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어느 시처럼 시간을 ‘한 허리 베어 내어’ 필요할 때 ‘굽이굽이 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은 고정불변의 자연법칙이라 이런 생각은 공상에 불과하다고 치부한다면 속단이다.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은 이런 공상을 현실로 바꾸는 매개다. 출퇴근 시간 조정 같은 단순한 방식을 포함해 탄력적·선택적 근로시간제, 집중근로제 같은 제도가 이미 시행 중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없다고 느끼는 이유는 하나다. 시간의 허리를 베어 낼 ‘낫자루’를 노동자가 직접 쥐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간주권이 없어서다.

“노동시간단축 운동은 단순히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여 가정에서 누리는 시간을 늘리는 개인의 여가시간 변화의 차원을 벗어나야 한다. 노조 고유의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노동시간단축은 민주주의적 시민의 형성, 노동자들의 연대 복원, 시간주권 획득으로 나아가야 한다.”

민주노총은 2016년 총서 ‘노동분할시대, 노동시간 유연화에 맞서는 노동시간 단축운동 방향’에서 이같이 밝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1천908시간인 노동시간의 길이를 줄이는 노동운동도 중요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할지 결정하는 시간주권의 중요성에 주목한 것이다. 이후의 노동운동은 이런 방향대로 움직였을까.

시간주권 회복, 전선은 구축됐다

실제 교섭이 붙고 노사가 격하게 맞부딪치는 현장에서는 시간주권을 직접 쟁점으로 삼지는 않았더라도 과로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시간주권을 확보하려는 노력들이 엿보인다. 잇따라 과로사가 발생한 택배노동자의 사회적 합의는 시간주권 확보를 위한 노조의 역할을 보여준 단적인 예다.

지난해 6월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가 발표한 2차 합의문을 보면 명시적으로 노동시간을 주 60시간 이내로 제한하는 조항을 비롯해 곳곳에서 시간주권을 다툰 흔적이 보인다.

핵심 조항 가운데 하나였던 분류작업 개선과 비용 청구는 그간 무급노동시간이던 분류작업에 소요되는 노동시간을 유급노동시간으로 인정한 것이다. 과로사라는 생명·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간주권 확보 노력을 조직적으로 전개한 대표적 사례다.

이처럼 택배 노사의 사회적 합의가 노동시간을 줄이고 무급노동을 유급노동으로 전환하는 쟁투였다면, 화물자동차 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를 다투는 화물연대본부 투쟁은 안전하게 원하는 시간에 일할 수 있도록 휴식권을 확보하는 데 목적이 있다.

안전운임제는 과로·과적·과속 같은 교통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운임을 정해 공표하는 제도다. 한국안전운임연구단이 2020년 7월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안전운임제 시행 이후 화물노동자들의 평균 수면시간은 5.57시간에서 0.47시간 증가한 6시간으로 늘었다. 지난해 연구에서는 졸음운전이 71%에서 53%로, 과적 경험이 24.3%에서 9.3%로, 과속 경험이 32.7%에서 19.9%로 감소했다. 최근 화주기업들은 안전운임제 폐지를 주장하면서 다시 화물노동자의 잠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아파트 경비노동자의 3교대 근무 확대나 특수경비의 교대근무제 개편도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교대근무제를 개편해 편성조와 인력을 늘리는 방식으로 노동시간을 줄이고 휴게시간을 늘릴 수 있다”며 “전면적 시간주권 싸움으로 보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함의를 품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간주권을 구호로 삼지 않았더라도 노동운동 곳곳에서 이미 시간주권을 둘러싼 전선은 형성됐다는 것이다.

비정형 노동자 빈곤에도 취약

전장에서 열세에 놓인 건 비정형 노동자다. 오전 9시 출근해 6시 퇴근하는 사회적 노동시간 바깥에서 일하는 특수고용직이나 플랫폼 노동자들은 ‘노동자’로 불리지도 못할 뿐 아니라 노동시간을 특정하기도 어렵다.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영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은 자본이 갈수록 시간에 비례한 노동을 회피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시간에 비례해 임금이 형성됐던 과거와 달리 자본은 갈수록 노동자와의 시간관계를 지우려 애쓴다”며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과업을 헤아리는 식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시간을 매개로 갖춘 각종 노동법제를 회피하려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특수고용직 같은 비정형 노동자는 자발적으로 장시간 노동을 해서 소득을 메우려고 한다. 김형렬 노동시간센터장(가톨릭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최근 자발적 장시간 노동이 시간주권의 쟁점이 되고 있다”며 “생활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시간을 더 늘리려는 플랫폼 노동자와 특수고용직의 상황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통계는 이런 주장을 흥미롭게 설명한다. 권현정 한림대 교수를 비롯한 연구진의 2020년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시간빈곤과 일과 삶의 균형’논문을 보면 특수고용직의 시간빈곤(유급노동시간이 길고 자유시간은 부족) 비율은 전체 평균(30%)이나 임금노동자(24.7%)보다 높은 31.8%로 나타났다. 이와 달리 소득빈곤 비율은 전체 평균(15.7%)과 임금노동자 평균(15.5%)보다 낮은 12.7%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를 소득빈곤 해소를 위한 자발적 시간빈곤으로 해석했다. 연구진은 “특수고용직이 일한 만큼 소득이 보장되기 때문에 소득빈곤 상황보다 시간빈곤을 경험할 가능성이 큰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법? ‘오래된 정답’ 근기법 확대·사회적 규제 강화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해소할 대책은 있을까.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한 곳으로 모이지는 않는다. 정권이 노동시간단축보다 노동시간을 연장하거나 유연화하자는 쪽으로 바뀐 것도 이유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시간빈곤에 놓인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와 그 밖의 비정형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노동자’가 아닌 탓이 크다.

