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이미지투데이

최근 고용노동부가 프로축구단 유소년팀에서 10년 넘게 일한 감독에 대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취지의 판단을 내렸다. 감독이 제기한 퇴직금 체불 진정을 받아들여 구단 운영사에 퇴직금 지급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운영사측은 시정지시 이행기간인 지난 19일까지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프로축구 유소년팀 지도자들과 구단 사이 퇴직금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들은 프로팀 지도자들과 달리 훈련·지도 업무 외에도 학생선수 관리나 행정업무까지 떠맡는 경우가 많다. 형식적으로 용역계약을 체결한 개인사업자 신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구단에 종속된 근로자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노동청 ‘퇴직금 지급’ 명령에도 구단 ‘묵묵부답’

24일 <매일노동뉴스> 취재 결과 부산아이파크 축구단을 운영하는 HDC스포츠는 부산지방고용노동청 부산북부지청이 지난달 30일 내린 노동관계법 위반사항을 시정하라는 행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구단 감독·코치가 HDC스포츠 대표를 상대로 제기한 진정 사건에 대해 부산북부지청은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퇴직급여법) 9조를 위반한 사실을 확인했다며 올해 7월19일까지 퇴직금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북부지청 관계자는 “시정지시를 이행하지 않아 수사단계로 전환됐다”며 “추가조사를 진행한 뒤 사업주에 대한 검찰 송치 등 사법처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아이파크 15세 미만(U-15) 유소년팀 감독으로 일한 정민수(49·가명)씨는 2020년 12월 말 계약기간 종료시점 이틀을 앞두고 “계약 연장이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정씨는 운영사 관계자에게서 “1부에서 2부로 떨어져 전체적인 쇄신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2007년부터 10년 넘게 일한 만큼 정씨는 퇴직금을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위로금’ 명목으로 1천100만원을 줄 수 있다는 답변만 받았다.

정씨는 유소년팀 훈련·지도업무뿐만 아니라 2007년부터 2015년까지 U-12 감독을 하는 동안 구단이 지정한 학교에 방문해 ‘맥도날드 축구교실’ 수업도 해야 했다. 합숙하는 선수들 관리·감독을 위해 돌아가면서 당직을 서고, 운동장 섭외 같은 행정업무도 맡았다. 운동장 사용 신청부터 훈련일지까지 구단에 보고하고 허가를 받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운동장 무단사용 관련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구단 직원 지시에 따라 경위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고용노동부가 퇴직금 지급을 명령한 것은 정씨가 사실상 구단에 종속된 근로자라는 점을 인정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구단 운영사가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서 정씨의 싸움은 길어질 전망이다. 정씨는 <매일노동뉴스>에 “지도자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데 언제 잘릴지 모르는 하루살이로 살면서 그 와중에 퇴직금도 받지 못해 안정적인 삶을 살기 어렵다”며 “구단 직원들이 해야 할 업무까지 떠맡게 되고 학교 팀보다 더 열악하다”고 호소했다.

업무는 ‘학교운동부’처럼, 계약은 프로팀처럼

프로축구 유소년팀 지도자와 구단 간 퇴직금 분쟁은 정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산아이파크 사건 이전 수원FC에서도 비슷한 갈등이 발생해 노동부가 시정지시를 내린 적이 있다. 2019년 8월 중부지방고용노동청 경기지청은 수원FC에 유소년팀 지도자에게 퇴직금, 연차 미사용수당을 지급하라고 시정지시를 내렸다.

