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준성 공인노무사(금속노조 법률원)

올 대선에서 제1야당 유력 주자인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대선 출마 선언 직후인 지난해 7월 “1주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발언으로 파장을 일으켰다. 다만 윤 후보는 논란이 커지자 획일적으로 근로시간을 규제하지 말고 근로조건에 대해 자기결정권을 갖도록 해 주자는 취지라고 해명했다. 본인의 발언이 “부당노동행위를 허용하자는 것이 아니”었다는 해명은 애교로 넘어가자. 그런데 이달 10일에는 인천 남동공단을 찾아 “연 평균 주 52시간을 맞추게 해 달라는 요구가 많다”면서 이와 유사한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쯤 되니 윤 후보의 의중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는 이미 시행되고 있는 탄력적 근로시간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거나, 근로시간에 대한 예외인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상시적으로 도입하고 싶은 것인 듯하다.

사실 윤 후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윤 후보가 그리는 ‘미래’의 모습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는 어떤 기업의 얘기를 하고 싶었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제일의 가전제품 업체라는 L기업의 수리기사들은 이미 그 미래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단위기간을 평균해 1주 40시간이 되도록 하면 연장근로 등에 대한 법정수당을 지급하지 않고도 특정 기간에 대해 1주 최대 52시간까지 근무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2개월을 단위기간으로 설정할 경우 첫 1개월은 1주 28시간, 나머지 1개월은 1주 52시간을 근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윤 후보의 희망대로 특정한 시기에 근로시간을 늘릴 수 있는 제도는 현행법상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 단위기간이 최대 3개월까지만 허용됐으나, 기업 편의 봐주기에는 여야가 따로 없는 정치권은 2020년 12월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해 이 단위기간을 최대 6개월까지로 늘려 사실상 상시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 두는 ‘통큰 배려’까지 했다.

문제는 이 경우 최대 1주 ‘소정근로시간’이 최대 52시간까지 늘어나는 데 더해, 1주 12시간의 연장근로를 ‘추가로’ 허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활용하면 기업은 특정 시기에 노동자들을 최대 1주 64시간(소정근로 52시간 + 연장근로 12시간)까지 근무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근로기준법 53조2항이 탄력적 근로시간제에 더해 연장근로를 하는 경우에도 ‘당사자 간 합의’를 그 요건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가 ‘합의하지 않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믿을지도 모르겠다. 순진한 소리다.

현실에서 노동자가 사용자와 온전한 ‘합의’를 할 수 있는지는 차치하고, L기업은 처음부터 근로자가 연장근로에 대한 합의권을 행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제도를 설계해 1주 최대 52시간의 근로시간 제한을 뛰어넘는 장시간 근로를 강요했다.

근로기준법 51조의2 3항은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하는 경우 근로일 시작 전 2주 전에 ‘근로일별’ 근로시간을 통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L기업은 여기서 묘수를 떠올렸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도입에 따른 소정근로시간과 근로기준법 53조2항에 따른 연장근로시간을 구분하지 않고 ‘퉁쳐서’ 합의하고 이를 노동자들에게 통보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는 연장근로를 거부하고 싶어도 하루의 근로시간 중 어디까지가 자신에게 근로의무가 있는 소정근로시간이고, 어디서부터가 자신이 합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연장근로시간인지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실제로는 특정일에 탄력적 근로시간제 도입으로 인한 소정근로시간이 1일 10시간이고 연장근로시간이 2시간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구분해 통보하지 않으면 노동자는 자신의 근로시간이 소정근로시간 8시간+연장근로시간 4시간으로 12시간인 것인지, 아니면 소정근로시간만 12시간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따라서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12시간 전부를 근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노동자가 임의로 소정근로시간을 8시간이라고 판단해 8시간 근무 후 퇴근해 버리면 소정근로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계 등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실제로 L기업의 수리노동자는 연장근로를 당연 포함해 합의한 탄력적 근로시간제가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것이라는 이유로 회사의 부당한 업무지시를 거부했다. 그는 연장근로 합의권 행사가 가능하도록 소정근로와 연장근로를 구분해서 통보해 달라고 회사에 요청했지만, 회사는 그마저도 근로시작일 2주 전에 근로일별 근로시간을 통보하라는 근로기준법 51조의2 3항을 위반해 근로시작일 당일에야 근로일별 근로시간을 통보했다. 그리고 여름 성수기가 끝나자마자 그는 회사의 업무지시를 불이행했다는 이유로 정직 1개월의 중징계를 당하고 말았다.

이 노동자는 위법·부당한 업무지시 거부를 이유로 징계한 것은 부당하다며 노동위원회에 부당정직 구제신청을 제기한 상태다. 만일 회사의 연장근로를 당연 포함한 탄력적 근로시간제가 정당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면 L기업의 수리노동자들은 앞으로도 연장근로에 대한 합의권은 ‘남의 나라’ 이야기로 남겨 둔 채, 1주 최대 64시간의 근로를 노예처럼 강제로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정치인들은 근로시간 제한을 풀어 주면 노동자에게도 좋고, 기업도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며 자신의 공약과 정책을 ‘선의’로 포장하고서 이를 ‘자유’라고 부른다. 그런데 구멍가게도 아닌 세계적 대기업조차도 명문으로 규정된 근로시간 제한과 연장근로에 대한 합의권마저 이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무시하고 피해 간다. 근로시간을 최대 주 52시간으로 제한하면 이를 64시간으로 강제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듯, 120시간이 가능하게 만들어 주면 다음은 168시간을 일할 자유를 주장하진 않을까. 지옥으로 가는 길은 늘 선의로 포장돼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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