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아이가 태어나면 대문 위에 새끼줄을 걸고 아기 탄생을 알렸다. 딸이면 솔가지와 숯덩이를, 아들이면 빨간 고추와 숯덩이를 새끼줄에 끼웠다. 그리고 100일이 지나면 백일잔치를 했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새 생명의 탄생을 환영했다.

윤석열 정권이 태어난 지 100일이 지났다. 100일을 즈음해 야당과 시민단체들에서 평가토론회가 열렸다. 하지만 변죽만 울리는 것 같다. 윤석열 정권은 애당초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태어난 생명을 두고 이런 야박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현실과 자신이 서글프다. 그러나 이것이 솔직한 민심이다.

윤석열 정권은 박정희·전두환 정권처럼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것이 아니므로 절차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한다. 그런 식이라면 이승만 정권은 5·10 선거와 국회 안 선거로 등장했으니 절차적으로 정당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5·10 선거는 총칼로 국민을 투표장으로 나오게 해서 투표하게 한 반강제 선거였다. 이는 선거의 대원칙인 ‘자유선거’에 어긋난 것이었다. 거기에 저항해서 제주에서 민중들이 대거 선거에 불참했다. 이에 미군정과 그것을 이은 이승만 정권이 제주 도민 3만여명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그러면 이번에는 총칼로 투표하게 강제하지 않았으니 절차적으로 문제가 없다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예컨대 우리나라에 정치·사상의 자유가 있어서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이 공공연하게 정치활동을 하고 그런 정치활동을 바탕으로 선거에 후보를 낼 수 있다면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됐을까? 만약 그런 자유가 보장돼 있다면 모순이 가득 찬 ‘헬조선’에서 윤석열이 아니라 반체제 급진주의자가 대통령에 선출될 수도 있었다. 1970년대 칠레의 아옌데나 1990년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처럼, 그리고 최근 쿠데타로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을 몰아낸 볼리비아에서도 선거로 사회주의 정권이 재집권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윤석열 정권이 선거로 집권했으므로 절차적으로 정당하니 그 점에 관해 시비하지 말라는 얘기는 일방적이고 억압적이다. 지금과 같이 노동계급의 반체제 정치활동 자유를 원천봉쇄해 놓고 치르는 자기들만의 리그는 절차적으로 정당성이 없다.

그런 한계 안에서도 윤석열 정권의 탄생은 환영받기 어렵다. 윤 정권은 자신의 자랑거리로 표를 받은 것이 아니라 경쟁상대의 비웃음거리 덕분에 표를 얻었다.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권이 그렇게 무참히 촛불정신을 배반하지 않았다면 윤석열 정권은 결코 등장할 수 없었다. 윤석열은 선이나 차선이 배제된 상태에서 문재인 정권의 후계자가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민중이 마지못해 고른 차악의 선택지였다.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는 여론이 60%에 가까운데도 그는 선거 조금 전까지 40% 남짓한 지지밖에 받지 못했다. 완전 2파전이었음에도 최종 득표율도 48.56%, 차점자와의 격차도 0.73%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차악을 왜 우리가 환영해야 하는가.

이렇게 간신히 집권했는데도 지난 100일 동안 그는 마치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것처럼, 또는 혁명정권인 것처럼 자신의 신념을 펼치는 정치를 했다. 어떤 신념인가? 자유! 취임사에서 17분 동안 자유라는 단어를 35번이나 사용하더니, 광복절 기념사에서는 15분 동안 이 단어를 33번 반복했다. 그리고 정권교체 이외에 이룬 것이 별로 없는데도 취임 100일에 즈음한 기자회견에서 자화자찬으로 일관했다. 이렇게 신념에 찬 대통령은 처음이다. 자유!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단어인가. 자유는 예속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가 이 말의 의미를 알기나 하는가? 고 김대중 대통령처럼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긴 정치인이 정치적 자유를 외친다면 공감이 갈 것이다. 임금노예에서 벗어나려 투쟁하다가 감옥에 끌려간 노동자가 단결과 파업의 자유를 외친다면 실감이 날 것이다.

그러면 윤석열에게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특수부 검사에 검찰총장으로 억압적 국가권력을 휘두르는 자유 말고 무엇을 아는가? 공안검사 출신 황교안이 말했듯이 그의 자유는 ‘자유 우파’의 자유다. 이승만의 ‘자유대한’이 그러하듯이, 백인 우월주의 미국 자유당, 극우 인종주의 우크라이나의 자유당, ‘자유 코소보’를 외친 자들, ‘자유 시리아’를 외친 자들이 그러하듯이, 그 자유는 곧 극우 정치경제 체제다. 윤석열의 자유는 자본이 마음껏 자본축적을 보장받는 자유다. 자본은 이미 충분히 자유로운데도 착취·수탈·축적에 대한 일체의 제약을 폐지하는 무제한적 자유다. 자본의 정치적 인격화에 불과한 ‘자유 좌파’ 정부가 자본의 자유를 구속했다고 거짓말하는 자유다. 노동자를 마음껏 착취·억압하는 자유이며, 노동자 일가족이 반지하방에서 폭우로 물에 빠져 죽어도 우산을 쓰고 구경만 하는 자유다. 국정농단으로 자신이 수사하고 기소한 재벌총수를 자신이 사면하는 자유이며, 전쟁광 바이든의 충견이 되는 자유다. 이것은 한마디로 내외 독점자본의 자유이다.

자유 이념은 농노제를 타파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근대사회로 이행하던 역사적 시기에는 진보와 혁명의 이념이었다. 그러나 자본가계급이 사회와 국가의 주인이 된 다음에는 진보가 아닌 보수의 이념이었고, 자본주의가 자유경쟁 단계에서 독점단계로 이행한 이후에는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옹호하는 보수반동의 이념이었다. 바이든과 윤석열이 인류보편적 가치라고 치켜세우는 이 자유는 실은 미 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의 자유이고, 삼성재벌 부회장 이재용이 3대째 총수직을 세습하며 노동자를 해고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자유다. 또 이것들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와 동맹하는 자유다.

윤석열은 집권 100일 동안 대선 기간에 감추었던 자신의 발톱을 세상에 드러냈다. 지지율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국민만 보고 가겠다며 대놓고 극우 파시즘의 길을 가고 있다. 그리고 아제국주의로 뻗어나가는 남한 독점자본의 머슴 노릇을 대놓고 하고 있다. 조심하는 ‘자유 좌파’와 달리 그는 거침없이 그 길로 내달리고 있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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