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속노조 한국와이퍼분회 최윤미(가운데) 분회장과 김경숙(왼쪽) 사무부장, 신미향 부분회장. <김미영 기자>

한때 청산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진 ㈜한국와이퍼블레이드(한국와이퍼) 노사가 총고용 보장에 합의했다. 모기업인 덴소코리아는 연대책임자로 합의이행을 보증하겠다고 고용안정 협약에 서명했다. 11일 금속노조와 노조 한국와이퍼분회(분회장 최윤미)에 따르면 한국와이퍼 노사와 직상위 지배기업인 덴소와이퍼시스템, 영업권을 가진 모기업 덴소코리아는 15일 고용안정 협약 조인식을 연다.

한국와이퍼 노사는 고용안정 의견일치안에서 ‘와이퍼 이외의 신규 아이템을 확보’해 총고용을 보장하기로 했다. 자동차산업 전환기 ‘물량확보와 고용보장’이라는 생존게임 중인 자동차부품사 노사가 ‘노사공동결정’ 차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3년간 신차 수주 안 한 와이퍼공장 ‘기획폐업’ 꼬리표
갑작스러운 재고 쌓기에 ‘자발적’ 잔업거부→파업으로

한국와이퍼는 덴소코리아를 통해 현대·기아자동차에 부품을 납품하는 2차 벤더다. 덴소코리아 화성공장에서 와이퍼 핵심부품인 모터를, 한국와이퍼가 와이퍼 암·블레이드를, 협력사인 EHE가 와이퍼 링케이지를 생산하면 한국와이퍼는 이 부품을 조립해 납품하는 시스템이다. 직원 300여명 가운데 256명이 분회 조합원이다.

세계 2위 자동차부품업체인 일본 덴소가 100% 출자한 한국와이퍼는 지난해와 올해 연이어 파업을 할 정도로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회사가 2018년부터 아예 신차 수주를 하지 않아 물량감소에 따른 폐업과 구조조정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노사는 지난해 파업 끝에 고용안정 협약을 체결했지만 폐업 불안은 해소되지 않았다.

최윤미 분회장은 “올해 초 회사가 물량이 없는데도 갑자기 생산량을 늘려 재고를 쌓기 시작했다”며 “청산을 염두에 둔 회사가 재고를 쌓아 시간을 번 뒤 대체생산체제를 마련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쟁의권이 없는 상태에서 조합원들은 자발적 잔업거부와 품질향상 운동(작업 매뉴얼을 정확하게 준수하는 방식으로, 시간당 생산속도가 줄어듦)으로 재고 쌓기에 제동을 걸었다. 이어 8월12일부터 9월10일까지 한 달 가까이 하루 5시간씩 부분파업이 이어졌다. 재고가 바닥을 드러내고서야 회사는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합의서 불이행하면 노조에 손해배상”

노사가 지난달 10일 마련한 고용안정 의견일치서는 “와이퍼 이외의 물량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총고용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내년 매출액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와이퍼 이외의 물량을 확보하고 진척상황을 매달 노사가 참여하는 고용안정협의회에서 논의하기로 했다. 덴소재팬이 정점에 서 있는 글로벌 자동차부품 체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합의다. 덴소의 한국법인인 덴소코리아는 국내 4개 사업장을 기반으로 파워트레인 시스템, 와이퍼 시스템, 에어컨디셔닝 시스템 제품 등을 생산해 현대·기아차 등 국내 완성차 업체에 납품한다.