김영선 연구위원은 이 때문에 ‘오래된 정답’을 강조한다. 근로기준법 적용범위를 확대해 특수고용직·프리랜서·자영업자를 비롯한 비정형 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자본은 시간과 노동의 관계를 지우려 애쓴다면 노동의 적확한 대답은 다시 시간관계를 밝혀내고 비용과 사회적 책임을 자본에 지우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근로기준법 적용 확대는 이른바 ‘일하는 사람’을 포괄하는 시도다. 김영선 연구위원은 “사회변화 속도에 맞게 제도를 발달시키는 것”이라며 “노동자에게 단결권을 보장해 현장에서 스스로 자생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 있도록 경로를 구축하는 게 시간빈곤과 소득빈곤을 해소할 수 있는 이상적인 방법론”이라고 말했다.

김형렬 센터장은 장시간 노동을 야기하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찾아 해소하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택시노동자라면 사납금을 해소하지 않으면 다른 해법들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대형마트가 매장 운영시간 제한을 풀어 달라고 주장하는 이면에는 오프라인 매장을 활용한 물류산업 진출 사업계획이 있기 때문”이라며 “이런 산업적 이유에서 나타나는 장시간 노동 요구에 구체적으로 대응하고 규제를 합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예가 새벽배송이다. 비정형 노동자를 심야시간에 투입해 없었던 수요를 창출한 서비스라서, 이런 생활양식이 정말 필요한지 엄정하게 따져보고 사회적 합의로 규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시간주권 회복, 데이터 축적·방향성 검토 ‘로드맵’ 있어야

사회보험의 확대를 통한 빈곤의 해소도 검토 대상이다. 서울시에서 시작해 다른 지방자치단체로 확대하고 있는 자영업자 유급휴가제처럼 플랫폼 노동자·프리랜서 같은 비정형 노동자에게 사회보험을 확대해 유급휴가나 직업훈련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김종진 선임연구위원은 “임금노동자와 비정형 노동자를 비교하면 비정형 노동자가 약정된 노동시간은 없고 소득이 높은 경우가 있어 시간주권이 많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면서도 “임금노동자가 갖고 있는 유급휴가, 출산급여, 건강보험료 사업주 부담, 유급교육훈련비 같은 내용을 포함해 비교하면 과연 비정형 노동자가 더 높은 시간당 임금을 받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그는 “이 때문에 비정형 노동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각종 사회보험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고민하고 설계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소득보전의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이전소득이 거론된다. 유급교육훈련비 같은 내용은 이미 국민내일배움카드처럼 평생 직업능력 개발 개념으로 국가가 시행하고 있는 제도기도 하다. 플랫폼 노동자나 특수고용직·프리랜서를 대상으로 이런 유급교육훈련비를 늘려 임금노동자에게 보장된 고용보험상 교육훈련기회의 차이를 메우는 것이다. 이 밖에 돌봄비용을 이전소득으로 보조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다만 이런 구체적인 방식들을 고민하기에는 기초자료가 모자란 게 현실이다. 김영선 연구위원은 “우리나라는 노동의 시간대별 조사가 전혀 없다”며 “외국에서는 교대근무를 하는 맞벌이 노동자가 어떻게 시간이 교차하는지 통계가 있고 연구가 되는데 우리나라는 야간노동자가 얼마나, 어느 시간대에 일하는지 혹은 교대근무자가 어떻게 일하는지 전국적인 단위의 국가승인통계가 없다”고 비판했다. 제도뿐 아니라 그 삶 자체를 살펴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김종진 선임연구위원은 “비정형 노동자의 노동실태에 대한 통계를 비롯해 사회·보건의료·노동 같은 학계가 시간주권 회복의 맥락에서 현재 상황을 함께 연구하는 네트워크 구성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앞으로 시간빈곤을 해소하기 위한 시간주권 회복이라는 맥락에서 중장기적이고 국가적인 차원의 로드맵 수립도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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