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중소 병원·의원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한 토론회. <정기훈 기자>

“병원장에게서 방 청소부터 딸 선물포장까지 사적인 업무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면접 때 고지한 월급과 근로계약서상 월급액수가 다르다는 점을 출근을 하고 나서 알게 됐어요. 병원 소속이 아니라 용역업체 소속이라는 점도 출근 이후 알려 줬습니다.”(대구지역 10명 이상 20명 미만 치과병원에서 치과 위생사로 일하는 A씨)

300명 미만 중소 병원·의원에서 일하는 노동자 가운데 10명 중 4명 이상(44.4%)은 일을 하면서 부당대우나 불이익 경험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면허·자격 이외에 부당 업무를 지시받은 경험도 39%나 됐다. 열악한 환경에 내몰린 중소 병원·의원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과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해서라도 정부의 철저한 관리·감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보건의료노조는 28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 토론회에서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7일까지 5개 직종(물리치료사·방사선사·임상병리사·작업치료사·치과위생사) 5천44명을 대상으로 한 노동환경 실태조사를 발표했다. 더불어민주당 정춘숙·우원식 의원, 정의당 강은미·이은주 의원, 5개 직종협회(대한물리치료사협회·대한방사선사협회·대한임상병리사협회·대한작업치료사협회·대한치과위생사협회)가 토론회를 함께 주최했다.

환자·보호자에게서 폭언·폭행 경험 ‘절반’
10명 중 7명 “아파도 출근했다”

중소 병원·의원 노동자들은 일주일 평균 5.5일 출근하고, 약 43시간 일했다. 하루 평균 식사 포함 휴게시간은 49.4분이었다. 휴게시간이 포함된 ‘잠시 짬을 내 숨 돌릴 시간’은 72.2분에 불과했다. 일주일 평균 끼니를 굶는 경우는 평균 1.6회였다. 퇴근 이후 혹은 휴일에 SNS로 업무지시를 받은 경험도 월 평균 6.3회였다.

서울 30명 이상 사업장에서 작업치료사로 일하는 B씨는 “매일 그날 업무에 따라 점심시간이 달라지고 늦게 식사를 할 땐 오후 1시30분에 먹기도 한다”며 “식사 이후에는 별도 휴게시설이 아닌 비어 있는 검사실에서 휴식을 취해야 해서 검사가 진행될 땐 휴게시설조차 없다”고 밝혔다.

폭언이나 괴롭힘에 노출되는 경우도 많았다. 직장내 폭언(25.1%), 괴롭힘(18%), 폭력(4.8%), 성희롱·성폭력(6%)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환자나 보호자 등에게 폭언·폭행을 경험한 경우는 47.5%로 절반에 가까웠다.

‘아프면 쉴 권리’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지난 3년간 일을 하면서 업무상 질병을 경험한 노동자는 50.6%였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소득 감소 같은 어려움이 발생했다는 응답도 34.4%였다. 지난 1년간 아파서 출근을 하지 못한 경우(Absenteeism)는 31.5%였고, 아파도 출근을 한 경우(Presenteeism)는 68.7%나 됐나. 유급병가제도가 있는 곳은 19%에 불과했고, 무급병가가 있는 곳도 36.5% 수준이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의무인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조치는 응답자 32.7%만 “있다”고 답했다. 지난 8월18일부터 의무화된 ‘20명 이상 사업장 휴게시설 설치’도 응답자 3분의 1 정도만 “있다”고 답했다. 20명 이상 30명 미만의 경우 35.5%, 30명 미만은 26.6%였다.

‘중소 병·의원 표준임금제’ 제안
“의협·치협·한의협·병협, 노동기본권 교섭 나와야”

기본적인 노동법령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는 만큼 정부의 철저한 관리·감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고용노동부는 작은 사업장의 기본적 노동인권이 실현될 수 있도록 근로계약 체결·임금명세서 교부 등에 대한 법률 준수와 점검이 필요하다”며 “보건복지부는 중소 병·의원 일자리 질 제고와 차별 해소,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위한 ‘중소 병·의원 표준임금제’를 검토하는 게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사업장 규모에 관계없이 모든 보건의료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려면 사회적 협약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노조는 대한의사협회·대한치과의사협회·대한한의사협회·대한병원협회에 7월14일부터 지난달 31일까지 4차례에 걸쳐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한 교섭을 공식 요구했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다.

나영명 노조 기획실장은 “노동현장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인 근로기준법·최저임금법·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산업안전보건법조차 준수하지 않고 있다”며 “의협·치협·한의협·병협이 회원사를 대표해 노동기본권 협약에 참여하는 것은 사회적·공익적 의료단체로서 수행해야 할 마땅한 책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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