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윤정 한국직업건강간호학회장(한국보건안전단체총연합회)

몇 년 전, 게임업계에서 일하던 20대 청년이 장시간 노동으로 심근경색이 발병해 숨진 사건은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대 청년이 사망하기 전, 그는 소위 크런치모드(crunch mode)라고 불리는 초장시간 노동을 했다고 한다. 즉 발병 전 12주 동안 야근과 초과근무를 했으며 발병 7주 전 1주일은 89시간 일하고, 발병 4주 전 1주일은 78시간을 일했다고 알려졌다. 이 사건은 무려 18년 만에 법정 노동시간을 주 68시간제에서 주 52시간제로 낮추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우리 국민은 장시간 근로가 노동자의 건강에 얼마나 유해한지를,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됐다. 그러나 재작년에도 우리는 택배노동자들이 줄줄이 과로사했다는 소식을 연일 방송에서 볼 수 있었는데 이는 택배노동이 이 제도 밖에 있는 업종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9일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다. 새 정부를 이끌 윤석열 당선자가 선거기간에 했던 여러 노동 관련 공약과 발언들이 산업보건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우려를 주고 있다. 특히 “1주일에 52시간이 아니라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근로시간 유연화’라는 표현으로 새 정부의 중요한 공약이 됐다.

우리나라는 근로시간을 ‘근로자와 사용자 사이에 정한 근로시간’ ‘작업을 위해 근로자가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에 있는 대기시간’으로 근로기준법에 정의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법정 근로시간은 2004년부터 2011년까지 단계적으로 줄어들어 주 44시간에서 주 40시간으로 단축돼 있는데,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으며 연장근로 12시간을 포함해 52시간 초과를 금지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나라는 멕시코를 제외하고 가장 긴 근로시간을 ‘자랑’하는 나라였는데, 이는 우리나라와 주요 선진국들의 근로시간 기준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이미 1935년에 주 40시간제 협약을 채택하고 1957년부터 발효했으며 1일 8시간, 1주 48시간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EU는 주 35~48시간을 기준으로 근로시간을 정하고 있으며, 7일 평균 근로시간이 시간외근로를 포함해 48시간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독일 역시 1967년 주 40시간 근무제 도입 후 1995년부터 주 38.5시간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미국은 1985년부터 주 40시간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장시간 근로는 다양한 건강문제를 일으킨다. 신체적으로는 심혈관계질환·당뇨·고혈압·대사증후군·근골격계질환·비만 등과, 정신적으로는 수면장애·불안장애·우울·자살생각·직무스트레스 등과 관련이 있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장시간 근무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장시간 근로는 관상동맥질환 위험과 뇌졸중 위험을 높인다. 즉 관상동맥질환은 주당 40시간 일하는 사람에 비해 주당 80시간 이상 일한 경우 남자는 1.76배, 여자는 1.63배 발병 위험이 높았다. 뇌졸중은 주당 40시간 일하는 여성에 비해 주당 50~60시간 일하는 여성이 1.49배, 주당 80시간 일하는 여성이 2.32배 더 발병 위험이 높다.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를 이용해 7천750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역시, 주당 60시간 이상 일한 여성은 주당 40~51시간 일한 여성에 비해 대사증후군 발병 위험이 두 배 이상 높았다. 7차 한국복지패널을 이용해 전국 18세 이상 임금근로자 3천699명의 자료로 분석한 결과에서도 근로시간이 길면 우울 유병률이 높다는 관계가 발견됐다.

이상의 자료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장시간 근로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무엇 하나 유익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좋은 말처럼 들렸던 ‘고용 유연화’라는 것이, 결국은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방식으로 해석됐던 경험을 되돌이켜 보자. 새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근로시간 유연화’라는 정책이, 안 그래도 세계 최고의 산재발생률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노동계에 더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은 자명하다. 부디 새 정부가 노동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건강한 노동정책을 펼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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