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

무정파 99%

정파가 뭐지? 산별노조나 민주노총 선거 때면 정파가 내세운 후보가 대부분이다. 가끔 정파 계보를 자세히 보도하는 언론이 있지만, 조합원은 잘 모르니 그냥 찍거나 간부가 지목한 후보에 투표한다. 노조간부라고 해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경험한 ‘87세대’거나 꽤 오랜 간부 경험이 없으면 정파를 잘 모른다.

대선이나 총선 때 후보들이 어떤 정당 소속인지를 밝히고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때문에 시민은 정보를 가지고 판단한다. 그런데 10만 넘는 산별노조, 100만 민주노총 선거를 할 때 후보는 어떤 정파인지를 밝히지 않는다. 언론이나 노조 홍보물에서 알려 주지 않는다. 때문에 ‘깜깜이 선거’가 된다. 민주노총 선거에서 특정 정파 후보를 찍은 대리투표가 뭉텅이로 나온다. 사회 민주화를 선도하고 직장 민주주의를 개척했던 노조의 민주주의가 실종된 모습이다.

정파의 현장 영향력은 전반적으로 떨어졌다. 현장이 정파를 벗어나 있다. 상층에서 정파 간 논쟁이 요란해도 현장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민주노총 위원장이 경찰에 잡혀가도 그가 소속된 정파 영향을 받는 곳을 뺀 다수의 노조는 별 움직임이 없었다. 현장은 정파 맘대로 되는 곳이 아니다.

민주노총과 산별노조 상층은 정파의 영향이 크지만, 조합원 다수는 무정파다. 정파 조직원을 모두 합쳐도 민주노총 조합원의 1%를 넘지 못할 것이다. 99%의 조합원은 무정파다. 다르게 말하면 최대 정파는 무정파다. 말장난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다수인 무정파를 재발견할 때다. 한 노조간부는 무정파 조합원이 다수라는 의미와 서로의 다정한 관계를 중시한다는 의미를 담아 “다정파”라고 했다.

뒷주머니를 찬 사람들

정파를 통해 노동운동을 배운 노조간부는 늘 가던 길을 따라가는 ‘경로의존성’이 강하다. 아무리 노조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정파에 소속된 사람들은 정파를 우선에 두는 경우가 많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정파이기 때문이다.

정파는 노조와 별도로 지향과 이념, 의결구조, 활동 체계, 예산, 조직원을 발탁하고 교육하는 별도의 재생산 구조를 가진다. 워낙 탄압이 심하던 시절에 비밀 활동이 불가피했던 정파는 시대가 바뀐 후에도 노조 안팎에서 비공개적으로 움직인다. 그 결과 정파는 주체고 조합원은 동원 대상으로, 조합원은 주문하고 정파 출신 간부는 해결하는 자판기 노조로, 노조 민주주의를 패거리 싸움으로 만들기 십상이다.

노조에 있는 정파 조직원은 뒷주머니를 차는 걸 피하지 못한다. 노조를 강화하기 위해 정파가 필요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노조 강화에 필요한 것은 노조 자체다. 노조 외부의 도움은 공개적이고 다양한 협력을 통하면 된다. 그러나 정파는 비공개적으로 움직여 노조를 이용해 자신을 강화한다. 공유지인 노조를 이용해 사유지인 정파를 챙긴다. 모두를 위한 공공재를 사익을 위한 재산으로 만드는 체제를 닮아 간다.

정파는 비공식 별도 조직체계를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지만 무정파는 조합원이나 간부 중 하나로 있기에 특별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정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노력은 노조의 성과로 나타난다. 그래서 무정파를 뚜렷하게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정파 없이 건강하게 활동하는 노조들이 있다. 이들은 노조 외에 따로 조직을 만들지 않고, 은밀한 비선라인을 만들지 않는다. 정파는 덩치를 키우는 ‘정치적 세력화’에 애쓰지만 무정파는 노동시민의 ‘사회적 자력화’에 힘쓴다. 조합원과 무권리 노동자 서로를 권리 주체로 세우려 한다. 노조의 각종 회의를 통해 공식적이고 열정적으로 소통하고 조합원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패거리 다툼에 휩쓸리지 않고 민주적으로 운영한다.

