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튜브 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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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로 일한 쿠쿠전자 정수기 수리기사가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법원에서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았다. 근로계약은커녕 위탁계약조차 체결하지 않은 수리기사의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성이 인정된 사례는 처음이다. 법원은 수리기사가 사실상 본사 지시로 근무하면서 과로와 업무상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봤다.

지정 휴일 없이 주 6일 근무
대기시간 포함 하루 12시간 노동

24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3단독(정성화 판사)은 최근 쿠쿠전자 수리기사 A(58)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급여 불승인처분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공단은 1심에 불복해 지난 17일 항소했다.

A씨는 2015년 6월부터 쿠쿠전자 대리점에서 별도의 근로계약이나 위탁계약을 맺지 않은 채 본사에서 정수기 설치·수리 업무를 배당받아 일했다. 4대 보험에 가입되지 않았고, 기본급도 없이 작업량에 따른 수당을 받았다.

업무는 본사의 지시를 따랐다. 대리점이 본사를 통해 고객 목록을 보내 주면 고객 주거지로 방문했다. 오전 8시30분께 고객의 집에 도착해 오후 5시30분~6시까지 수리·설치를 담당했다. 정해진 휴일 없이 상황에 따라 쉬면서 1주에 6일을 일했다.

민원이 발생하면 추가 보수 없이 휴일에도 고객을 방문하는 일도 잦았다. 퇴근 후에도 쉬지 못했다. 최소 2시간씩 폐필터 작업을 해 본사로 보냈다. 고객과 다음날 방문 일정을 조율하면 매일 오후 9시가 넘어서야 일이 끝났다.

이렇게 일한 지 2년여 만에 결국 사고가 발생했다. 2017년 12월 다른 고객의 집으로 이동하던 중 대기시간을 이용해 이발하고 나오던 중 쓰러진 것이다. A씨는 병원에서 뇌내출혈 진단을 받았다. 이후 요양하던 중 2019년 4월에는 파킨슨병 추가 진단이 내려졌다.

최근 10년간 뇌출혈과 관련해 진료받은 적이 없던 A씨는 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공단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도 인정되지 않는다”며 불승인했다. 그러자 A씨는 2020년 8월 소송을 냈다.

법원 “대리점이 구체적 업무 지시”
쿠쿠 적힌 작업복 입고 명함도 돌려

재판의 쟁점은 A씨를 ‘근로자’로 인정할 수 있는지였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은 근로기준법에 따른 근로자를 산재 보호 대상으로 정하고 있다. A씨는 “지점장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사례도 있어 인사 전권을 가진 지점장에게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A씨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대리점이 A씨의 업무 지역과 종류를 정했으므로 구체적인 업무를 지시했다고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작업량에 따른 수당을 받았는데, 작업량은 대리점에 의해 사실상 결정됐다”며 “A씨 보수는 근로의 대가인 임금의 성격을 가진다”고 설명했다.

A씨가 쿠쿠 상호가 적힌 작업복을 입고 대리점 팀장으로 기재된 명함을 고객에게 돌리며 근무한 사실이 근거가 됐다. 이 밖에 △쿠쿠 본사가 수리기사에게 정기평가와 기술교육을 실시한 점 △A씨가 대리점에 업무보고를 한 점 등도 산재 인정의 근거로 판단했다. 나아가 A씨가 체육관을 운영하는 개인사업자로 등록돼 있었지만, 업무시간에 체육관을 열었다는 점을 인정할 만한 객관적인 자료 역시 없다고 봤다.

수리기사 연이어 ‘뇌출혈’ 발병
“과로와 업무 스트레스가 원인”

A씨가 근로자라는 점을 전제로 업무상 재해도 인정됐다. 법원은 과로와 업무상 스트레스가 원인이 됐다고 판단했다. 무거운 정수기를 차에 싣고 여러 지역에 흩어진 고객의 집을 방문해 육체적 강도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아울러 고객 민원에 대한 문책성 불이익 우려와 고객 응대 과정에서의 스트레스도 업무부담 가중요인이 됐다고 봤다.

A씨의 업무시간이 고용노동부 고시 기준에 미치지 않는다는 공단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단은 A씨의 발병 전 12주 동안 1주당 평균 업무시간이 41시간이라고 항변했다. 노동부의 과로 인정 업무시간인 60시간에 못 미친다.

그러나 법원은 “출퇴근 시간을 확인할 자료가 없어 공단이 파악한 업무시간이 실제와 일치한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A씨가 실제로 근무한 시간이 공단의 인정 시간보다 길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취지다.

쿠쿠홀딩스에서 위탁계약을 체결하고 일한 정수기 수리기사 B씨도 2017년 6월 뇌출혈을 일으켜 법원에서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토요일을 포함해 주 6일 하루 평균 10~11시간 정도 일하며 과로한 점이 인정됐다. B씨 사건은 지난 3월 항소심에서 원고 승소가 확정됐다.

법조계는 근로자성과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가 모두 인정된 사례는 이례적이라고 평가한다. A씨를 대리한 김용준·김위정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형식이 아닌 실질로 봤을 때 A씨가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했던 점을 증명해 근로자성을 인정받았다”며 “잔업 근무 등을 소명해 업무상 스트레스 등 업무부담 가중요인까지 인정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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