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코친의 숙소 ‘마들렌인’은 유럽풍의 2층짜리 목조 주택이었다. 1층은 주인네가 쓰고 2층의 방 두세 개를 에어비앤비에 올려 여행객들에게 내어주고 있었다. 나이가 좀 있는 듯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소리가 좀 거슬리기는 했지만, 주인 내외가 꼼꼼하게 관리한 탓인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문 앞에 조용히 가져다주는 아침 식사는 3만원짜리 숙소에는 넘친다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기분 좋은 여행의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오늘은 포트 코친의 도심이라 할 수 있는 마탄체리쪽으로 가 볼 생각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어제 예약해 둔 인도 전통 가면극인 ‘카타칼리(kathakali)’ 공연도 봐야 하는 터라 계획만으로도 하루가 빠듯했다. 숙소에서 마탄체리까지는 설렁설렁 걸어서 1시간은 걸리는 만만치 않은 거리였지만, 그렇다고 코친 동네 구경을 안 할 수는 없어서 일단 걷기로 했다. 제법 부티 나는 주택가를 지나 다리 하나를 건너면 재래시장길이 나온다. 평범한 시장길에서 특별한 점이라면 인도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소고기 정육점이 눈에 띈다는 것 정도다. 소고기를 이렇게 내놓고 파는 경우는 흔치 않았는데, 아무래도 힌두교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동네 분위기 탓 아닌가 싶다. 그래도 내가 카메라를 대면 사진은 찍지 말라고 손사래를 친다.

땀이 슬슬 옷을 적실 즈음에 마탄체리 궁전에 도착했다. 소박한 정원과 건물이라 궁전이라는 이름이 좀 과해 보이기는 한다. 마탄체리 궁전은 ‘더치(Dutch) 궁전’이란 별명이 붙어 있는데, 이름 그대로 네덜란드인들이 보수공사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내는 소박한 박물관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땀을 식히기에는 아주 적당한 선풍기 바람과 그늘과 앉을 곳을 제공해 줬다. 근처 학교에서 체험학습이라도 온 듯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통에 땀만 겨우 식히고는 도망치듯 궁전을 빠져나왔다.

궁전을 나오면 유대인 회당(예배당)인 ‘파르데시 시나고그’가 이웃하고 있다. 겉모습은 그냥 가정집 같아 보이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제법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코친의 유대인들은 기원전부터 북아프리카와 중동·인도를 잇는 무역로를 통해 향신료 무역을 하던 이들이라고 한다. 그 뿌리를 쫓다 보면 솔로몬의 이름까지 나오니 얼추 이 동네 터줏대감이라 해도 될 만하다. 2천년을 이 동네에서 정착해 살던 유대인들이 한때는 2천500명이 넘어가기도 했고, 시나고그 바로 옆에 향신료 거리를 만들 정도로 번성하기도 했다. 그러다 자신들의 나라 이스라엘이 만들어지자 대부분 유대인이 짐을 챙겨 돌아갔고, 지금은 겨우 20명 남짓만이 남아 유대인의 2천년 역사와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건물 안 사진은 찍을 수 없어, 건물 밖 유대교 문양을 중심으로 몇 장 찍고 있는데 마탄체리 궁전을 점령했던 아이들이 몰려드는 모습을 보고는 또 황급히 자리를 떠난다. 잘못 걸리면 함께 사진찍기 무한루프에 걸려들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단체 움직임에서는 슬쩍 비껴 나가 있는 게 좋다. 왜 그런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인도사람들은 낯선 외국 여행자(특히 우리 같은 동양인)와 함께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무리 중 일부와 한 번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 그 끝이 언제일지는 예상할 수 없는 경우도 생긴다.

시나고그 앞을 지나 길게 이어진 거리인 시나고그 레인과 유대인 마을길은 향신료와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꽉꽉 들어찬 거리다. 그래서 보통은 향신료 거리라고 부른다. 가게 안을 돌아보면 정말 듣도 보도 못한 향과 색의 향신료들이 가게마다 가득 쌓여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선뜻 사지지는 않는다. 어디에 쓰는 무슨 맛인지를 알 수 없으니 뭐 하나 고를 수가 없는 게 당연하다. 결국 향신료 거리에서는 향신료 하나 사지 못하고, 숙소 앞 구멍가게에서 파는 10개짜리 작은 약봉지를 이어 붙인 향신료 샘플을 선물용으로 몇 개 챙기고 말았다.

저녁까지 일찍 해결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카타칼리 공연장을 찾았다. 카타칼리란 이름은 ‘드라마’를 뜻하는 ‘카타’와 음악이라는 뜻의 ‘칼리’의 합성어로 춤과 연극, 음악이 합쳐진 일종의 악극이다. 골목 깊숙이 숨어 있는 공연장에는 벌써 제법 많은 여행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 일찍 예매해서 제일 앞자리를 차지했다. 악극이라니 스토리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다행히도 그날그날 공연 내용을 여러 나라 버전의 인쇄물을 만들어 나누어 주고 있었다. 우리말 버전도 있어 감개무량! 카타칼리의 내용은 대부분 인도의 고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서 가져온다. 오늘은 <마하바라타> 중 여왕의 남동생인 악마 같은 키차카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공연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부터 배우들은 무대에 눕거나 앉은 채로 분장을 하고 있었다. 향신료 시장에서 본 향신료 색깔만큼이나 다채로운 염료로 얼굴을 채워 가는 배우들. 분장이 끝나고 나면 원래의 얼굴은 전혀 알아볼 수 없고, 그저 신화 속 인물만 남아 있게 된다. 무대 분장에서부터 이미 공연은 시작된 셈이다. 한 시간 남짓 이어진 공연은 한 번은 꼭 보라고 권할 만큼 빠져들 만했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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