한국와이퍼 노사의 의견일치서에 “덴소코리아는 와이퍼사업부를 확충하고, 덴소의 개입으로 대체생산체계를 마련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회사는 청산·매각·공장이전 때도 노조와 사전 합의하도록 했다. 부득이 사업이전이 될 경우 모든 직원의 고용승계 조항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합의안이 불이행됐다고 의심될 경우 노사 협의·확인을 통해 즉시 시정하고, 시정되지 않으면 회사가 조합원 1명당 1억원의 금액을 노조에 손해배상하도록 한 점이다. 최 분회장은 “회사가 신뢰를 깨지 않겠다는 차원에서 손해배상 조항을 넣었다”며 “손해배상 대상은 조합원 개인이 아닌 노조이기 때문에 만약 회사가 합의안을 지키지 않는다면 조합원 256명에 해당하는 손해배상금 256억원으로 일본 덴소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노사는 이번 고용안정협약이 단체협약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고 명시했다. 의견일치서에는 “고용안정 협약의 내용이 이행될 수 있도록 연대책임자로 보증하고 확약한다”는 문구와 함께 덴소와이퍼시스템과 덴소코리아 대표이사의 서명도 담겼다. 사실상 모회사인 덴소가 한국와이퍼의 물량과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의미다. 최 분회장은 “이런 내용의 잠정합의안에도 조합원 찬성률은 88%에 머물렀다”며 “언제든지 공장이 문을 닫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지금도 크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무기 하나를 얻었을 뿐 결론을 얻은 것은 아니다”며 “자동차산업 전환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노동자의 희생만 강요하는 자본에 경종을 울리겠다”고 강조했다.

김두현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는 “국내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외국자본은 상대적으로 손쉽게 국내 사업에서 철수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와이퍼처럼 청산 절차까지 검토한 사업장에서 총고용 보장에 합의한 사례는 드물다”며 “앞으로 좋은 선례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 금속노조
▲ 금속노조

와이퍼 없는 아이오닉5 … 미래차, 모든 부품 전환 대상
금속노조 “노사공동결정 차원에서 의미 있는 진전” 평가

차량 유리를 닦는 와이퍼는 사실 내연기관과는 전혀 관련 없는 부품이다. 지금 와이퍼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해 있다. 차량 구조상 뒷유리에 와이퍼가 없어도 되는 세단형 자동차와 달리 소형차나 SUV, 해치백, 왜건 등은 차가 달릴 때 발생하는 공기 흐름이 차량 뒤쪽에서 와류 현상을 만들어 내 유리를 오염시키기 때문에 와이퍼를 없애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최근 출시된 차량은 심미적 이유로 평상시에는 와이퍼를 숨겨 놓고, 비가 올 때만 와이퍼가 돌출돼 기능하는 ‘히든타입 리어 와이퍼’를 장착했다. 하지만 올해 출시된 전기차 아이오닉5는 후방 와이퍼를 아예 없앴다. 와이퍼 대신 날개 타입 스포일러에 구멍을 내고 여기를 통과하는 바람을 이용해 빗물이나 오염 물질을 제거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전기차에는 내연기관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와이퍼를 비롯한 모든 부품이 존폐 기로에 섰다. 그만큼 자동차부품 노사의 근심도 깊어지고 있다.

한국와이퍼의 고용안정 협약은 자동차산업 노사관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오기형 금속노조 조사통계부장은 “한국와이퍼 고용안정 협약은 고용안정 책임 당사자를 확장한 점에서 의미가 상당하다”고 말했다. 산업전환기 개별 기업 수준에서 고용안정을 달성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지분관계가 없지만 동일한 자본 계열회사로, 국내법적 제약을 넘어 외국에서 영업활동을 영위하는 모회사로 확장했다는 평가다. 그는 “실질적으로 동일한 목적 아래 활동하는 경제공동체지만 형식적 법인관계를 방패로 책임을 회피한 자본주의 법체계에서 기업별 노사관계를 뛰어넘어 국제적이고 초기업적인 노사관계를 형성한 것은 의미 있는 성과”라고 강조했다.

금속노조는 한국와이퍼분회 사례가 노사공동결정제도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진전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동안 고용안정 위주였던 노조의 투쟁이 글로벌 부품기업의 생산방침에 직접 개입해 물량을 확보하고 이에 대한 이행점검 시스템과 불이행 책임을 명시한 점이 앞으로의 자동차부품 노사갈등 때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