요성에는 79.6%가 동의했다. 미우나 고우나 노조에게서 변화의 추동 가능성을 엿본 게 아닐까 한다. 옳음을 내팽개치고 좋음에만 반응하는 물질주의를 완화하기 위해 노조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 옳을 뿐만 아니라 결국 대다수 노동자에게 좋다는 걸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려는 노력 없인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ilecd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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