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서울 중랑구 원진재단부설 녹색병원이 최근 ‘비정규직 없는 병원’이 됐다. 병원과 보건의료노조 녹색병원지부는 2021년 7월 재활 간호·간병통합병동 요양보호사 17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서 노사공동선언을 통해 ‘비정규직 제로’를 약속했다. 지난해 1월 조리사 25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올해 1월에는 미화원 17명을 직원으로 채용하면서 1년6개월여 만에 선언은 현실이 됐다. 임상혁 녹색병원장은 “환자를 차별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노동자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며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고 말했다.

‘환자를 차별하지 않는 병원’ ‘노동자의 병원’ 녹색병원은 올해 설립 20주년을 맞는다. 1988년 원진레이온 직업병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원진직업병관리재단과 부설 병원 두 곳이 세워졌다. 1999년 6월 경기도 구리에 원진녹색병원이, 2003년 9월 서울 중랑구에 녹색병원이 설립됐다. <매일노동뉴스>가 2019년 6월 3대 원장으로 취임해 지난해 6월 재임한 임상혁(58·사진) 녹색병원장을 지난 9일 오전 중랑구 녹색병원 7층 원장실에서 만났다.

“‘비정규직 제로·유노조’ 인권경영 필수 요소”

- 지난해 6월 재임하면서 다시 3년 임기를 시작하게 됐다. 지난 임기 동안 가장 큰 성과는.
“병원 경영이 적자에서 탈피한 것이 큰 성과였다. 녹색병원 16년차에 제가 원장이 됐다. 지난 15년간 녹색병원은 직원들 임금체불을 비롯해 경영 사정이 굉장히 어려웠다. 그런데 제가 원장이 되고 나서 운이 좋게도 적자를 벗어나게 됐다. 경영상 이유로 녹색병원의 철학과 가치를 실현하기 어려웠는데 (취임 이후) ‘전태일 병원’이 되겠다고 선언했고, 지역사회에서 취약계층에 대한 의료지원뿐만 아니라 통합돌봄 같은 공익적 활동을 할 수 있었다.”

- ‘전태일 병원’이 되기 위해 구체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크게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플랫폼·특수고용 노동자, 비정규직은 사고가 나도 먹고사는 문제로 제대로 치료를 못 한다. 이들을 치료하는 영역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아프고 다쳐서 일을 못하는 경우다. 조선소 하청노동자, 건설일용직, 학교급식실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다시 현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재활사업을 했다. 1년에 20~30명 노동자가 병원에 입원해 재활훈련을 했다. 소규모 영세사업장에서 일하는 주얼리 노동자들에게는 건강검진 지원사업을 했다.”

- 새 임기를 시작하고 나서 첫 ‘비정규직 없는 병원’이 되기도 했다. 선언을 현실로 만들기까지 어려움은 없었나.
“병원의 철학에 부합하기 때문에 큰 난관은 없었다. 업체에서 파견을 받았던 요양보호사를 직영으로 전환할 때 관리가 제대로 이뤄질지 우려가 있기는 했지만 (직원들 사이)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식당을 직접 운영으로 전환한 뒤에는 식사의 질이 올라가면서 식수도 확 늘어나서 비용이 증가하긴 했다.(웃음)”

- 녹색병원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른 병원으로 확산될 여지가 있을까.
“기업을 경영할 때, 병원을 운영할 때 두 가지 기본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정규직이 없어야 되고, 노조가 있어야 한다. 노동자를 착취하는 게 올바른 경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인권과 노동권도 포함돼야 한다. 경영을 할 때 사회적 책임뿐만 아니라 자기 직원들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들어가야 할 항목이다. ‘인권경영’에 필수적인 것은 노동자를 차별하지 않아야 하고, 노동자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질환 산재 증가,
트라우마 대응 확대하고 싶어도 구인난 심각”

- 새 임기 동안 어떠한 부분에 가장 주력하려 하나.
“올해부터 추진하는 신규사업이 몇 가지 있다. 우선 폐지 줍는 어르신들은 비공식 노동을 하는데 한결같이 허리가 굽어 있다. 어르신들이 건강하고 아프지 않게 노동을 할 수 있도록 건강 상담을 통해 치료·수술을 지원하려고 한다. 또한 폐지를 운반하는 도구가 성별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도구를 개발해 보급하는 사업도 구상 중이다. 두 번째는 ‘전태일병동’을 따로 만들어서 병원이 일종의 노동자네트워크 역할을 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미등록 이주아동 의료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올해 처음으로 몽골 울란바토르 취약 어린이 의료캠프를 지원하려 한다. 이후 어떻게 국제적 연대를 해 나갈지 모색할 계획이다.”

