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다혜 변호사(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또 노동시간이다. 정부의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에 대한 논의가 쏟아지는 와중에 굳이 글을 보태는 이유는, 정부 발표나 관련 언론보도 등에서 마치 과로산재 인정기준이 1주 평균 64시간 근무인 것처럼 잘못 언급되고 있어서다. 64시간 상한을 건강보호 조치라고 선전하든(정부), 산재 인정기준을 넘은 69시간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정부안을 비판하든(일부 언론) 자칫 1주 평균 64시간 상한을 준수하면 괜찮다고 오해될 여지가 있다. 최소한 현재의 규범과 그에 대한 판단을 정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우리 법은 ‘과로’에 대한 개념이나 판단요건을 정하고 있지 않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과 고용노동부 고시를 통해 과로로 인한 업무상 질병(뇌혈관질병 또는 심장질병)의 인정기준을 예로 들고 있을 뿐이다. 노동부 고시는 단기간·만성적 과로에 이르게 할 정도의 업무의 양·시간·강도·책임 및 업무 환경의 변화 여부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사항으로 노동시간과 다양한 업무부담 가중요인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중 노동시간 기준은 기본적으로 1주 평균 52시간이다. 발병 전 12주간 1주 평균 업무시간이 52시간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업무시간이 길어질수록 업무와 질병과의 관련성이 증가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특히 업무부담 가중요인(근무일정 예측이 어려운 업무, 교대제, 휴일 부족, 유해한 작업환경 노출, 높은 육체적 강도, 시차가 큰 출장, 정신적 긴장 등)이 있는 경우에는 업무와 질병과의 관련성이 “강하다”고 평가한다. 또한 발병 전 12주간 업무시간이 1주 평균 60시간(발병 전 4주간 1주 평균 64시간)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업무와 질병과의 관련성이 “강하다”고 평가하는데, 이것은 사실상 당연인정기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와 같은 내용들은 예시적 규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위 기준에 미달한다고 하더라도 업무상 질병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 법원의 일관된 판단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시적 규정마저도 축소·발췌돼 ‘64시간’이라는 기준만 달랑 남아 논의돼서는 안 된다. 거칠게 말하면 이만큼 일하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이 당연히 인정되는 수준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가 이번 개편안을 통해 장려하는 ‘몰아서 일하기’(집중근무)는 대표적인 업무부담 가중요인인 ‘근무일정 예측이 어려운 업무’에 해당한다. 즉 64시간 기준만으로도 이미 업무와 질병과의 관련성이 “강하다”고 평가되는데 거기다 업무부담 가중요인까지 얹는 안을 낸 것이다.

당연하게도 근로복지공단과 법원은 과로 또는 장시간 노동을 판단할 때 64시간이라는 낡은 잣대를 사용하지 않는다. 근로복지공단 근로복지연구원이 2020년 펴낸 ‘과로사 요양결정 사례 분석’ 중 12주간 주평균 업무시간별 뇌심혈관질병 승인 현황을 보면 전체 승인 건의 23.1%가 52시간 미만, 30.8%가 52시간 이상 60시간 미만, 46.1%가 60시간 이상의 경우다(2019년 기준). 심지어 노동부 고시의 노동시간 기준은 64시간이든 52시간이든 더 이상 법원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아래 판결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제조업 사업장에서 제품 출하 및 포장 업무를 담당하는 57세 남성(1주 평균 45시간)은 한랭온도·소음·분진 등 유해환경에 노출된 채 연장·휴일근무 등을 포함한 빈번한 집중근무를 수행해 업무상 과로로 인해 뇌내출혈 발병함.(울산지방법원 2019구단818 판결)

놀이공원 매표소 운영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25세 여성(1주 평균 50시간)은 성수기 집중근무 등 장시간 노동, 고객응대 업무, 부족한 휴게시간 등 업무로 인한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모야모야병 발병.(서울고등법원 2019누37945 판결)

약 20년간 우체국 집배원으로 근무하며 오토바이로 우편물·소포 등 배달업무를 담당한 노동자(1주 평균 57시간)는 과도한 업무량과 강도, 상시적인 초과근무 및 휴일근무, 고객 민원 대응 등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뇌경색 발병.(부산고등법원(창원) 2016누11783 판결)

공사현장 배관공으로 30년간 일한 남성(4주간 1주 평균 46시간, 12주간 1주 평균 37시간)은 일용직 노동자로서 일정하지 않은 업무 스케줄, 한랭온도, 위험한 작업현장, 촉박한 공사일정으로 인한 업무강도 증가로 육체적 과로 및 정신적 스트레스가 발생했고 심부전으로 사망.(서울행정법원 2019구합82905 판결)

초등학교 야간경비원으로 근무하던 노동자(4주간 1주 평균 52시간, 12주간 1주 평균 57시간)가 7일간 연속으로 근무하던 중 뇌경색증 등이 발병해 사망한 사례에서 단속적 업무라고 하더라도 업무상 과로 및 스트레스와 질병과의 관련성이 강하다고 평가.(대법원 2021두45633 판결)

은행에서 지점장 등으로 20년 이상 근무한 사무직 노동자(1주 평균 56시간)는 영업활동, 지점 실적관리 등으로 인한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로 뇌혈종 발병.(서울행정법원 2018구단67520 판결)”

특히 법원은 기초질환·고령 등의 위험요인이 있는 노동자에게 장시간 노동 같은 업무상 요인이 중첩될 경우 위험성이 증가해 보통 평균인에 비해 질병에 취약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거기다 작업환경이 유해하거나 위험한 사업장, 교대제 근무를 하는 등 기존의 업무부담 가중요인이 있는 일터에서 노동시간의 증가는 더욱 위험하다. 결국 정부의 개편안은 이미 취약한 노동자들을 가파르게 사지로 몰아넣을 우려가 상당하다.

지난여름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노동자박물관(Arbejdermuseet) 기념품숍에서 덴마크어로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자유’라고 쓰인, 아마도 당시 선전물 이미지를 따온 자석을 샀다. 200년 전 하루 8시간 노동을 향한 투쟁의 상징물이 복고풍 ‘굿즈’가 된 것이다. 바다 건너 이곳은 아직 ‘죽도록’ 일하는 사회인데 더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자본과 정부에 맞서 200년 된 투쟁을 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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