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편집 김혜진 기자

2008년 5월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차지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태아발달기에 발생한 기형이 여러 장기에 나타나는 희귀병이다. 직업병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10여년을 살았다. 2018년 삼성전자가 직업병을 인정하고 피해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세 자녀에 대한 보상’도 포함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2019년 1월 삼성전자 반도체·LCD 산업보건 지원보상위원회에 ‘자녀질환’에 대한 보상을 신청했다. 네 달 후 ‘자녀질환 선천성기형’으로 보상금 지원 대상이 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최현철(39·가명)씨 이야기다. 그는 1일 근로복지공단에 태아산재를 신청했다. 아버지인 남성노동자의 업무로 인한 태아 건강손상을 산재로 신청한 첫 사례다. 근로복지공단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주목된다.

“임신 시기 맡던 공정,
생식독성 노출됐을 가능성 있어”

이날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 따르면 최현철씨는 2004년 12월부터 2011년 12월까지 삼성전자 LCD사업부 천안캠퍼스(현 삼성디스플레이)에서 박막트랜지스터(TFT) 공정에서 업무를 수행했다. TFT 공정은 유리기판 위에 트랜지스터 층을 만드는 공정으로, 반올림은 ‘세정-증착-포토-식각-검사’ 등 업무를 수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생식독성물질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다.

반올림은 “재해자가 근무했을 당시는 전자산업 직업병 문제가 알려지기 전으로 회사의 안전보건 관리 수준이 낮았다”며 “가장 중요한 호흡기 보호구의 경우도 2010년 즈음에야 배치됐고, 그때도 실제로는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최씨의 아내가 아이를 임신한 시기는 2007년 8월로 최씨는 직전 3개월 동안 TFT 공정 업무를 수행했다. 반올림은 “정자 생산주기를 감안하면 아버지의 경우 임신 전 3개월의 유해요인 노출이 가장 주요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아버지 태아산재가 인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의견서를 통해 “아버지를 통해 발현된 최기형성 및 생식독성물질들의 건강영향에 대한 보고가 계속되고 있다”며 “작업현장에서 생식독성물질 관리에 성별에 따른 차이를 두지 않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라고 밝혔다. 반올림은 “고용노동부 고시를 보면 생식독성은 ‘수태 전 부모의 노출로부터 발생한다’고 명시하고 있다”며 “삼성·SK하이닉스·LG디스플레이 모두 회사 지원보상 제도에서 남성노동자로 인한 아이의 건강손상에 대해 보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갈 길 먼 아버지 태아산재”

지난해 4월 대법원이 여성노동자 태아의 건강손상이나 출산아의 선천성 질환도 산재로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로 판결하면서 후속 법·제도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 환노위는 이날 고용노동법안심사소위를 열고 임신한 노동자가 위험 환경에 노출돼 장애 혹은 질병이 있는 태아를 출산한 경우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고 보험급여를 지급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산재보험법 개정안에 의견접근을 이뤘다. 개정안은 임신 노동자가 업무상 사고·출퇴근 산재를 당한 경우나, 업무상 요인으로 미숙아를 출산한 경우 산재로 인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의견접근안은 법 시행 이전 출생한 자녀에게도 소급적용이 가능하도록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어머니만 질병요인으로 인정했다. 아버지 태아산재가 신청된 마당이라 논란이 번질 전망이다.

최현철씨는 입장문을 내고 “우리 아이는 특수학교에 다니는 초등학교 5학년으로 심장·눈·귀가 모두 좋지 않고 또래보다 키가 많이 작다”며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통원진료를 받아야 하고, 언어치료도 계속해야 하는데 고등학교까지 졸업하면 우리 아이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조승규 공인노무사(반올림)는 “태아산재가 인정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며 “앞으로 법안 개정이 이뤄지기 전까지 아버지 태아산재가 포함되는 등 보완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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