스포츠 유소년 지도자는 학교운동부, 프로구단, 사설업체 소속으로 나눌 수 있다. 학교운동부 지도자는 학교의 장과 근로계약을 맺고 대부분 계약직으로 일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9년 10월 발표한 ‘학교운동부 지도자의 인권실태와 인권옹호자의 역할’ 보고서에 따르면 고용관계는 기간제 계약직이 70.7%로 가장 높았고, 계약기간은 ‘1년’(74.3%)이 가장 많았다. 프로구단 유소년 지도자는 훈련·지도 업무 외에도 합숙소 생활관리업무를 겸하거나 훈련·지도 관련 행정업무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다. 업무는 학교운동부 지도자처럼 하는데 계약은 프로팀 지도자처럼 용역계약을 체결한 개인사업자 신분인 셈이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퇴직금을 얼마나 지급하는지가 아니라, 프로구단 유소년 지도자가 노동법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용역계약상 수행해야 하는 업무 범위가 지나치게 넓은 데다 이 과정에서 구단의 지휘·감독을 받을 가능성이 큰 데도 ‘감독·코치’라는 이유로 노동자로서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스포츠평론가)는 “감독·코치들의 자부심 이면에는 비정기적이고 불안한 고용관계 속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점이 자리하고 있다”며 “유소년 지도자 세 분류 모두 (하는 업무가 크게 다르지 않아) 근로자로 보고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용역계약을 체결하는 관행 탓에 노동자로서 권리를 주장하려면 노동청·노동위원회에 개별적인 권리구제 절차를 밟아야만 하는 상황이다. 노동청과 노동위원회도 사건별로 판단이 엇갈리고 있다. 부산아이파크와 수원FC의 경우 근로자성을 인정받았지만 또 다른 지역 구단 유소년 지도자들은 ‘업무 재량’을 이유로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 권리찾기유니온
▲ 권리찾기유니온

“재량 있다는 이유만으로 근로자성 부인해선 안 돼”

지역 A프로구단에서 지난해 12월 유소년팀 감독·코치 4명이 한꺼번에 계약종료로 ‘해고’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접수했지만 지난 5월 기각됐다.

2015~2020년 사이 해당 구단에서 유소년팀 감독·코치로 일을 시작한 이들은 1년 단위로 훈련·지도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하는 업무는 정민수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훈련·지도업무뿐만 아니라 숙소 사감업무, 예산처리 등 행정업무까지 도맡았다. 이들은 구단에서 주관하는 주간·월간회의에 참여해 업무보고를 하고, 구단 지시에 따라 행사에 동원되거나 축구대학 진행 같은 구단이 요구한 업무를 수행해 근기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며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했다. 코치로 일한 30대 김종현(가명)씨는 <매일노동뉴스>에 “구단은 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계약만료 통보를 했다”며 “원해서 나가게 된 것도 아닌데 퇴직금도 프리랜서라서 줄 필요가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지노위는 “유소년 선수에 대한 훈련·지도 및 관련 제반업무를 수행하면서 상당한 정도의 독자적 재량과 책임을 가지고 처리하는 지위에 있다고 보이므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김씨 등 4명은 중노위 재심판정을 기다리고 있다.

노동자측을 대리한 하은성 공인노무사(권리찾기유니온)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업무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사용자가 정하지 않은 경우라 해도 그것이 업무 자체의 특성이나 전문직종의 상대적 자율성에 기인한 것이라면 노동자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며 “오히려 계약서에 지도자들의 업무를 매우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노동자라는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하 노무사는 “재정적 문제로 프로팀과 달리 지원업무까지 하는 경우가 많아 하는 업무만 보면 근로자처럼 일하지만 감독·코치가 선수 선발 등 재량권이 있다는 이유로 근로자성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중노위는 e스포츠 프로게임단 감독에 대해 근기법상 근로자로 판단하기도 했다.

프로축구연맹 “구단마다 상황 달라”
“문제로 인식하는 문화부터 형성해야” 지적도

퇴직금을 비롯한 근로자성 문제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지만 프로축구연맹 차원의 대책은 없는 상태다. 프로축구연맹 관계자는 “고용형태는 회사 차원의 문제이지 축구적(축구와 관련된)인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통일된 지침까지는 없다”면서도 “‘위임계약 체결시 업무수행 과정에서 어떠한 점을 주의해야 한다’는 내용의 가이드라인을 배포한 적은 있다”고 말했다.

정윤수 교수는 “개별적으로 권리구제를 다퉈야 하는 것은 스포츠계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라며 “법적인 디테일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노동자성이 훼손되거나 권리가 침해될 때 조직화든 교육이든 연대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문화부터 형성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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