조건은 성숙했다

민주노총 초기인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현장파·중앙파·국민파가 있었다. 나는 현장파였다. 2000년대 중반, 5대 정파의 하나로 분류되던 ‘새흐름’이 있었고 나는 여기에 속했다. 그러나 정파라고 할 조직 시스템이 없었다. 정파로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모임을 해체하고 노조 중앙을 떠나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패거리로 나뉘어 밥도 같이 먹지 않을 정도로 갈등을 일으킨 정파를 다시 겪었다. 정파를 넘어선 노조가 절실했다.

노조가 정파를 넘어서야 한다. 노후한 민주노조 이후의 노조, 즉 대안노조로 나아가야 노조가 더 크게 활성화될 것이다. 조건은 충분하다. 첫째로 조합원의 다수가 무정파다. 둘째로 현장에 대한 정파의 영향력이 취약하다. 셋째로 새로운 노조들이 탄생 중이다. 넷째로 조합원의 세대가 바뀌고 있다. 정파를 넘어설 필요조건은 이미 있다.

무정파가 강해지려면 충분조건이 있어야 한다. 무정파는 노조의 지향과 이념, 의결구조, 조직체계, 예산을 통해 노조를 강화한다. 노조를 통해 노조를 만들고 노조의 학습 시스템을 통해 새로운 조합원의 성숙과 간부의 성장을 돕는다. 노조 시스템을 통해 소통하고 뭉치고 실천한다. 뒷주머니인 정파보다 앞주머니인 노조를 채운다.

기꺼이 식물처럼

노조의 존재 이유보다 자기 이익을 우선에 두면 노조는 이익 도구가 된다. 노조의 존재 이유보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우선에 두면 노조는 정치 도구가 된다. 이렇게 분리된 결과 노조와 다른 뒷주머니가 생긴다. 노동시민이 서로의 권리 확대라는 통합된 목적을 노조의 존재 이유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노조에 대한 기본 태도를 재정립해야 한다.

새로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작은 노조는 서로 다 알기 때문에 간부 후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교류가 약해 생판 남 같은 산별노조나 총연합단체에서는 서로 잘 모른다. 검증 불가다. 이런 곳의 직선제는 형식적이다. 떨어져 있어도 함께 교섭하고 투쟁하면 누가 어떻게 기여하는지 좀 더 알기 쉽다. 산업연대가 약한 ‘무늬만 산별’에서는 ‘무늬만 민주주의’를 피하기 어렵다. 기업을 넘어선 일상적 교류와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현재의 ‘경선 민주주의’는 패거리의 ‘깜깜이 선거’와 정보가 없는 조합원의 ‘찍기 민주주의’로 이어진다. 작은 사업장이라면 이런 일이 덜하지만, 전국단위 산별노조와 총연합단체는 후보조(러닝메이트)를 만들고 표를 얻기 위한 별도 조직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 작용하는 정파는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아 ‘깜깜이 선거’와 ‘찍기 민주주의’로 이어진다. 약해진 민주주의를 통해 ‘듣보잡’ 후보가 당선되면 어설프게 활동하고 경력을 팔아먹는다. 사업장과 지역에서 경험을 갖추고 간부로서 소양을 위한 교육시스템을 거치는 기풍이 필요하다. 아래로부터 검증을 통한 ‘추대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식물인간” “식물국회”처럼 식물을 비하하는 표현들이 많다. 그러나 식물은 가장 번창한 생명체다. 식물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해 지구별 생명이 유지된다. 정파는 거목이 되려는 활동가들이 만들지만 무정파는 다양한 생물이 어울린 숲처럼 푸르른 조합원이 만든다. 최대 다수인 무정파는 조합원 다수로 이뤄진 현실적 실체다. 1%가 안 되는 정파가 99%를 장악하고 지배할 수 있을까. 종횡으로 연결된 노조 관계망을 통해 무정파를 강화하자.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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