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탁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지난 4월부터 노회찬재단에서 진행하는 강연·대담 기획 <월간 노회찬>의 두 번째 강연자는 시사인 전혜원 기자였다. 재작년에 발간된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의 저자다. 책은 2018년부터 취재한 23편의 기사를 아홉 가지의 주제로 묶었다. 종속적인 자영업자를 비롯해 플랫폼 일자리까지, 그리고 산업재해와 임금체계까지 노동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와 영역에 대한 글들이 담겨 있다. 열악한 노동현장을 스케치하는 수준을 넘어 법과 제도의 문제까지 천착한 글이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이 책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미리 던지고 있다. 저자가 던지는 문제의식은 이 책 전체를 읽어야 또렷하게 드러난다. 저자는 그간 단색이라고 여긴 노동이라는 주제가 그러데이션(gradation)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노동은 일자리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건을 둘러싸고 노동자 간의 이해관계가 심각하게 엇갈리기도 한다. 색은 노동과 자본이라는 단일한 기준선에 따라 단순하게 드러나지 않고 복잡한 기준선들이 횡으로 종으로 다양한 색의 이해관계 파편을 만들어 낸다.

저자가 던지는 또 하나의 깨달음은 우리 시대 노동문제의 연원은 숙련 해체에 있다는 점이다.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노동 문제들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숙련 해체라는 공통분모와 마주치게 된다. 기업은 숙련이 필요 없는 업무는 밖으로 털어 낸다. 진열 상품과 가격을 프랜차이즈 본사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가맹점 자영업자는 숙련을 쌓지 못한 채 그저 점포 확장 비용과 사업 실패의 위험 부담만 떠안게 된다. 기업 특수적인 숙련이 필요 없다고 판단되는 노동에 대해서는 직접고용하는 대신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프리랜서 같은 이름의 노동자와 개인사업 계약의 형식으로 관계를 설정한다. 내비게이션은 길을 찾는 택시기사의 숙련을 해체하고, 로봇은 생산 현장 노동자의 숙련을 해체한다.

한국에서 자원이 배분되는 양식은 이미 숙련과는 무관하게 됐다. 하지만 설계돼 작동하고 있는 체계와 제도는 과거의 숙련 노동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은 쉽게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또 간단하게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들을 던진다. 숙련이 해체된 상황에서 연공형 임금체계가 유지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공채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차별적 대우의 기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동자들을 서로 다른 공간에 구획 배치하고 있는 기준, 다르게 표현하면 성벽은 노동자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기준을 내면화한 노동자들은 그것으로 자신의 이해를 정당화하고, 그 성벽에 기어오르는 이들을 이웃이 아니라 적으로 규정한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현재의 질서에서 배제된 수많은 동료 시민을 위해 게임의 판을 다시 짜야 한다. 현재의 판은 단결과 연대를 지향하는 이들이 만든 판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만들어진 판도 아니다. 전략적으로 형성된 판이고, 그 판은 주주자본에 가장 적합한 판이다. 정치에만 판갈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에도 판갈이가 필요하다. 정치에만 성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도 성역이 있다. 이 성을 깨트려야 연대의 삶이 작동할 수 있다.

새로 만들어야 할 판은 노동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노동 밖의 노동이 더욱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는 사회보장, 사회안전망 전체를 새롭게 기획해야 한다. 저자는 <월간 노회찬> 강연을 시작하며 천관율 시사인 기자의 기사를 자료 화면에 띄웠다. “노회찬의 진보주의가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은 분명 있었다. 노동시장 안에서는 국가가 노동자를 보호하고, 노동시장 밖에서는 사회안전망이 삶을 떠받쳐 주며, 이 두 보호가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것이 진보의 가치라고 그는 믿었다.” 노동시장과 노동시장 밖 모든 동료 시민의 삶을 유기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게임의 판을 만들어야 한다.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그러기에 저자의 깨달음과 문제의식은 갑자기 새로운 과제를 던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깨달음과 의문은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것이고, 또 지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제기돼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과제를 떠안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묵은 숙제를 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책에 쓴 저자 서명에 쓰인 “느린 변화를 믿습니다”는 말처럼, 우리는 더디더라도 이 숙제를 버려서는 안 된다. 물론 세상은 갑자기 변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변화 역시 느린 걸음일지라도 변화를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 온 이들이 없다면 곧 사라질 누각에 불과할 테니까.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htkim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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