- 올해는 녹색병원이 20주년을 맞는 해다. 준비 중인 사업이 있다면.
“병원이 발전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규모를 키워야 하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주차장 건물에 신관을 지을 계획을 하고 있다. 올해부터 설계를 준비하고 완공까지는 3년이 걸릴 것 같다. 이달 22일 의사들이 모여 신관에 대한 구체적인 회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 녹색병원은 일반 병원보다 산재 환자 비율이 높다. 최근 달라진 경향이 있다면.
“일반 병원은 산재 피해자가 전체 환자의 1% 정도인 데 비해 녹색병원은 7~8% 정도 된다. 산재 환자는 수술이 필요하거나, 재활이 필요한 경우로 나뉘는데 최근에는 트라우마를 비롯한 정신질환을 겪는 환자가 많아졌다. 산업구조가 제조업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바뀌고 고용구조가 계층화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이 상당히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트라우마를 포함한 정신질환 문제에 녹색병원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10·29 이태원 참사를 비롯한 사회적 참사에 녹색병원이 트라우마 대응 같은 의료지원을 확대할 계획인데 의사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새로 채용하려 했지만 사람이 없어서 잠정 보류한 상태다.”

- 녹색병원 의사들은 단식농성 같은 투쟁현장에 직접 가서 진료를 보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에는 진경호 택배노조 위원장부터 임종린 파리바게뜨지회장, 유최안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까지 단식을 한 노동자가 특히 많았다.
“사실 일주일에 한두 번 가는 게 어떤 도움이 되겠고, 실제로 의사들이 단식자들에게 어떠한 의료행위를 하겠나. 다만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있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가는 거다. 전에는 2주만 해도 (사회적으로) 난리가 났는데, 이제는 2주가 지나야 ‘단식하는구나’ 하는 것 같다. 단식을 시작하면 보통 한 달을 넘기는 것 같아서 그게 안타깝다.”

“중대재해처벌법 제대로 안착하려면 노동행정 역할 중요”

-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다. 재계는 실효성 문제를 지적하며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완화가 아닌 어떻게 확대할 것인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시민·노동자·유족의 총화로 만들어진 법이다. 법이 어설픈 부분이 있고, 기업에서 주장하는 바가 동의되는 지점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법 자체보다 법을 만든 과정과 사회적 반응이다. (법 시행 이후) 일하다 사고로 사망하면 ‘뉴스’가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 법이 제대로 안착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나.
“소규모 사업장의 경우 지금의 법 체계로는 지키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적어도 ‘후진적 사망재해는 발생하면 안 된다’는 선을 정하고 펜스·안전망 설치 같은 것을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근로감독관이 현장에 가서 지도하고 지원해 주고 감독해야 제대로 안착할 수 있다.”

- 윤석열 정부의 노동안전보건 정책을 평가한다면.
“자율규제 기조를 강조하는데 자율규제를 하려면 우선적으로 기준이 만들어져야 한다. 정부 가이드라인이 있고, 그 가이드라인 수준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자율규제를 논해야지,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거나 없는 상황에서 자율규제를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다. 특히 사내하청에서 하청노동자가 사망사고를 당했을 때 원청의 잘못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원청이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다. 이게 더 중요한 문제다. 원청에 어떠한 역할과 책임을 부여할 것인지 계속 논의하고 기준을 만들어 가야 한다. 자율규제는 그 다음의 문제다.”

- 녹색병원이 노동자와 지역주민에게 어떤 병원이 되길 바라는지 말씀해 달라.
“제가 원장이 되고 나서 한 방송사에서 녹색병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이런 병원 또 없습니다>라는 제목이었다. 저희한테 선물 같은 방송이었는데, 노동자와 지역주민에게도 ‘이런 병원 또 없다. 참 좋다’ 이렇게 기억될 수 있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